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전체가 금연시설로 지정된 서울 중구의 한 건물 앞.회사원들이 건물 앞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흡연실을 설치하지 않으면 당장 고발하겠습니다.”
7월3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파이낸셜 빌딩 앞. 하루 수천명이 오가는 이 건물 안에 흡연구역을 두어야 한다는 담배소비자단체 회원들과 건물 관리인 사이에 입씨름이 한창이다. 빌딩측의 주장은 건물 자체를 완전금연건물로 지정했기 때문에 건물 내부에 흡연구역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는 것(지하 3층 제외). 반면 담배소비자단체측은 “흡연구역이 필요 없는 완전금연건물은 학교, 의료기관 등 법으로 정한 일부 건물밖에 없다”며 “해당 건물은 법상 금연구역과 흡연구역을 따로 지정해야 하는 공중이용시설에 해당하기 때문에 흡연구역을 두지 않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개정된 국민건강증진법(이하 증진법) 시행규칙에 따라 금연구역이 확대되고, 금연구역 내 흡연자에 대한 본격적인 단속이 실시된 7월1일 이후, 대형 건물 안팎에서는 이 같은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언뜻 보기엔 흡연자들이 담배를 못 피우게 되어 있는 완전금연건물에 흡연구역을 지정해달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법상 흡연구역을 따로 지정해야 하는 건물(공중이용시설)의 건물주나 시설주가 자신의 건물과 시설을 임의로 완전금연시설로 만들어버린 것. 하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금연구역 표시만 제대로 한다면 불법은 아니라고 해석했고, 이는 곧바로 분란의 씨앗이 됐다. 심지어 일부 언론에서조차 흡연구역을 따로 지정해야 하는 ‘공중이용시설’을 완전금연시설로 보도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
정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흡연자들이 건물주와 정부를 상대로 대반격을 개시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평소 ‘혐연권’에 대항해 ‘흡연권’(기호품인 담배를 소비하고 흡연할 수 있는 헌법상의 행복추구권)을 보호해줄 것을 주창해왔던 담배소비자단체와 흡연 포털사이트들은 “건물주들이 흡연실 설치에 따르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법상 정해진 흡연구역 지정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같은 행태를 묵인, 방조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고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흡연자 인권 침해” 국가인권위에 진정서 제출
(사)한국담배소비자보호협회(이하 협회)가 7월1일부터 애연가들을 중심으로 준법감시단을 구성해 흡연구역을 두지 않은 공중이용시설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협회는 실태조사에서 적발된 건물주와 시설주를 당국에 고발키로 하는 한편, “이들이 흡연구역 이용권을 제한함으로써 흡연자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 진정서에서 협회는 “흡연구역을 둘 의무가 있는 건물 내 흡연 근로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가하는 것도 명백한 인권침해”라며 유권해석을 의뢰했다. 흡연자 단체의 이 같은 행보는 그동안 금연공간의 확대 저지에 집중됐던 흡연권 수호운동의 방향이 ‘쾌적한 흡연공간’ 확보로 선회했음을 의미한다.
사실 지난 4월 공포돼 3개월 동안의 계도기간을 거친 증진법 시행규칙은 문구상으로만 본다면 애연가들의 분노를 살 조항이 거의 없다. 금연구역은 그리 많이 확대되지 않은 반면, 흡연구역 지정에 대한 조항은 보다 구체적이고 엄격해진 까닭. 개정된 증진법은 금연구역을 시설 전체를 금연구역으로 지정한 ‘금연시설’과 금연·흡연구역을 별도로 지정해야 하는 ‘공중이용시설’로 구분하고 있다. 법에서 정한 완전금연시설은 학교시설과 병원·보건소 등 의료기관, 보육시설뿐으로, 금연구역이 확대됐다는 것은 기존에 11종류이던 공중이용시설이 13개로 늘어난 것을 의미한다.
동대문 두산타워에 지정된 흡연구역. 첨단 공기청정 시설까지 갖추었다(위).남은 것은 이제 거리뿐. 길거리 흡연 규제에 반대하는 애연가들.
분란은 금연구역과 함께 흡연구역을 따로 지정해야 하는 공중이용시설물의 주인이나 세입자들이 자신들이 관리하는 시설물을 자체적으로 ‘완전금연구역’, 즉 법상 ‘금연시설’로 선언하고 흡연실 설치를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관공서와 대기업 본사 등 흡연자 고객들을 직접 상대하지 않는 대부분의 빌딩주들이 금연구역 표지를 건물 전체에 붙이는 방식을 통해 법상 ‘공중이용시설’을 흡연구역이 필요 없는 ‘금연시설’로 바꾸어버린 것. 이는 개정 증진법이 공포되기 직전인 2003년 3월 100대 기업 공중이용시설물 흡연시설 조사(월간 현대경영스크랩)에서 조사 대상 건물 가운데 이미 23개 건물이 건물 전체를 금연구역으로 지정, 운영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이중 8개 건물의 소유 기업체가 흡연 근로자에게 승진시 불이익을 주었고, 5개 기업체는 벌금까지 부과하고 있었다.
이런 임의적 완전금연시설의 확대 현상은 보건복지부가 “법개정 취지가 금연구역을 확대하는 것에 있는데 무슨 문제냐”는 반응을 보이면서 겉잡을 수 없이 번져간다.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과 관계자는 “법상 공중이용시설이라 해도 금연구역 표지를 건물 전체에 붙이면 완전금연시설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며 “이런 건물에서도 옥상, 옥외계단 등 실외 흡연공간이 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간 확보에 환풍기 설치 등 비용부담 만만찮아
정부의 모호한 법 해석은 담뱃값 인상과 금연구역 확대로 마음 상한 흡연자들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흡연 포털사이트 아이러브스모킹닷컴 성형주 대표는 “공중이용시설의 소유자 점유자 등에게 완전금연구역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누가 한 평에 수백만원 하는 공간을 쪼개서 흡연구역을 따로 만들고 환풍기까지 설치하겠냐”며 “결국 이는 흡연 근로자들만 건물 밖으로 내모는 인권침해 행위이자 담배 소비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파렴치한 행위”라고 반발했다. 사실 흡연구역을 따로 두기 힘든 카페나 유흥시설의 경우(45평 이상) 주인이 매장 전체를 완전금연시설로 지정해놓고 손님에게 담배를 피우게 해도, 주인은 전혀 처벌을 받지 않고 흡연자만 3만원의 과태료를 물게 되어 있다(미국은 주인을 처벌).
이와 관련 최근 한국금연운동협의회와 담배소비자협의회는 인권위의 흡연구역 설치를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법상 공중이용시설에 해당해 흡연구역을 지정해야 하는 인권위는 지난 5월 시설 전체(7층에서 13층까지)를 금연시설로 하겠다고 결정했으나 이후 내부 의견 조율을 통해 흡연실을 따로 설치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이 ‘인권위가 소수자의 흡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라고 보도하자 금연운동협의회는 “이는 인권위가 흡연권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발끈하고 나섰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인권위는 뒤늦게 “흡연실 설치는 흡연자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직원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흡연을 권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담배소비자단체와 애연가들은 여전히 인권의 최후 보루인 인권위가 공식적으로 흡연권을 인정하고, 현행 증진법의 개정 취지를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 두 단체가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인권위의 흡연실 설치를 해석하고 있는 상황.
“일단은 흡연실 확보에 치중할 계획이지만 거리흡연 제한 입법안이 통과된다면 실력행사에 들어갈 것입니다.”
애연가들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담배가 몸에 나쁘다면 왜 국가가 그런 상품의 판매를 법으로 보장하느냐”는 질문에 이제 정부가 솔직하게 대답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