집무실에서 노트북을 사용 중인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된 노무현 대통령은 뭘 하고 지낼까. 이 질문에 청와대 한 참모는 “드라마 ‘웨스트 윙’을 보면서 지낼 것”이라는 농 섞인 답변을 내놓는다. ‘웨스트 윙’은 미국 대통령과 비서진들의 활동을 소재로 한 정치 드라마. 노대통령은 이를 녹화까지 시켜놓고 볼 정도로 마니아다. 노대통령이 ‘웨스트 윙’을 본다고 드라마광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청와대 참모는 “‘웨스트 윙’을 보면서 자신이 놓쳤던 지도력과 직관 등을 되새길 수 있고 흐트러진 초심도 다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휴식을 하되 재충전의 시간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미다. 김훈씨가 쓴 ‘칼의 노래’를 집어 든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소재로 한 이 소설에는 ‘아직도 나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다’는 배수의 진과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무장으로서의 고뇌가 녹아 있다.
‘193개’의 금배지가 움직여 만든 탄핵정국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노대통령에게 ‘휴가 아닌 휴가’를 가져다주었다. 노대통령 주변에는 탄핵이 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다소 여유가 엿보인다. 한 참모는 “탄핵이 주는 교훈은 되새기되 무기력하게 탄핵정국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드라마 ‘웨스트 윙’ 보며 흐트러진 초심 다잡을 것”
노대통령은 청와대 생활 1년여 동안 개인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오죽하면 부인 권양숙 여사가 “정장을 입고 세 끼 밥을 먹는 것은 큰 고역”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직무가 정지됐으니) 평상복을 입고 밥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손주 보는 재미도 쏠쏠할 나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아들 건호씨 부부의 청와대행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권여사는 얼마 전부터 임신 중인 딸(정연)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노대통령은 공식 일정이 없는 날이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을 청와대로 초청, 자주 ‘만찬’을 가져왔다. 고교(부산상고)동창인 정화삼씨(스포츠용품업체 상무)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등이 지난해 청와대 만찬에 가끔 참석했던 사람들이다. 지난해 5월 노대통령이 “밖에서 보면 (대통령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속마음을 처음 열어 보인 것도 이들에게였다고 한다. 이들은 그런 노대통령에게 “지도자는 홀로 울어야 한다”는 조언을 전달하기도 했다. 노대통령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청와대로 부를 수도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거기에 인터넷 서핑을 즐겼던 노대통령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다른 참모의 설명은 청와대에 흐르는 다른 기류를 담고 있다. 노대통령이 사사로이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는 것. 이 참모는 “손녀가 재롱을 부린들 그게 눈에 들어오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매사 낙관적이던 노대통령이 탄핵안 표결을 앞두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며 “탄핵안 가결 이후 침울한 관저 분위기가 청와대 경내를 감싼다”고 전했다.
민주당 고위당직자 J씨는 “탄핵안이 가결된 이상 노대통령은 스스로 진퇴문제를 결론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노짱’을 지키려는 피플 파워가 세를 모으고 있지만, 노대통령으로서는 진퇴문제를 결정하라는 이런 정치공세에 대비해야 한다. 특히 총선 결과 열린우리당의 ‘전과’가 신통치 않을 경우 정치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 뻔하다. 이미 스스로 총선결과와 재신임 문제를 연계해놓은 상태라 진퇴와 관련한 정치적 판단과 결단은 피할 수 없다.
총선과 관련한 역할도 정립해야 한다. 총선 결과는 사실상 탄핵을 추인해주거나 백지화하는 명분을 제공한다. 때문에 어떤 문제보다 우선해 방향이 설정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