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의 가재도구 경매가 열린 날 연희동 전씨 자택 앞 골목길은 물건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시민들로 북적거렸다(왼쪽). 경매 물품이 공개된 전씨 자택 별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집행관의 외침이 정적을 깨뜨렸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팽팽히 긴장돼 있던 분위기가 일순간 탁 풀어졌다.
“이름이 뭡니까?” “그 물건을 왜 사신 거죠?” 김씨에게 몰려드는 기자들 사이로 경매 테이블을 빽빽이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허탈한 듯 몸을 돌렸다. 10월2일 오후 5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한 놀이터의 풍경이다.
400~500명 몰린 연희동 골목 ‘북새통’
연희동은 이날 오전부터 북적거렸다. 법원이 1900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미납한 전두환 전 대통령 소유 가재도구를 경매에 붙인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동네주민뿐 아니라 경북 전남 등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까지, 줄잡아 400~500여명의 사람들이 전씨의 자택이 있는 연희동 좁은 골목에 모여들었다. 예상외로 사람이 몰리자 법원은 경매 장소를 전씨 자택 별채에서 인근 놀이터로 변경해야 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제각각. “전직 대통령이 나랏돈을 안 갚아 강제 경매까지 당하는 현실이 부끄럽다”고 말한 진봉생씨(73)처럼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이들도 많았지만, “평생 가봐야 언제 대통령 집에 들어가볼까 싶어 왔다. 대통령 집도 구경하고 쓰던 물건 중에서 좋은 게 있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사고 싶다”(이영희씨·46)며 은근한 기대감을 표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대구에서 올라온 손만수씨(63)는 “신문에서 어른이 쓰던 물건을 판다는 소식을 듣고 한 가지라도 내 돈으로 사서 돌려드리고 싶어서 왔다. 특히 그분이 아끼셨을 도자기를 한 작품이라도 건지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역사상 최초로 벌어지는 전직 대통령의 가재도구 경매에 얼마간 흥분해 있었다는 사실. 그동안 동산 경매에 여러 번 참가했었다는 김모씨(46)는 “동산 경매는 남이 썼던 물건을 압류해 파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물건을 되찾으려는 당사자 외에는 거의 참가하는 사람이 없다”며 “서로 눈치를 보며 몇 차례 유찰시킨 후 감정가보다도 헐값으로 물건을 매입하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정말 사람이 많이 왔다”며 놀라워했다.
법원은 인파가 몰리자 경매 장소를 전씨 자택 인근 놀이터로 변경했다(왼쪽). 경매 참가자들이 잇따라 100만원짜리 수표를 보태며 호가를 높이는 동안(가운데) 오전부터 경매를 기다렸던 평범한 서민들(오른쪽)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지켜보기만 했다.
경매 물품을 감정한 감정평가사들의 의견도 ‘쓸 만한 것이 없다’는 것. 가구의 가치를 감정한 이상돈씨는 “전씨 가구들은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제품보다 오히려 떨어지는 것들”이라며 “중간 이하 수준”이라고 말했고, 미술품을 감정한 유재찬씨도 “좋은 작품이라고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전씨가 이 물건들을 내놓으면서 예상한 가격이 6235만원이었지만, 실제 감정가는 1790만원에 그쳤다는 사실도 물건들이 ‘수준 이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전두환씨 자택 별채에서 시민들이 경매로 나온 도자기와 주전자 등을 둘러보고 있다.
총 7가지 종목으로 나눠 진행된 경매에서 전씨 물건들은 감정가 30만원짜리 골프채가 900만원, 감정가 55만원인 도자기 5점이 2500만원에 낙찰될 만큼 고가에 팔려나갔다. 감정가 1790만원에 ‘불과’했던 제품들이 벌어들인 총 금액은 1억7950만원.
전두환씨 소유 7년생 진돗개 한 쌍. 이 개들을 낙찰받은 김모씨는 전씨에게 돌려주겠다고 밝혔다.
경매가 끝난 후 놀이터를 빠져나가던 김현교씨(37)는 “어이없는 물건과 어이없는 가격에 두 번 상처받았다”며 “결국 전씨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돈 많은 이들에게는 또 한 번 돈 벌 기회를 주기 위해 벌인 한바탕 쇼가 아니었나 싶은 허탈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