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입국한 뒤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경찰서 유치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탈북자 김명기씨(가명).
4월7일 탈북자 윤모씨(42·무직)의 집에서 남녀 3명이 피살된 채 발견된 이후 탈북자들은 이로 인해 남한사회에서 자신들의 이미지가 더욱 추락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탈북자가 연루된 사건 가운데 이례적으로 잔인한 사건이어서 그 파장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체제와 이념이 다른 남한사회에 와 새 삶을 시작했지만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 남한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등으로 벼랑끝에 내몰려왔던 게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터진 이번 사건은 행복을 꿈꾸던 한 탈북자가 차가운 현실 앞에 백기를 든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4월7일 오후 5시께 서울 송파구 거여동 탈북자 윤씨의 아파트에서 박모씨(41·여)와 박씨의 언니(45), 김모씨(32·회사원) 3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의 사체에는 예리한 흉기에 찔린 자국이 선명했고 시신의 부패 상태로 미뤄 숨진 지 1주일 정도 지난 것으로 추정됐다.
현장에서 “박씨와 김씨의 관계를 더 이상 못 보겠다. 박씨 때문에 망쳤다”라는 윤씨의 메모를 발견한 경찰은 윤씨가 나흘 전 태국으로 출국한 점 등으로 미뤄 윤씨가 치정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뒤 도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현재 윤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인터폴에 윤씨의 체포를 요청해놓은 상태다. 경찰 조사 결과 윤씨는 지난 1월 경찰관을 사칭해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박씨에게 접근, 사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씨는 박씨에게 감금과 폭행을 일삼았고 이를 참다 못한 박씨가 2일 윤씨 집에서 짐을 챙겨 나온 게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이 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결국 박씨는 이날 오후 다시 윤씨의 연락을 받고 언니 등과 함께 윤씨 집에 갔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녀 3명 피살 용의자 윤모씨 대표적 부적응 사례
윤씨가 왜 이번 사건을 저질렀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남한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떠돌았던 것은 분명하다.
한 탈북자에 따르면 윤씨는 북한에서 미생물연구소 소장의 운전기사로 일하며 정치보위부 직원의 딸과 결혼해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북한에서 권력자의 운전기사는 위상이 안정적인 데다 정치보위부 직원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윤씨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윤씨는 바로 이런 지위를 이용, 불법으로 ‘거간(장사)’을 하다 들켜 아내와 자식을 남겨둔 채 1996년 7월 탈북, 홍콩을 통해 한 달 뒤 국내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생활 초기에 그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당국이 주선해준 정부 산하기관에서 일하는 등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1년도 안 돼 직장을 그만둔 그는 의류판매 사업 등을 하다 실패하고 급기야 여권 브로커가 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의 노숙자 등에게 여비를 제공해 중국으로 데리고 나갔다가 노숙자의 여권을 훔쳐 조선족 등에게 많게는 1000만원까지 받고 파는 일을 하는 이들이 바로 여권 브로커. 그 과정에서 윤씨는 탈북자의 밀입국을 방조한 혐의로 중국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윤씨를 관리했던 서울 송파경찰서 형사에 따르면 윤씨는 이후 남한사회에 평범한 일원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복잡한 여자관계 등 무절제한 생활을 계속해왔다.
윤씨가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물론 이 같은 개인적인 탓도 있지만 남과 북의 사회·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더 큰 원인이라는 게 윤씨를 잘 아는 탈북자들의 얘기다. 탈북자 김모씨는 “윤씨가 남한사회에서도 북한에서의 지위에 상당하는 안정된 직업을 갖길 원했다”며 “그러나 남한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윤씨는 답답한 직장생활을 버티지 못했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장이 되고자 했지만 그 역시 실패만 거듭해 결국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즉 꿈이 좌절된 데다 남한사람들에 대한 정서적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극단적 파행에 이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탈북자 사회에서 이번 사건처럼 극단으로 치달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힘없는 소수’로 주변부를 맴돌며 언제든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불안한 삶을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다.
99년 입국한 김명기씨(23·가명·막노동)도 그런 경우다. 단단한 체격의 김씨는 4년 동안 경찰서 유치장을 다섯 번이나 드나드는 등 그야말로 ‘방황’ 그 자체인 삶을 보냈다.
탈북자의 남한 정착을 지원하는 교육장인 하나원을 나온 직후 김씨는 탈북자들이 드문 부산으로 내려갔다. 탈북자의 65.7%가 머물고 있는 수도권보다는 부산이 오히려 남한사회에 동화되기 쉬울 것이란 막연한 판단에서였다. 대학에 진학할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밑바닥 삶부터 차근차근 배워 하루빨리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싶었다.
첫 직장은 에어컨 커버 제조회사였다. 그러나 그는 두 달 만에 자신을 무시하는 상사에게 대들고 이 회사를 떠났다. 이후 4년간 그는 생수 외판원, 주점 웨이터, 나이트클럽 ‘삐끼’, 주유소 판매원 등 30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화적 차이 등으로 사회생활에서도 겉돌자 그는 술과 여자에 빠져 정착자금 대부분을 날려버리고 폭주족들과 어울리는 등 방탕한 생활에 젖었다. 그는 “당시 길을 가다가도 누가 쳐다보면 쫓아가서 따지고 싸웠다”며 “해보지 않은 나쁜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방황했다”고 말했다.
탈북한 뒤 중국 대륙을 거쳐 베트남까지 도망간 탈북자들.
98년 탈북해 중국에서 3년간 떠돌다 2001년 입국한 박명수씨(34·가명)도 주변부 인생이기는 마찬가지다.
“저는 남한의 34살 동갑내기들과 비교할 때 차이가 많이 납니다. 이곳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직장을 잡고 결혼도 하고 한창 잘 지낼 나이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모든 것을 무(無)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는 요즘 초등학생들이 공부하는 워드프로세스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마음은 어른인데 여건은 전혀 따라주지 못한다.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 나아지겠지 했는데 현실적으로 영어가 처져 학과를 따라가기가 힘든 상황이다. 이런 어려움 탓에 그는 입국 초기에 가졌던 희망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도 크지만 그보다는 마음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2002년 12월31일 현재 남한사회에 살고 있는 탈북자는 모두 2886명. 특히 최근 3년간 입국한 이들이 2036명에 이를 만큼 크게 늘어나면서 남한사회에서 이들의 적응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후원회가 2001년 탈북자들의 사회적응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대다수가 극심한 경제적·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취업 불안이 심각해 조사대상 탈북자 553명 중 52.1%가 미취업 상태였다. 탈북자들의 적응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도 취업문제를 가장 절실한 문제로 꼽는다. 김성민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은 “최근 민간단체 등에서 취업을 주선하고 직업학교를 졸업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지만 탈북자들이 남한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대부분 3D업종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게 문제”라며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배운 기술이 아무 쓸모가 없어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보수 수준도 98만원에 불과해 일반 근로자 평균임금인 171만원(2001년)의 57% 수준에 그치고 있다. 주거형태의 경우 응답자의 78.4%가 영구임대주택에 살고 있으며 전세와 월세 11.2%, 자가 소유 6.5% 등으로 나타났다.
직장생활을 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으로 이들은 남한사람들의 편견과 차별(22.4%)을 꼽았으며 다음으로 과중한 업무(11.4%), 낮은 임금(10.1%), 언어문제(9.1%), 지식과 기술 부족(8.5%), 대인관계(7.4%), 문화 차이(4.6%), 건강문제(3.6%), 불투명한 미래(2.0%),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3.5%) 등의 순이었다.
통일 뒤 예상되는 가장 큰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28.3%)를 꼽았고 경제적 수준의 차이(25%)도 극복하기 힘든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남한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얘기 같지만 사고방식과 문화, 언어 등의 차이에서 오는 탈북자들의 불안감은 상상을 넘어선다. 지난해 말 입국한 김소연씨(24)는 남한사회에서 더 악착같이 살아가려고 다짐하고 있지만 남한사람들과 근본부터 다른 생각의 차이 때문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김씨는 “하루 하루가 상처받는 나날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사고방식의 차이는 탈북자들의 고유한 심리적 특성에서 연유하는 면도 있다. 탈북자들의 사회정착 과정을 연구해온 전우택 연세대 의대 교수(정신과)는 탈북자들에게 △개인적인 일에도 공적인 가치와 명분을 앞세우는 태도 △극단적인 흑백논리 △법보다는 힘을 가진 사람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사고 △사회주의 체제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 일상생활에서 수동적이고 정부 의존적인 면 등이 있다고 밝혔다.
전교수는 탈북자들이 남한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또 남북한의 이질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한사람들의 이런 특수성을 인정하고, 남북한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지만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오면서 다른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5년간 탈북자들의 일탈현상도 크게 늘어나 절도·폭력 62건, 교통법규 위반 59건, 행정법규 위반 31건(대한변호사협회 통계) 등 모두 152건의 법규 위반 사범이 적발됐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법률정보에 어두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사기 등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커져가는 탈북자들의 사회 부적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통일연구원 이우영 선임연구위원은 “국가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탈북자들을 진정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려면 우선 우리 사회가 포용력을 길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는 탈북자를 제3국 노동자보다 더 나쁘게 보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에서 파출부를 해도 탈북자가 가장 적게 받는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경우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 자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탈북자를 양자는 삼을 수 있어도 사위는 삼을 수 없다고도 합니다. 탈북자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의식 전환이 시급한 때입니다.”
탈북자와 남쪽 사람들 간의 ‘마음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의식 전환과 함께 적절한 정책 전환도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한 해만 1141명이 입국하는 등 북한의 식량난 및 경제난 가중으로 인한 탈북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탈북자 정책은 3년 전 연간 탈북자를 500명 이내로 추정하고 입안한 것이어서 현실에 맞는 정책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더욱이 탈북자의 대거 입국으로 국비 부담이 커지면서 현재의 지원정책이 과연 탈북자들의 성공적인 정착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지, 국가와 사회가 나눠 가져야 할 몫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공론화할 시점에 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