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상황에서도 명분을 놓치지 않았던 정치인이다. 지난 대선 당시 거리유세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
노대통령이 재신임 선언을 할 때만 해도 혼란스러워하던 정치권은 시정연설에서 정치일정이 드러나자 손익을 따지고 정국 전망을 하느라 분주하다. 당장 연내 국민투표를 주장하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입장이 어려워졌다.
한나라당의 경우 대응방안 마련도 쉽지 않아 보인다. 10월10일 재신임 선언 직후 한나라당은 노대통령의 발언을 ‘정략적인 수단’으로 폄하하면서 “정책과의 연계 없이 재신임만을 묻는 국민투표를 연내에 실시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여야 대결 양상 ‘대선’ 방불할 듯
그런데 노대통령이 이런 한나라당의 의견을 모두 수용해 구체적 날짜까지 적시하고 나서자 다음 수순이 막막해졌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대통령 측근 비리에 대한 특별검사제(이하 특검)와 국정조사를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국민투표 정국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선 대통령 측근 비리를 핵심 이슈로 삼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 또한 만만치 않을 듯싶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시정연설 도중 노대통령이 최도술씨 비리의혹에 대해 ‘국민들 앞에 낯뜨겁다’고 발언한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만약 한나라당이 최씨 문제로 특검을 요구해오면 상황에 따라 특검 이상의 방식도 받아들인다는 게 노대통령의 구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최씨뿐 아니라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도 비자금 수수의혹을 받고 있지 않나. SK비자금 문제에 관해선 한나라당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섣불리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요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민주당도 처지가 딱해졌다. 노대통령의 구상대로 12월15일을 전후해 국민투표가 이뤄질 경우 민주당은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가의 한 소식통은 “국민투표도 선거다. 대통령직을 걸고 치르는 선거전에서 제3자가 주목받을 여지는 없다. 한나라당과 노대통령 지지세력을 대표하는 통합신당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이다. 민주당과 자민련 같은 기타 세력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와 통합신당에서는 ‘역시 노대통령’이라는 감탄이 흘러나오고 있다. 청와대 인사들은 노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자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대통령의 시정연설 직후 청와대에는 활력이 넘쳐났다. 한 비서관은 “솔직히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이 있기 전까지 청와대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자신의 자리를 걸고 국민 심판을 받겠다고 나선 이상 이제 침묵하지 않을 작정이다. 무슨 일이든 우리 입장을 적극 밝히고 대처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8개월을 지내는 동안 지금처럼 명료하게 내 할 일이 보인 적이 없었다. 한번 해보자는 투지가 생긴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노사모’는 노무현 대통령 탄생의 일등공신이다. 재신임 정국이 시작되자 한때 흩어졌던 노사모 회원들이 다시 결집하고 있다.
‘내각 교체’ 명분으로 각료들 대거 총선 투입할 수도
노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으로 정치권은 희비가 엇갈리고 있지만 지금 당장 나타난 판세가 사실상 재신임 정국의 마지막을 알리는 17대 총선일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정치상황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내년 4월15일까지 정국은 크게 3등분해 살펴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재신임을 선언한 10월10일부터 국민투표일로 예정된 12월15일까지로, 여야는 지난해 대선에 버금가는 화력을 동원해 홍보전을 벌일 전망이다.
두 번째 시기는 국민투표 직후부터 내년 2월 중순까지의 국민투표 뒤처리 기간. 노대통령이 재신임을 받는 데 성공했을 경우 노대통령 앞에는 내각 전면 교체 및 국정쇄신이라는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지만, 반대의 경우 노대통령은 쓸쓸히 퇴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세 번째 시기는 2월 중순부터 4월15일 총선거일까지 두 달간으로 사실상 국민투표 결과 드러난 민심을 근거로, 총선 국면을 맞아 전국적으로 논쟁이 확산되면서 정계재편의 대혼란이 빚어지는 시기다.
앞으로 6개월간 이어질 대장정에서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몇 가지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이 가운데 노대통령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결과는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에 앞서 노대통령이 평소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정치구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대통령 후보 시절 노대통령은 “대통령이 의회를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다.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3권분립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뜻을 신념처럼 강조해왔다. 실제 노대통령은 민주당 분당과 신당 창당 과정에서 평소 주장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에 띌 만한 참견을 하지 않았다.
노대통령의 한 386측근 인사는 “내년 총선에서 노대통령이 이루려는 최고의 정치적 목표가 통합신당의 약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노대통령과 ‘코드’가 잘 맞는 통합신당이 다수당이 되는 것이 좋지만 그것만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인사의 이어지는 설명.
“대통령은 한국 정치판 자체를 바꾸고 싶어한다. 노대통령은 정치개혁과 지역통합을 이룬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따라서 내년 총선을 계기로 여야 모두의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이뤄내고 그 과정에서 지역주의를 타파하는 게 노대통령이 바라는 정치개혁의 요체다.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게 노대통령의 판단이다. 한나라당 내부에서 정치개혁의 대의에 공감하고 과거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진세력이 득세한다면 국정의 파트너로서 얼마든지 손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정치환경을 만들기 위한 정치개혁이 대통령의 숙원이다.”
이런 노대통령의 구상이 결실을 맺으려면 재신임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어야 한다. 여권 인사들은 “적어도 70%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힘 있는 후속조치가 가능하다”고 전망한다. 여기에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얻으면 금상첨화다. 국민의 지지가 높다면 정치개혁 입법의 추진도 병행할 수 있다는 게 여권 고위층의 판단이다. 실제 노대통령은 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정치개혁 입법을 강도 높게 주장했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위한 입법을 당부하기도 했다.
노대통령은 재신임을 받을 경우 내각 전면 교체를 비롯한 국정쇄신을 단행하겠다고 했다. 정가 소식통들은 노대통령의 이 발언에 대해 ‘국정쇄신’보다는 ‘내각교체’에 무게를 두고 있다. 내각교체도 몇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내년 총선에 가급적 많은 수의 현정부 각료들을 내보내겠다는 뜻으로 풀이해볼 수 있다. 국민적 인기가 높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 같은 이가 그 대표적 예가 될 수도 있다. 노무현식 정치개혁의 전도사로 현정부 초대 각료들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내각교체를 통해 노대통령은 지난 8개월간 여론의 지탄을 받아온 ‘코드 인사’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인재등용의 풀을 넓혀나갈 것으로 예측된다. 국정쇄신의 방향은 재신임 후 있을 각료 인선에서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란 얘기다. 한마디로 재신임 성공을 계기로 노대통령은 전국적 범위에서 정치권 물갈이를 선도할 것으로 보인다. 12월15일 노무현이 승리한다면 내년 4월15일까지 정치권은 사상 최대의 물갈이 논란에 휩싸일 공산이 크다.
재신임받아도 총선 통해 정치구도 변화 없을 땐 궁지 몰릴 가능성도
하지만 재신임 정국의 초입인 현 상황에서 노대통령의 구상이 결실을 맺을지는 미지수다. 취임 이후 8개월간 노대통령은 끊임없이 매를 맞으면서 지지도를 까먹었다. 현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평가가 장기간에 걸쳐 고착화되면서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는 점도 노대통령 진영의 고민거리다. 재신임 선언이 있은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재신임하겠다는 비율이 높았지만 국정 지지도는 여전히 30%대에 머물렀다.
국민투표는 총력 홍보전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홍보의 창구인 언론과 노대통령 간의 불편한 관계는 앞으로도 해소될 것 같지 않다. 노대통령의 리더십을 의심하는 밑바닥 여론 자체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노대통령 입장에선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대다수 정치권 인사들은 만약 국민투표가 치러진다면 어떤 식으로든 노대통령이 재신임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한다. 하지만 재신임받더라도 지지율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국민투표 캠페인이 시작되면 노대통령의 실정과 측근들의 비리의혹을 꼬집는 야당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국민투표를 통해 재신임을 받았다 해도 노대통령 앞에는 내년 4월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엄청난 정치적 격변이 없는 한 한나라당이 제1당의 자리를 지킬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노대통령이 그렇게 바라던 세대교체마저 실현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정치권 인적구조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이번 재신임은 노대통령의 나머지 임기를 보장하는 보증서가 될 수 없다.
과거 정권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만약 가까스로 재신임을 받았는데 총선 결과 지금의 정치구도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노대통령이 다음에 선택할 카드가 없다. 재신임 이후에도 지금처럼 지지율이 바닥을 헤맨다면 그 다음엔 어떡할 것인가. 또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가서 만약 야당이 ‘하야’를 요구하거나 ‘탄핵’을 할 경우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솔직히 이번에 꺼내든 노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카드는 그 뒤를 받쳐줄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한 카드다”고 말했다.
국민들이 노대통령의 재신임에 결국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는 판단의 배경에는 당장 대통령 자리가 빌 경우 국가적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국민들의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본격 국민투표 국면에 접어들면 불안 요인도 사라질 것이다.
노대통령이 불신임될 경우 당장은 대안이 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기 주자 그룹도 우후죽순처럼 몸을 일으킬 것이다. 대통령의 입에서 재신임 선언이 나오자마자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회창 전 총재의 정계복귀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왔는데 이런 정황 역시 노대통령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현행 법은 대통령 궐위시 60일 이내에 선거를 치르도록 돼 있다. 한나라당을 위시한 여타 정당의 잠재적 대권주자로서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려는 노대통령. 그 앞에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노대통령의 전격 선언 이후 한나라당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민주당도 그냥 있지 않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통합신당은 대통령의 우군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리고 ‘노무현의 민병대’ 노사모도 재기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본격적인 재신임 정국의 막이 이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