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한 9월13일 오전 중앙재해대책본부 상황실.
이번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정부의 재해대응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과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피해자의 상당수가 뒤늦은 경보와 체계적이지 못한 구호 과정에서 어이없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매미’에 강타당한 일본에서는 단 1명의 사망자와 9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데 그쳤다. 미국에선 ‘매미’ 못지않은 강력한 허리케인 ‘이사벨’이 동부지역을 강타했지만 9월22일 현재 30명이 사망하고 수십억 달러의 재산피해를 입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인명피해는 대부분 교통사고가 원인이다. 미 당국이 허리케인이 상륙하기 3~4일 전 해당지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주민 30여만명에게 강제 대피명령을 내리는 등 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피해에 그친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 발생한 ‘매미’로 인한 피해는 상당 부분 인재라고 볼 수 있다. 지난해 태풍 ‘루사’를 겪은 뒤 감사원은 10월부터 올 1월까지 정부의 자연재해 대비 실태에 대한 감사에 착수해 그 결과를 통보했다. 거기서 제기된 문제점이 어느 정도 개선만 됐어도 이번의 피해는 절반 이상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당시 감사원은 행정자치부(이하 행자부) 등 76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방재, 기상, 하천 등 분야별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지시했다. 방재 분야의 경우 인위 재난을 총괄하는 중앙안전대책위원회와 자연재해를 총괄하는 재해대책위원회가 비상설기구로 돼 있어 기획 조정 평가 등 예방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데다 업무가 중복되고 효율성도 떨어지므로 재난·재해 관리 전담기구를 둬야 한다고 지적됐다. 그러나 재난관리를 총괄하는 소방방재청 신설은 ‘매미’를 겪고서야 서두르고 있다. 지난 5월 행자부는 이미 ‘소방방재청 신설법(안)’과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안)’을 준비했으나 내부 및 관련 부처간 갈등으로 입법이 지지부진했다. 부서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명칭이 재난관리청에서 소방방재청으로 바뀌고, 소방공무원만의 독립이 검토되는 등 4개월여간 우여곡절을 겪다 이번 태풍 피해를 계기로 당초 입법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쨌든 정부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관련법안이 통과되도록 할 계획이다.
‘매미’ 겪고 부랴부랴 ‘소방방재청’ 추진
지난해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뒤 한 주민이 허탈한 표정으로 가재도구를 닦고 있다.
기상 분야의 경우 기상청 기상레이더가 내용연수가 초과된 구형이어서 오차범위를 벗어난 관측 결과를 내놓거나 고장을 일으키는 일이 잦은 것으로 드러났다. 제주도 동부지방 등 태풍 등의 기압골이 이동하는 주통로나 강원도 북부 등 집중호우 빈발지역이 사각지역으로 방치돼 있었다. 특히 기획예산처는 레이더 교체와 신설을 위한 예산편성을 요구받고도 검토하지 않았다.
댐은 설계 기준인 가능최대강수량(PMP)이 기상이변 등으로 크게 높아졌는데도 수자원공사가 관리하는 댐 25개 중 21개가 2006년에나 PMP 안정성 공사를 계획하고 있으며, 한강 수계의 수력발전용 댐들은 홍수기에 홍수 조절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지적사항들의 개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공무원과 시민들의 안전의식이다. 태풍 ‘매미’ 앞에서도 안전의식의 유무에 따라 그 피해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하기 4일 전인 9월8일 기상청은 ‘추석연휴 후반 태풍이 한반도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예보했고, 중앙재해대책본부도 3단계 대비책을 마련해 지방자치단체에 내려보냈다. 침수 위험지역을 관리하고 선박 출입을 통제하는 등 사전대비책을 마련하라는 내용이었다.
중앙재해대책본부의 지시에 따라 대비책을 세우고 이행한 시·군·구의 경우 인명은 물론 재산피해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부산 서구청은 태풍이 강타하기 전 전체 공무원의 절반 가량을 현장에 내보내 송도 해변 주민 500여명을 안전지대로 강제 대피시켰다. 그 결과 엄청난 해일이 들이닥쳤지만 주변 횟집과 주택 200여채만 부서졌고 인명피해는 1명도 없었다. 울산 북구청의 손성익 수산담당 계장은 태풍이 몰려오기 이틀 전부터 관할지역을 다니며 어선을 육지로 인양케 하는 등 대비활동을 펴 큰 사고를 막았다.
‘안전’은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 방재 후진국
그러나 마산시에서는 해운동 일대에서 10여명이 수장되는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사고 발생 4시간30분이 지난 뒤 주민신고를 받고서야 사실 확인 작업에 들어갈 정도였다. 해일이 일어난 해변 근처 건물의 지하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도 ‘안전 불감증’ 탓이다.
조원철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시민들이 자연재해에 대해 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며 “시민들의 의식이 바뀔 수 있도록 교육 등을 통해 필요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재해 보상 등 사후 대책이 시민들에게 허구의 기대감을 갖게 해 안전 불감증을 키우는 것도 사실이어서 앞으로 재해대책을 방재 위주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선진국은 사전 예방을 최우선 재해행정으로 규정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데 반해 후진국은 피해 발생 이후 수습과 복구 위주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재해대책은 후진국형이다. 이번 사태를 겪고 정부가 내놓은 대책도 모두 수습과 복구 위주다. 다음번 자연재해를 대비할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은 뒤로 밀려 있는 상태다.
1959년 우리는 태풍 ‘사라’를, 일본은 태풍 ‘이세만’을 맞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대처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우리는 당시 풍수해대책법을 마련해 사후 지원 및 보상 위주 행정을 펴나간 반면, 일본은 재해대책기본법을 제정해 5개년 계획을 착실히 추진했다. 현재는 8차 5개년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며, 예방사업에만 연간 4조엔이 투입된다.
심재현 국립방재연구소 연구기획팀장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압축적 근대화를 이뤄온 우리 사회가 안전 문제를 부수적인 문제로만 생각하다 보니 해마다 ‘압축적인’ 재해 피해를 겪게 된다”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안전을 본질적인 문제로 파악하고 지금과는 다른 정책, 제도,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안전관리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