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8살, 두 아이의 엄마다
경기도 성남시에 살며 남편과 함께 작은 장갑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서방님, 그러니까 시동생이 진 카드 빚 4300만원이다. 어제저녁에는 그 때문에 남편과 대판 싸웠다. 남편은 “재작년 빌려갔던 500만원을 당신이 하도 갚으라고 난리 치니까, 걔가 무리하게 카드를 긁다 더 큰 부스럼이 나지 않았냐”며 날 막 몰아붙였다. 나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500만원이 어디 적은 돈인가. 어렵게 어렵게 모은 쌈짓돈을 빌려갔으면 약속한 3개월은 아니어도 1년 안에는 갚아야 하지 않나. 우리도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빠듯한 살림이다.
그래서 나는 추석이 두렵다. 까짓 상 차리는 건 별일이 아니다. 하루이틀 해온 것도 아니고, 시어머님 돌아가신 후로는 누구 눈치 안 보고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외려 속 편하다. 다만 대기업 직원인 손위 동서가 솔직히 좀 눈꼴시다. 추석 전날 점심때쯤 와 나름대로 열심히는 하는데, 일손이 느린 데다 요리 솜씨도 부족하다. 나이도 나보다 세 살이나 어려, 나는 시아버님 없는 자리에선 “형님, 파 씻어, 불 좀 줄여” 이렇게 반말도 좀 하고 그런다.
“돈이 웬수 … 그래도 핏줄이기에”
말이 다른 곳으로 좀 샜지만, 하여튼 나는 이번 추석이 다가오는 게 정말 걱정스럽다. 결국 다 돈이다. 벌써 작년 말부터 수금이 잘 안 돼, 명절이라고 시아버님 용돈 몇 푼 드리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시동생 문제로 한바탕 분란이 일 것이 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형님네뿐이다. 그나마 집도 있고 맞벌이도 하고, 아무래도 사정이 좋은 편이다. 하여 이번 추석 때는 그 주는 것 없이 얄미운 손위 동서가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사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우리만 해도 IMF사태 이후 계속 힘들어, 시아버님이 32평 아파트를 18평으로 줄여가며 먹고살 길을 열어주셨다. 형님네 도움도 꽤 받았다. 그런데 3년도 안 돼 또 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우리집이나 막내네나 결과적으로는 부모님과 형님네에 자꾸 손실을 끼치게 돼버렸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형님네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안 한 나다. 부모님 가까이 살며 몸 고생은 내가 다 했다는 생각에 오히려 목에 힘주며 살아왔다. 가방 끈 좀 길다고 잘난 체하는 모습도 보기 싫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나긋나긋하게 굴어서라도 시동생 문제를 형님네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밀어붙여야겠다. 그러자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매달 시아버님 생활비 30만원을 대는 것도 손위 동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러게 왜 잘난 여자가 이런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냐 말이다.
명절은 가족끼리 모여 즐기는 날이라는데, 돈 문제가 끊이질 않는 우리 시댁의 명절은 이렇게 늘 살얼음판이다. 이웃집 여자들도, 남편 친구들도, 뭐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표정은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땐 “추석이고 뭐고 다 귀찮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하지만 명절이 아니면 또 언제이렇게 머리 맞대고 앉아, 부모 형제 사는 꼴 돌아보며 투닥대고 등 비빌 것인가. 이 험한 세상, 그래도 믿을 건 핏줄뿐이다.
나이는 42살. 유학 가 박사학위 따고 교수까지 됐으니 경북 안동 인근 작은 마을인 우리 고향에선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런데도 명절마다 고향을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10시간 넘게 걸리는 운전이 힘들고 지겨워서만은 아니다. 손에 익지 않은 시골 부엌 살림에 내내 표정이 밝지 않은 아내 눈치가 보여서만도 아니다.
내 마음을 묵지근하게 누르는 건,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작금의 정치 상황이다. 남자들이라는 것이 큰집 사랑방에 모여 술잔이라도 기울일라치면 모로 가도 결국 닿는 것이 정치요 남북 문제다. 하물며 ‘골수 TK’인 우리 고향에서임에랴.
지난 설 때가 생각난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라 분위기가 영 썰렁했다. 시작은 화기애애했는데 좀 지나다 보니, 결국 두 패로 나뉘어 일대 설전을 벌이는 상황이 됐다. 물론 일방적으로 몰리는 쪽은 나를 비롯한 젊은 세대, 도시 물 좀 먹은 자손들이다. 처음에는 ‘정말 가만있어야지, 조용히 듣기만 해야지’ 하고 손가락으로 장판지에 붙인 청테이프만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얘기가 “이제 빨갱이 세상 다 됐다” “철없는 것들이 나라 다 망친다”는 부분에 이르자 나도 몰래 “그렇게만 보실 일은 아니지요” 하고 말대꾸가 나와버렸다.
술잔은 돌고 민심은 날고
다음부터야 시쳇말로 ‘안 봐도 비디오’다. 대선 전후의 이런저런 상황에 대한 집안 어르신들의 걱정과 푸념이 이어졌다. 마치 내가 ‘선거혁명’의 주역이라도 되는 듯 책망에 가까운 질문들이 쏟아졌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좀 강하게 주장을 펴다 종국에는 “많이 배운 놈들은 위아래도 없냐”는 말까지 듣게 됐다.
아내가 눈치껏 불러낸 덕분에 난감한 자리를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2년 전 끊은 담배가 유난히 당겼다. 아내는 “그러게 가만있지 왜 또 나섰냐”며 나를 타박했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기쁨과 설렘은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이런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게다. 명절 연휴 후 동료교수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비슷한 사례들을 여럿 접하게 된다. 이전에는 본인이 더 흥분해 난리를 쳤는데 이젠 다 귀찮아 “전 공부만 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말로 아예 이야기의 물꼬를 틀어버린다는 사람도 있다. 학생 녀석들도 예외는 아니다. “또 어른들이랑 싸우게 될까봐 집에 가기 싫다”고 한다. 일부러 ‘불화’를 조장하려는 듯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물은 후, 대답이 좀 비뚜름하다 싶으면 일장 훈계를 하는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부 이모부 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추석은 한총련 문제, 미군 철수 문제, 인공기 훼손 사건, 참여정부 6개월에 대한 각양각색의 평가들로 집집마다 제법 왁자할 듯하다. 호주제 폐지론은 또 하나의 ‘핵폭탄’이다. 혈족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서로 전혀 다른 환경, 이해관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아닌가. 그런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분위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는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한 울타리에 묶여 있는, 이 서글프고도 난감한 ‘공존의 그늘’.
그러나 한편으론, 충돌이 두려워 하루 종일 TV만 틀어놓은 채 방방이 흩어져 어색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 또한 최선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세대 차, 지역 차, 지향의 차이는 있었을 것. 그 부대낌을 충돌이 아닌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계기로 승화시킬 비법을, 이번 귀경길에선 짧은 지혜로나마 열심히 모색해봐야겠다.
처음에는 ‘청년 이장’ 소리를 들었는데 벌써 외손자 볼 나이가 됐다. 내 사는 곳은 대강 광주 근처 농촌이라고만 해두자. 어쨌거나 그 10년 간 우리 동네 추석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 차가 엄청나게 늘었다. 끌고 온 차에, 원래 있던 차에,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아 집집마다 난리다. 하지만 차 늘어난 만큼 오는 사람 수까지 는 것 같지는 않다. 바쁘다, 길 막힌다, 애가 어리다, 장사해야 한다…. 핑계도 여러 가지다. 그래서 이젠 마을 주민들끼리도 둘째, 셋째 안부는 묻지 않고 ‘큰애 오나’만 서로 챙긴다.
전에는 문중이나 집안 큰일을 결정할 어른들은 대충 고향에 다 살았다. 요즘은 서울이나 광주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졌다. 자연히 이장(移葬)이며 선산 처분 등 중요한 결정은 모두 명절 때로 미뤄진다. 그러니 이날이 조용할 리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예의에 맞나 따지는 것만도 골치 아픈데, 대개는 그런 문제가 전부 돈하고 관련이 있다. 또 조부나 부친이 상처(喪妻) 후 재혼한 집안에서는 어머니 다른 자손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는 도리도 변하거니…”
하지만 역시 가장 흔한 고민거리는 두 가지. 첫째, 서울 살고 시골 사는 친지 간 갈등이요, 둘째, 늙으신 부모님을 누가 건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서울 사는 사람들이야 시골 내려가 고향 사람 이런저런 불평불만 듣다 보면 짜증도 날 것이다. 또 바쁜 세상 먹고살기도 힘든데, 벌초니 비석이니 친목계니 온갖 일들에 신경 다 쓰는 걸 보면 답답증이 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골 사는 우리도 할 말이 있다. 결국 고향 지키고 조상 산소 돌보는 건 우리 몫 아닌가. 서울 사람들이야 내려와 돈 몇 푼 보태주고 가는 것이 다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덜 낼까 잔머리 굴리는 것이 마땅찮다.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도 불쾌하다. 돈 자랑, 자식 자랑도 그렇지만, 뭐 대단히 개화됐다고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며 관습을 마다하는가.
노부모 모시는 문제는 더 심각하다. 내 사촌동생만 해도 차남인데, 시골서 농사짓는 탓으로 노모를 20년 간이나 모셨다. 이제 어른이 병이 깊어 입·퇴원을 반복하니, 병구완 비용도 문제지만 일손이 달려 죽을 지경이다. 이번 추석 때 서울서 형제들이 내려오면 무조건 같이 올려보내마 벼르고는 있지만, 그쪽이라 해서 어디 별무사정이겠는가. 이래저래 형제, 동서 간 낯 붉힐 일만 남았다.
전에는 세상 사는 도리란 하나다 싶었는데, 요즘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싶다. 나부터도 자식들에게 봉제사, 기제사 챙겨 받을 욕심은 스리슬쩍 접어버렸다. 죽은 다음은 모르겠고 사는 동안이라도 오순도순 정 나누며 포시랍고 싶다. 때마다 고향 찾는 일이 고역 아닌 즐거움이도록 그저 두루 건강하고 먹고사는 데 지장 없기를 바랄 뿐이다.
경기도 성남시에 살며 남편과 함께 작은 장갑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서방님, 그러니까 시동생이 진 카드 빚 4300만원이다. 어제저녁에는 그 때문에 남편과 대판 싸웠다. 남편은 “재작년 빌려갔던 500만원을 당신이 하도 갚으라고 난리 치니까, 걔가 무리하게 카드를 긁다 더 큰 부스럼이 나지 않았냐”며 날 막 몰아붙였다. 나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500만원이 어디 적은 돈인가. 어렵게 어렵게 모은 쌈짓돈을 빌려갔으면 약속한 3개월은 아니어도 1년 안에는 갚아야 하지 않나. 우리도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빠듯한 살림이다.
그래서 나는 추석이 두렵다. 까짓 상 차리는 건 별일이 아니다. 하루이틀 해온 것도 아니고, 시어머님 돌아가신 후로는 누구 눈치 안 보고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외려 속 편하다. 다만 대기업 직원인 손위 동서가 솔직히 좀 눈꼴시다. 추석 전날 점심때쯤 와 나름대로 열심히는 하는데, 일손이 느린 데다 요리 솜씨도 부족하다. 나이도 나보다 세 살이나 어려, 나는 시아버님 없는 자리에선 “형님, 파 씻어, 불 좀 줄여” 이렇게 반말도 좀 하고 그런다.
“돈이 웬수 … 그래도 핏줄이기에”
말이 다른 곳으로 좀 샜지만, 하여튼 나는 이번 추석이 다가오는 게 정말 걱정스럽다. 결국 다 돈이다. 벌써 작년 말부터 수금이 잘 안 돼, 명절이라고 시아버님 용돈 몇 푼 드리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시동생 문제로 한바탕 분란이 일 것이 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형님네뿐이다. 그나마 집도 있고 맞벌이도 하고, 아무래도 사정이 좋은 편이다. 하여 이번 추석 때는 그 주는 것 없이 얄미운 손위 동서가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사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우리만 해도 IMF사태 이후 계속 힘들어, 시아버님이 32평 아파트를 18평으로 줄여가며 먹고살 길을 열어주셨다. 형님네 도움도 꽤 받았다. 그런데 3년도 안 돼 또 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우리집이나 막내네나 결과적으로는 부모님과 형님네에 자꾸 손실을 끼치게 돼버렸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형님네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안 한 나다. 부모님 가까이 살며 몸 고생은 내가 다 했다는 생각에 오히려 목에 힘주며 살아왔다. 가방 끈 좀 길다고 잘난 체하는 모습도 보기 싫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나긋나긋하게 굴어서라도 시동생 문제를 형님네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밀어붙여야겠다. 그러자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매달 시아버님 생활비 30만원을 대는 것도 손위 동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러게 왜 잘난 여자가 이런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냐 말이다.
명절은 가족끼리 모여 즐기는 날이라는데, 돈 문제가 끊이질 않는 우리 시댁의 명절은 이렇게 늘 살얼음판이다. 이웃집 여자들도, 남편 친구들도, 뭐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표정은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땐 “추석이고 뭐고 다 귀찮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하지만 명절이 아니면 또 언제이렇게 머리 맞대고 앉아, 부모 형제 사는 꼴 돌아보며 투닥대고 등 비빌 것인가. 이 험한 세상, 그래도 믿을 건 핏줄뿐이다.
나이는 42살. 유학 가 박사학위 따고 교수까지 됐으니 경북 안동 인근 작은 마을인 우리 고향에선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런데도 명절마다 고향을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10시간 넘게 걸리는 운전이 힘들고 지겨워서만은 아니다. 손에 익지 않은 시골 부엌 살림에 내내 표정이 밝지 않은 아내 눈치가 보여서만도 아니다.
내 마음을 묵지근하게 누르는 건,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작금의 정치 상황이다. 남자들이라는 것이 큰집 사랑방에 모여 술잔이라도 기울일라치면 모로 가도 결국 닿는 것이 정치요 남북 문제다. 하물며 ‘골수 TK’인 우리 고향에서임에랴.
지난 설 때가 생각난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라 분위기가 영 썰렁했다. 시작은 화기애애했는데 좀 지나다 보니, 결국 두 패로 나뉘어 일대 설전을 벌이는 상황이 됐다. 물론 일방적으로 몰리는 쪽은 나를 비롯한 젊은 세대, 도시 물 좀 먹은 자손들이다. 처음에는 ‘정말 가만있어야지, 조용히 듣기만 해야지’ 하고 손가락으로 장판지에 붙인 청테이프만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얘기가 “이제 빨갱이 세상 다 됐다” “철없는 것들이 나라 다 망친다”는 부분에 이르자 나도 몰래 “그렇게만 보실 일은 아니지요” 하고 말대꾸가 나와버렸다.
술잔은 돌고 민심은 날고
다음부터야 시쳇말로 ‘안 봐도 비디오’다. 대선 전후의 이런저런 상황에 대한 집안 어르신들의 걱정과 푸념이 이어졌다. 마치 내가 ‘선거혁명’의 주역이라도 되는 듯 책망에 가까운 질문들이 쏟아졌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좀 강하게 주장을 펴다 종국에는 “많이 배운 놈들은 위아래도 없냐”는 말까지 듣게 됐다.
아내가 눈치껏 불러낸 덕분에 난감한 자리를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2년 전 끊은 담배가 유난히 당겼다. 아내는 “그러게 가만있지 왜 또 나섰냐”며 나를 타박했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기쁨과 설렘은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이런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게다. 명절 연휴 후 동료교수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비슷한 사례들을 여럿 접하게 된다. 이전에는 본인이 더 흥분해 난리를 쳤는데 이젠 다 귀찮아 “전 공부만 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말로 아예 이야기의 물꼬를 틀어버린다는 사람도 있다. 학생 녀석들도 예외는 아니다. “또 어른들이랑 싸우게 될까봐 집에 가기 싫다”고 한다. 일부러 ‘불화’를 조장하려는 듯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물은 후, 대답이 좀 비뚜름하다 싶으면 일장 훈계를 하는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부 이모부 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추석은 한총련 문제, 미군 철수 문제, 인공기 훼손 사건, 참여정부 6개월에 대한 각양각색의 평가들로 집집마다 제법 왁자할 듯하다. 호주제 폐지론은 또 하나의 ‘핵폭탄’이다. 혈족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서로 전혀 다른 환경, 이해관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아닌가. 그런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분위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는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한 울타리에 묶여 있는, 이 서글프고도 난감한 ‘공존의 그늘’.
그러나 한편으론, 충돌이 두려워 하루 종일 TV만 틀어놓은 채 방방이 흩어져 어색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 또한 최선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세대 차, 지역 차, 지향의 차이는 있었을 것. 그 부대낌을 충돌이 아닌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계기로 승화시킬 비법을, 이번 귀경길에선 짧은 지혜로나마 열심히 모색해봐야겠다.
처음에는 ‘청년 이장’ 소리를 들었는데 벌써 외손자 볼 나이가 됐다. 내 사는 곳은 대강 광주 근처 농촌이라고만 해두자. 어쨌거나 그 10년 간 우리 동네 추석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 차가 엄청나게 늘었다. 끌고 온 차에, 원래 있던 차에,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아 집집마다 난리다. 하지만 차 늘어난 만큼 오는 사람 수까지 는 것 같지는 않다. 바쁘다, 길 막힌다, 애가 어리다, 장사해야 한다…. 핑계도 여러 가지다. 그래서 이젠 마을 주민들끼리도 둘째, 셋째 안부는 묻지 않고 ‘큰애 오나’만 서로 챙긴다.
전에는 문중이나 집안 큰일을 결정할 어른들은 대충 고향에 다 살았다. 요즘은 서울이나 광주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졌다. 자연히 이장(移葬)이며 선산 처분 등 중요한 결정은 모두 명절 때로 미뤄진다. 그러니 이날이 조용할 리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예의에 맞나 따지는 것만도 골치 아픈데, 대개는 그런 문제가 전부 돈하고 관련이 있다. 또 조부나 부친이 상처(喪妻) 후 재혼한 집안에서는 어머니 다른 자손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는 도리도 변하거니…”
하지만 역시 가장 흔한 고민거리는 두 가지. 첫째, 서울 살고 시골 사는 친지 간 갈등이요, 둘째, 늙으신 부모님을 누가 건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서울 사는 사람들이야 시골 내려가 고향 사람 이런저런 불평불만 듣다 보면 짜증도 날 것이다. 또 바쁜 세상 먹고살기도 힘든데, 벌초니 비석이니 친목계니 온갖 일들에 신경 다 쓰는 걸 보면 답답증이 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골 사는 우리도 할 말이 있다. 결국 고향 지키고 조상 산소 돌보는 건 우리 몫 아닌가. 서울 사람들이야 내려와 돈 몇 푼 보태주고 가는 것이 다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덜 낼까 잔머리 굴리는 것이 마땅찮다.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도 불쾌하다. 돈 자랑, 자식 자랑도 그렇지만, 뭐 대단히 개화됐다고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며 관습을 마다하는가.
노부모 모시는 문제는 더 심각하다. 내 사촌동생만 해도 차남인데, 시골서 농사짓는 탓으로 노모를 20년 간이나 모셨다. 이제 어른이 병이 깊어 입·퇴원을 반복하니, 병구완 비용도 문제지만 일손이 달려 죽을 지경이다. 이번 추석 때 서울서 형제들이 내려오면 무조건 같이 올려보내마 벼르고는 있지만, 그쪽이라 해서 어디 별무사정이겠는가. 이래저래 형제, 동서 간 낯 붉힐 일만 남았다.
전에는 세상 사는 도리란 하나다 싶었는데, 요즘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싶다. 나부터도 자식들에게 봉제사, 기제사 챙겨 받을 욕심은 스리슬쩍 접어버렸다. 죽은 다음은 모르겠고 사는 동안이라도 오순도순 정 나누며 포시랍고 싶다. 때마다 고향 찾는 일이 고역 아닌 즐거움이도록 그저 두루 건강하고 먹고사는 데 지장 없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