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사상 초유의 제작비가 든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가 개봉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판 ‘쉬리’가 될 것이라거나 애니메이션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될 것이라는 등의 풍문이다. 게다가 전주영화제 때 상영될 예정이던 것이 나중에 취소되는 등 이 영화가 덜컹거리고 있다는 불길한 징후가 나타났다. 칸영화제 마켓 시사에서 선보인 필름도 기대만 못하다는 험담이 떠돌았다. 그러나 마침내 뚜껑을 연 ‘원더풀 데이즈’는 솔직히 말하면 어느 쪽도 아니다. 흥행 대작이 될 가능성은 적지만 잔뜩 폼만 재는 사이비 예술영화도 아니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애니메이션인 ‘원더풀 데이즈’는 제작진이 오래 버티며 만든 공력(功力)이 여실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스크린에 그려진 미래 지구의 이미지는 숨막힐 듯 기괴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2D와 3D, 미니어처 촬영과 실사 촬영을 디지털로 합성하는, 유례없이 번거로운 작업방식을 택한 제작진의 고집 덕분에 어떤 애니메이션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기운이 화면에 풍겨 나온다. 지구의 오염물질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에코반이라는 인공지능 도시에 사는 지배계층이, 에코반에서 쫓겨나 미르라는 외곽지역에 사는 인간들을 몰아내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이 영화는 처음부터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하려 든다.
등장인물이 탄 바이크가 웅장한 미래도시의 한복판을 질주하는 데서 시작하는 첫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3D로 묘사한 바이크와 미니어처 촬영으로 살려낸 미래의 풍광, 그리고 2D로 그린 등장인물이 교묘하게 한 화면에 담겨 있다. 입체적인 만큼 어딘가 어긋나는 듯한 이물감을 주지만 그 장면에서 배어나는 이미지의 호소력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그 다음엔 이야기가 남는다. ‘원더풀 데이즈’의 이야기는 허무맹랑하지 않고, 나름대로 경청할 만한 주제의식을 품고 있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박력이 없다. 화면 안에 물기가 고여 있는 듯한 질감을 지닌 이미지 틈새로 뿜어나와야 할 이야기의 폭발력이 정작 술에 물 탄 듯 맨송맨송한 것이다. 김문생 감독은 관객의 미의식을 주눅들게 하는 화면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에 걸맞은 이야기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등장인물들은 지나치게 과묵하고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짜임새도 없으며 액션은 상투적이다. 감독은 왜 이 굉장한 화폭에 그토록 앙상한 이야기를 구겨넣은 것일까. 왜 대작을 만드는 한국의 감독들은 잿빛 상상력이 늘 예술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원더풀 데이즈’를 보고 나오면 ‘이야기’란 단어만 되뇌게 된다.
관객이 화면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 이야기를 간소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좋은 영화는 이야기를 충분히 즐기면서도 화면을 음미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미지만으로 승부하는 영화라면 다른 방식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원더풀 데이즈’는 풍성한 살이 붙었어야 할 이야기를 발라낸 대신, 뼈대라 할 화면 구성에 잔뜩 힘을 주고 왁스를 칠해놓고 ‘중요한 것은 이쪽이니 주목해주세요’라고 주문한다. ‘미래를 바꿀 운명의 하늘이 열린다’는 이 애니메이션의 광고 카피는 그래서 아깝다. 영화가 진짜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지가 열릴 지점에서 일단 멈춘 것이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애니메이션인 ‘원더풀 데이즈’는 제작진이 오래 버티며 만든 공력(功力)이 여실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스크린에 그려진 미래 지구의 이미지는 숨막힐 듯 기괴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2D와 3D, 미니어처 촬영과 실사 촬영을 디지털로 합성하는, 유례없이 번거로운 작업방식을 택한 제작진의 고집 덕분에 어떤 애니메이션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기운이 화면에 풍겨 나온다. 지구의 오염물질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에코반이라는 인공지능 도시에 사는 지배계층이, 에코반에서 쫓겨나 미르라는 외곽지역에 사는 인간들을 몰아내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이 영화는 처음부터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하려 든다.
등장인물이 탄 바이크가 웅장한 미래도시의 한복판을 질주하는 데서 시작하는 첫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3D로 묘사한 바이크와 미니어처 촬영으로 살려낸 미래의 풍광, 그리고 2D로 그린 등장인물이 교묘하게 한 화면에 담겨 있다. 입체적인 만큼 어딘가 어긋나는 듯한 이물감을 주지만 그 장면에서 배어나는 이미지의 호소력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그 다음엔 이야기가 남는다. ‘원더풀 데이즈’의 이야기는 허무맹랑하지 않고, 나름대로 경청할 만한 주제의식을 품고 있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박력이 없다. 화면 안에 물기가 고여 있는 듯한 질감을 지닌 이미지 틈새로 뿜어나와야 할 이야기의 폭발력이 정작 술에 물 탄 듯 맨송맨송한 것이다. 김문생 감독은 관객의 미의식을 주눅들게 하는 화면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에 걸맞은 이야기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등장인물들은 지나치게 과묵하고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짜임새도 없으며 액션은 상투적이다. 감독은 왜 이 굉장한 화폭에 그토록 앙상한 이야기를 구겨넣은 것일까. 왜 대작을 만드는 한국의 감독들은 잿빛 상상력이 늘 예술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원더풀 데이즈’를 보고 나오면 ‘이야기’란 단어만 되뇌게 된다.
관객이 화면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 이야기를 간소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좋은 영화는 이야기를 충분히 즐기면서도 화면을 음미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미지만으로 승부하는 영화라면 다른 방식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원더풀 데이즈’는 풍성한 살이 붙었어야 할 이야기를 발라낸 대신, 뼈대라 할 화면 구성에 잔뜩 힘을 주고 왁스를 칠해놓고 ‘중요한 것은 이쪽이니 주목해주세요’라고 주문한다. ‘미래를 바꿀 운명의 하늘이 열린다’는 이 애니메이션의 광고 카피는 그래서 아깝다. 영화가 진짜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지가 열릴 지점에서 일단 멈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