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후끈해진다. 일본의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62)의 사진전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가 열리고 있는 일민미술관 안은 은밀한 욕망이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공간 같다. 사방 벽마다 빼곡하게 붙어 있는 사진, 사진, 사진들. 무려 1500여장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그 양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다.
놀라운 것은 사진의 숫자뿐만이 아니다. 그의 사진 속에는 로프에 묶여 있거나 쇠사슬을 목에 단 나체의 여자, 강간당한 듯한 포즈로 누워 있는 여자, 영락없이 여성 성기를 연상케 하는 음식과 꽃들이 들어 있다. 놀랍고 역겹고 무서운, 한마디로 가히 충격적인 사진들이다. 왜 아라키에 대한 평가가 ‘변태 외설 사진가’와 ‘천재 예술가’의 양 극단을 오가는지 알 만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진작가인 아라키의 전시가 지금껏 이뤄지지 않은 이유도 그의 사진이 담고 있는 선정성 때문이다. 사실 아라키는 한국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작가다.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라는 사진집 촬영을 위해 1986년 한국을 처음 찾은 이래 그는 일곱 번이나 한국을 방문해 서울과 부산의 뒷골목, 거리 풍경, 이태원 게이 바 등을 앵글에 담았다. 지난해 도쿄와 후쿠오카에서 열려 7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전시회 제목도 ‘서울 이야기’였다. 이번 전시의 일본측 큐레이터인 기타자와 히로미의 설명에 따르면 아라키가 한국처럼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촬영해온 나라는 일본 외에는 없다고 한다.
11월15일부터 2003년 2월23일까지 열리는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에는 ‘서울 이야기’에 출품된 서울의 사진들과 아라키의 대표적 작품들이 망라되었다. 일민미술관의 김희령 기획실장은 “지금껏 한국의 몇몇 갤러리들이 아라키 작품전을 기획했으나 외설 시비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 전시가 이뤄진 데 대해 아라키측도 놀라워하고 있다”며 에로티시즘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작품 속에 숨은 예술성에 주목해주기를 당부했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적 작가라 해도 우선 그 적나라한 선정성에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진 중에는 나체의 여자들을 로프로 묶은 후 찍은 작품이 유난히 많다. 이른바 ‘긴바쿠’라고 불리는 아라키 특유의 스타일이다. 꽃과 음식을 대상으로 한 사진에서조차 에로티시즘은 선명하게 나타난다. 낙지 계란 명란젓 등의 한 부분을 확대해서 촬영한 사진의 피사체들은 음식인지, 여성 성기인지 언뜻 보아서는 구별하기 어렵다. 식욕과 성욕은 결국 똑같은 욕망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일민미술관측은 아예 이번 전시의 한 부분을 ‘미성년자 관람금지구역’으로 지정했다. 붉은색 벽으로 되어 있는 전시장에는 미성년자들의 출입이 제한된다. 여성의 성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거나 난폭한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포즈의 사진들이 여기 걸려 있다. 이중에는 서울의 윤락가에서 촬영한 사진도 있다고 한다. 일부 사진에는 성기 부분에 색칠이 되어 있는데 흑백 사진 위에 덕지덕지 바른 원색 물감이 피처럼 섬뜩하다. 검열을 의식해서 아라키 자신이 직접 칠한 것이다. 아라키는 외설 시비로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 이토록 여성의 이미지, 그것도 성적인 이미지에 집착하는가. 아라키는 한 인터뷰에서 “여자를 찍지 않는 사진가는 사진가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라키는 태평양전쟁의 와중인 1940년에 도쿄 미노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서울의 종로처럼 사라져가는 일본의 전통과 함께 홍등가가 밀집해 있는 지역이었다. 집 근처에는 갈 데 없는 창녀들이 죽어 묻힌 절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삶과 죽음에 대한 느낌을 결정했으며 ‘사라지는 것들’을 찍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라키의 작품들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단순히 그의 사진이 담고 있는 외설적 피사체들 때문만은 아니다. 아라키의 사진은 피사체를 은밀히 훔쳐보듯 바라본다. 핍쇼(peep show)의 시선 그대로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는 방의 한구석에 갇힌 듯 몰려 있다. 진한 화장을 한 채 욕조 속에 잠겨 있는 나체의 여자는 살아 있는 것일까. 무감각하고 무감동한 여자의 얼굴에서 이미 생명력은 사라지고 없다. 짙은 장막과도 같은 욕망 위로 아득한 죽음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아라키는 아내인 요코가 1990년 암으로 사망한 뒤부터 죽음에 깊이 천착한다. 더욱 노골적이고 난폭해진 긴바쿠 시리즈나 공허한 도시 풍경에서도 죽음의 이미지가 깊게 드리워진다. 아예 죽음 자체를 찍은 사진으로 죽음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자신의 신혼여행을 담은 사진집 ‘센티멘털한 여행’에서 아내와의 성행위를 사진에 담았던 그는 아내가 죽자 그 시체 사진마저 찍어 발표한다. 이번 전시에는 관에 들어 있는 요코의 시체와 함께 요코가 죽기 전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아라키와 손을 맞잡고 있는 사진도 포함돼 있다.
삶의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사진에 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아내를 몹시 사랑했고 “요코를 통해 내 사진 인생은 거듭났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진은 아라키에게 가장 소중한 대상만큼이나 절실한 그 무엇이란 말인가.
한 해에 10권의 사진집을 내고, 10회가 넘는 전시를 할 만큼 맹렬하게 사진을 찍어대는 작가 아라키. 카메라는 그에게 손이나 눈과 같은 감각의 한 부분이다. 그는 카메라라는 작은 밀실 속에서 왕이나 신처럼 군림하고 있다. 서울 전시를 통해 우리는 그 기묘한 군림의 한 실체를 ‘엿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쾌락적인 엿보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문의 : 02-2020-2055)
놀라운 것은 사진의 숫자뿐만이 아니다. 그의 사진 속에는 로프에 묶여 있거나 쇠사슬을 목에 단 나체의 여자, 강간당한 듯한 포즈로 누워 있는 여자, 영락없이 여성 성기를 연상케 하는 음식과 꽃들이 들어 있다. 놀랍고 역겹고 무서운, 한마디로 가히 충격적인 사진들이다. 왜 아라키에 대한 평가가 ‘변태 외설 사진가’와 ‘천재 예술가’의 양 극단을 오가는지 알 만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진작가인 아라키의 전시가 지금껏 이뤄지지 않은 이유도 그의 사진이 담고 있는 선정성 때문이다. 사실 아라키는 한국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작가다.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라는 사진집 촬영을 위해 1986년 한국을 처음 찾은 이래 그는 일곱 번이나 한국을 방문해 서울과 부산의 뒷골목, 거리 풍경, 이태원 게이 바 등을 앵글에 담았다. 지난해 도쿄와 후쿠오카에서 열려 7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전시회 제목도 ‘서울 이야기’였다. 이번 전시의 일본측 큐레이터인 기타자와 히로미의 설명에 따르면 아라키가 한국처럼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촬영해온 나라는 일본 외에는 없다고 한다.
11월15일부터 2003년 2월23일까지 열리는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에는 ‘서울 이야기’에 출품된 서울의 사진들과 아라키의 대표적 작품들이 망라되었다. 일민미술관의 김희령 기획실장은 “지금껏 한국의 몇몇 갤러리들이 아라키 작품전을 기획했으나 외설 시비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 전시가 이뤄진 데 대해 아라키측도 놀라워하고 있다”며 에로티시즘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작품 속에 숨은 예술성에 주목해주기를 당부했다.
여자 모델을 찍은 아라키의 사진들. 짙은 관능 속에 죽음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카메라의 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항상 죽음을 느낀다.”
일민미술관측은 아예 이번 전시의 한 부분을 ‘미성년자 관람금지구역’으로 지정했다. 붉은색 벽으로 되어 있는 전시장에는 미성년자들의 출입이 제한된다. 여성의 성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거나 난폭한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포즈의 사진들이 여기 걸려 있다. 이중에는 서울의 윤락가에서 촬영한 사진도 있다고 한다. 일부 사진에는 성기 부분에 색칠이 되어 있는데 흑백 사진 위에 덕지덕지 바른 원색 물감이 피처럼 섬뜩하다. 검열을 의식해서 아라키 자신이 직접 칠한 것이다. 아라키는 외설 시비로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 이토록 여성의 이미지, 그것도 성적인 이미지에 집착하는가. 아라키는 한 인터뷰에서 “여자를 찍지 않는 사진가는 사진가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라키는 태평양전쟁의 와중인 1940년에 도쿄 미노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서울의 종로처럼 사라져가는 일본의 전통과 함께 홍등가가 밀집해 있는 지역이었다. 집 근처에는 갈 데 없는 창녀들이 죽어 묻힌 절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삶과 죽음에 대한 느낌을 결정했으며 ‘사라지는 것들’을 찍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라키의 작품들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단순히 그의 사진이 담고 있는 외설적 피사체들 때문만은 아니다. 아라키의 사진은 피사체를 은밀히 훔쳐보듯 바라본다. 핍쇼(peep show)의 시선 그대로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는 방의 한구석에 갇힌 듯 몰려 있다. 진한 화장을 한 채 욕조 속에 잠겨 있는 나체의 여자는 살아 있는 것일까. 무감각하고 무감동한 여자의 얼굴에서 이미 생명력은 사라지고 없다. 짙은 장막과도 같은 욕망 위로 아득한 죽음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아라키는 아내인 요코가 1990년 암으로 사망한 뒤부터 죽음에 깊이 천착한다. 더욱 노골적이고 난폭해진 긴바쿠 시리즈나 공허한 도시 풍경에서도 죽음의 이미지가 깊게 드리워진다. 아예 죽음 자체를 찍은 사진으로 죽음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자신의 신혼여행을 담은 사진집 ‘센티멘털한 여행’에서 아내와의 성행위를 사진에 담았던 그는 아내가 죽자 그 시체 사진마저 찍어 발표한다. 이번 전시에는 관에 들어 있는 요코의 시체와 함께 요코가 죽기 전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아라키와 손을 맞잡고 있는 사진도 포함돼 있다.
삶의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사진에 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아내를 몹시 사랑했고 “요코를 통해 내 사진 인생은 거듭났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진은 아라키에게 가장 소중한 대상만큼이나 절실한 그 무엇이란 말인가.
한 해에 10권의 사진집을 내고, 10회가 넘는 전시를 할 만큼 맹렬하게 사진을 찍어대는 작가 아라키. 카메라는 그에게 손이나 눈과 같은 감각의 한 부분이다. 그는 카메라라는 작은 밀실 속에서 왕이나 신처럼 군림하고 있다. 서울 전시를 통해 우리는 그 기묘한 군림의 한 실체를 ‘엿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쾌락적인 엿보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문의 : 02-2020-2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