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이냐, 네덜란드식이냐.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이 꺼내든 ‘네덜란드식 노사모델’을 놓고 재계와 노동계, 정치권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실장이 말하는 ‘네덜란드식 노사모델’이란 노조가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대신 사용자가 제한된 범위 내에서 (노조의 경영) 참여를 보장해 ‘윈·윈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는 노조파업에 대해 관련자 고소·고발과 노조 재산 가압류 등의 조치를 계속 취할 뜻을 비쳐 ‘미국식 노사모델’을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96년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집권한 영국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벌어졌다. 높은 실업률, 반복되는 노사갈등, 엄청난 재정적자, 신규투자 격감, 자본의 해외이탈 등 고질적인 ‘영국병’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찾는 과정에서 ‘참여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가 등장했다. 당시 국내에는 ‘제3의 길’ ‘생산적 복지’와 같은 개념을 통해 참여자본주의가 단편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서구사회에서 참여자본주의의 등장은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아메리칸 프로젝트’ 공동 편집장이며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커트너는 “자본주의는 굉장히 강력하고 역동적이지만 지난 세월 동안 체제 안에 내포된 폭력성이 너무 심화됐다. 이를 현재 사회에 포용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전후의 개혁자들만큼 대담해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20세기 말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주의 계획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입증됐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세계무대에서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21세기에 들어 자본주의는 고용 불안과 소득 불균형을 확대해 세계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앤서니 기든스와 함께 ‘기로에 선 자본주의’를 펴낸 윌 허튼(‘옵서버’ 편집장)은 “시장계약을 지나치게 중시한 자유방임경제가 경쟁에서 탈락한 계층을 무자비하게 도태시켜 양극화를 유발하고, 이것이 사회적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1996년 3월 영국 셰필드대학 정치경제연구소에서 국제적인 ‘참여자본주의’ 논쟁이 벌어졌다. ‘참여자본주의: 맹목적 주장인가, 최상의 희망인가’라는 의제를 놓고 윌 허튼, 데이비드 윌렛(보수당 하원의원) 등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노르웨이 폴란드 등 각국에서 몰려든 350여명의 정치인, 저널리스트, 대학교수,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격돌했다. 당시 발표된 논문들에 새로운 기고문들을 추가해 엮은 것이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참여민주주의’다.
이 논쟁의 포문을 연 것은 윌 허튼이다. 허튼은 ‘참여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발제문에서 영국 경제의 두 주체인 노동계(노동조합, 노동당 내 좌파 포함)와 기업(자본가, 경영인)을 동시에 비판했다. 즉 노동조합은 ‘평등’에서 ‘참여’로 화두를 바꾸고, 시장경제의 한 회원이자 파트너로서의 의무를 자각해야 한다고 했다. 또 기업가는 단기 이윤 추구, 글로벌 경제화 등 자유방임주의가 몰고 온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식 시장자본주의 대신 독일식 참여자본주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노동조합의 경영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공동결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았다. 데이비드 윌렛 같은 보수 정치인은 “대륙식 모델(독일식 자본주의)은 점차 우리(영국)의 민영화, 탈규제화, 그리고 보다 유연한 노동시장의 성취를 부러워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영미식 자본주의가 승리할 것이라 믿는다”며 허튼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섰다.
‘참여자본주의’의 개념부터 찬반양론, 경제 각 분야 및 국내외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 등을 폭넓게 다룬 이 논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여민주주의’의 역자인 포항공대 장현준 교수는 ‘stakeholding’의 기본개념을 한마디로 ‘사회적 포용’이라고 요약하고,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도 패자나 약자도 포용하며 이들을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킨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물론 좌파들의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는 있다. 그러나 ‘참여’를 내건 노무현 정부가 정작 국민들과 참여의 의미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돌아볼 때, 지금 이 논쟁에 끼어드는 것은 유의미하다.
참여자본주의/ 개빈 켈리 외 20명 지음/ 장현준 옮김/ 미래M&B 펴냄/ 416쪽/ 1만8000원
1996년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집권한 영국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벌어졌다. 높은 실업률, 반복되는 노사갈등, 엄청난 재정적자, 신규투자 격감, 자본의 해외이탈 등 고질적인 ‘영국병’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찾는 과정에서 ‘참여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가 등장했다. 당시 국내에는 ‘제3의 길’ ‘생산적 복지’와 같은 개념을 통해 참여자본주의가 단편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서구사회에서 참여자본주의의 등장은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아메리칸 프로젝트’ 공동 편집장이며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커트너는 “자본주의는 굉장히 강력하고 역동적이지만 지난 세월 동안 체제 안에 내포된 폭력성이 너무 심화됐다. 이를 현재 사회에 포용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전후의 개혁자들만큼 대담해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20세기 말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주의 계획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입증됐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세계무대에서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21세기에 들어 자본주의는 고용 불안과 소득 불균형을 확대해 세계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앤서니 기든스와 함께 ‘기로에 선 자본주의’를 펴낸 윌 허튼(‘옵서버’ 편집장)은 “시장계약을 지나치게 중시한 자유방임경제가 경쟁에서 탈락한 계층을 무자비하게 도태시켜 양극화를 유발하고, 이것이 사회적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1996년 3월 영국 셰필드대학 정치경제연구소에서 국제적인 ‘참여자본주의’ 논쟁이 벌어졌다. ‘참여자본주의: 맹목적 주장인가, 최상의 희망인가’라는 의제를 놓고 윌 허튼, 데이비드 윌렛(보수당 하원의원) 등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노르웨이 폴란드 등 각국에서 몰려든 350여명의 정치인, 저널리스트, 대학교수,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격돌했다. 당시 발표된 논문들에 새로운 기고문들을 추가해 엮은 것이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참여민주주의’다.
이 논쟁의 포문을 연 것은 윌 허튼이다. 허튼은 ‘참여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발제문에서 영국 경제의 두 주체인 노동계(노동조합, 노동당 내 좌파 포함)와 기업(자본가, 경영인)을 동시에 비판했다. 즉 노동조합은 ‘평등’에서 ‘참여’로 화두를 바꾸고, 시장경제의 한 회원이자 파트너로서의 의무를 자각해야 한다고 했다. 또 기업가는 단기 이윤 추구, 글로벌 경제화 등 자유방임주의가 몰고 온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식 시장자본주의 대신 독일식 참여자본주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노동조합의 경영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공동결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았다. 데이비드 윌렛 같은 보수 정치인은 “대륙식 모델(독일식 자본주의)은 점차 우리(영국)의 민영화, 탈규제화, 그리고 보다 유연한 노동시장의 성취를 부러워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영미식 자본주의가 승리할 것이라 믿는다”며 허튼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섰다.
‘참여자본주의’의 개념부터 찬반양론, 경제 각 분야 및 국내외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 등을 폭넓게 다룬 이 논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여민주주의’의 역자인 포항공대 장현준 교수는 ‘stakeholding’의 기본개념을 한마디로 ‘사회적 포용’이라고 요약하고,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도 패자나 약자도 포용하며 이들을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킨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물론 좌파들의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는 있다. 그러나 ‘참여’를 내건 노무현 정부가 정작 국민들과 참여의 의미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돌아볼 때, 지금 이 논쟁에 끼어드는 것은 유의미하다.
참여자본주의/ 개빈 켈리 외 20명 지음/ 장현준 옮김/ 미래M&B 펴냄/ 416쪽/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