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무당이 기나긴 사설을 읊조리며 굿에 몰입해 있다. 통도사에 소장돼 있는 감로탱 부분화 ‘무당의 굿’.
1970∼80년대 농촌에서는 소가 가장 큰 재산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는 일꾼 중 일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귀한 소를 팔아야 클라리넷을 살 수 있으니…. 결국 1년여 동안 부모님 눈치만 살피다가 말 한마디 못해보고 음대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 후로 나는 ‘인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지고 헤맸다. 어둡고도 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나를 위로해준 것은 밥 딜런과 존 바에즈의 노래였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를 즐겼으면서도 나는 누가 노래를 불러보라고 멍석을 깔아주면 금세 주눅이 들고 마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무엇보다 노랫말을 기억하는 노래가 몇 곡 안 되기 때문이다. 공간지각력이나 창의력은 좋지만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도 나에게는 사람들 이름을 기억하는 게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지칭할 때,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그의 이력이나 그를 대표하는 사건 혹은 이미지를 대신 말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친구 중에 노래 전주만 시작되면 노랫말이 절로 흘러나오는 녀석이 한 명 있다. 노래책 몇 권 분량이 머릿속에 입력돼 있어서 밤새 불러도 레퍼토리가 끝이 없는 친구다. “어떻게 저 많은 노랫말을 다 기억할까?” 내게는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신화를 공부하면서, 굿노래가 어떻게 몇 천년을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을까 궁금해했던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어떻게 그 ‘길고도 긴’ 신화의 노랫말이 수천년 동안 사람의 머릿속에 기억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을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신의 노래 5만 줄 35만 자
현재 우리 신화는 무당이 굿할 때 부르는 노래, 즉 굿노래로 남아 있다. 물론 문자로 기록된 건국신화도 있지만, 건국신화는 우리 신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 신화의 본령은 굿노래에 있다. 여기서는 수천년을 무당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굿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학자들은 굿노래를 보통 무가(巫歌)라 부른다. 하지만 무당들은 ‘신의 노래’, 즉 신가(神歌)라고 한다. 오늘날 채록된 무당의 노래 몇 가지를 보자. 현용준이나 진성기 선생이 채록한 제주도 굿노래는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진성기 선생의 ‘제주도 무가본 풀이사전’은 해설을 포함해 827쪽에 달하며, 해설을 빼도 714쪽이나 된다. 진성기 선생이 ‘후기’에서 30년 동안 채록하고 풀어서 해설을 썼다고 했는데, 젊은 시절 30년은 한 사람의 ‘평생’이나 다를 바 없이 중요한 시기다. 대충 계산해도 72줄×714쪽=5만1408줄의 노래며, 노래 자수를 계산해보면 약 7자×50000줄=35만 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절반 가까이 되는 신당본 풀이를 빼더라도 절반 이상을 암기해야 큰무당이 되어 노래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요즘 대중가요 한 곡을 약 8줄로 계산해서 큰무당이 불렀던 굿노래의 양을 따져보면 대중가요 약 6300곡에 해당하는 것이다.
동해안 무당의 노래도 대단하다. 울산 동구 일산동의 별신굿을 채록한 박경신의 총 5권으로 되어 있는 ‘동해안별신굿무가’의 내용을 모두 합치면 3000페이지가 넘는다.
무당이 춤을 출 때 왼손에 들고 흔들던 청동방울로 국보 146호인 청룡팔주령(왼쪽). 옛 시대에는 논밭의 파종이 끝나면 남녀가 현장에서 풍요를 빌며 성행위를 했는데, 이것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일종의 제의적 주술이었다.
어떻게 무당들은 이 노래들과 굿의 절차를 다 익히고, 관중들과 호흡하며 신을 놀렸을까? 몇 줄의 노래가 아니라 5만 줄의 노래인 것이다. 천자문, 만자문이 아니라 십만자문이다! 어떻게 수십만 자의 노래를 다 외웠을까? 궁금하지 아니한가.
‘기억’을 넘어선 노래 전승
필자는 그 궁금증을 최근에야 풀었다.
“뇌혈관 이상으로 말을 잃어버린 환자가 자신이 젊었을 때 유행하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한 노파가 노래를 따라 부른다.” 어느 음악치료 보고서에 게재된 사례다.
이것은 음악에 대한 지각이 생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드는 안정감, 슬픔, 기쁨, 흥분 따위의 다양한 감정은 단순한 기억을 넘어 강한 정서적 경험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대뇌변연계, 즉 림빅 시스템(limbic system)의 역할 덕분이라고 한다.
림빅 시스템은 식욕과 성욕 같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일시적으로 왈칵 치솟는 본능적 감정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이다. 그래서 림빅 시스템을 인간의 기억과 창조 행위를 맡고 있는 대뇌피질의 신피질계와 구분해 ‘본능의 자리’라고도 한다.
그 본능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포유류로부터 림빅 시스템을 물려받았고, 림빅 시스템의 실제 크기는 포유류가 진화하는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예컨대 포유류의 하나인 혹등고래는 노래를 부른다. 미국국립과학아카데미 페트리시아 그레이 박사는 혹등고래가 내는 소리의 음악적 성격을 연구해왔다. 혹등고래 수컷이 부르는 노래는 보통 10∼15분짜리의 곡으로 구성되는데, 혹등고래 수컷은 이런 곡을 몇 시간 동안 계속 부른다. 혹등고래 수컷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같은 음조의 소리를 사용해 리듬이 있는 노래를 부른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혹등고래에게 작곡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혹등고래가 후렴구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변주로 ‘긴’ 노래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는 혹등고래 세계에도 비틀즈와 같은 보컬리스트가 있으며 이들이 도입한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는 히트곡이 되어 그들 사이에서 빠르게 전파된다는 내용을 소개해 흥미를 끈 적이 있다.
서울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조선시대의 무속 12걸이(거리)도.
혹등고래가 가지고 있는 림빅 시스템과 인간의 림빅 시스템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래의 기본적인 테마를 변주할 수 있는 혹등고래의 음악은 인간이 발전시킨 음악의 원초적 형태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외부의 리듬적 청각 자극이 오른쪽 뇌와 림빅 시스템을 연결할 경우 대단히 강력한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뇌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이 다른 것은 기억하지 못해도 예전에 좋아했던 노래 리듬과 가락을 다시 들으면 생리적으로 그 노랫말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뇌의 림빅 시스템 속에 아마 ‘소리 이미지의 그물’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아, 그래서 우리 무당들이 수십만 자의 노래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장구와 쇠와 바라와 징의 리듬에 따라 부를 수 있구나! 알타이족의 샤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언가 내 마음의 밑바닥을 울리는 시나위 장단의 떨림이 느껴진다. 무(巫)의 노래와 음악은 일반 노래들에 비해 신명의 요소가 더 강하다. 무당의 노래 부르는 행위는 단순한 기억의 재생이 아니라 내재된 본능에 호소하는 강력한 정서적 체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무당들의 타고난 기억력과 평생 같은 노래를 반복해 부르는 것으로 인한 반복 효과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명을 통한 무당과 민중들의 강렬한 정서적 체험이 수천년 동안 ‘노래하는 신화’를 이어져오게 한 힘이었다는 것이 보다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우리 신화는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기록된 신화도 아니고, 당대의 작가가 문학적·예술적으로 재창작해 그 사회의 통합에 기여했던 신화도 아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잃어버린 신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고 주목받지 않아도 끈끈하게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힘은 무(巫)의 노래가 항상 삶의 현장에서 민중의 삶을 위로하는 민중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신화는 민중의 삶의 현장과 동심원을 이루는 굿판의 현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민족의 노래 민중의 신화
그래서 우리의 노래굿은 신과 단골(관중), 그리고 무당의 ‘삶의 변화’를 끊임없이 포용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역사와 민중을 받아들이는 열린 구조로 그 틀을 다져왔던 것이다. 무당과 단골이 함께 재창조하는 과정으로서의 노래와 굿의 현장, 그곳은 항상 생동하고, 변화하고, 창조하는 살아 있는 삶의 공간이었다.
왜 ‘노래하는 신화’인가? 모든 신화는 무당의 노래로 전해져 내려왔다. 원시시대의 시인이자 사제이자 철학자이자 씨족장이었던 무당은 ‘노래 부르는 광대’였던 것이다. 노래는 문자가 없던 시대의 문자요, 미디어가 없던 시대의 미디어였다. 심지어 문자가 행세했던 시대에도 민중을 움직이는 미디어는 문자가 아니라 노래였다. 세상의 한편에는 지배자들의 문자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피지배자들의 노래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문자가 아닌 노래로 그 ‘긴’ 역사를 살아,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를 관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져온 우리 굿과 신화는 역사에 포섭되지 않은 역사요, 기록되지 않은 기록이다. 문자가 지배계층의 미디어였다면, 노래는 민중의 미디어였다.
신명은 무당이 부르는 노래를 타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