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긴자 거리. 일본 경제는 10년 이상 계속되는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11월4일 열린 일본 중의원 심의회에 출석해 ‘구조개혁특구’ 법안을 제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의 불황은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개혁은 말뿐이다. 오죽하면 외국 언론에 ‘규제 대국’이란 별칭으로 불릴까. 기득권의 틀을 유지하려는 수구세력, ‘떡고물’을 즐겨온 탓에 좀처럼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일부 행정관료, 구시대의 패러다임에 젖어 어물쩍 넘어가려는 국회의원, 이들이 총체적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이 좋기는 하지만 나만은 예외로 남기를 바라는 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게 없다.
결국 고이즈미 내각은 ‘구조개혁특구’라는 새로운 카드를 내걸었다. 전국적으로 규제를 풀려고 하면 저항세력의 반발도 그만큼 클 것이니 일단 일부 지역에 한해 부분적으로 규제를 푸는 방법으로 ‘측면 돌파’하려는 것이다. 그 성과를 들어 국민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규제개혁을 완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저항세력 무마 위한 점진적 개혁
이런 점진적 계획에는 물론 다른 배경도 있다. 일본 경제 규모가 큰 까닭에 일시에 규제를 풀면 개혁의 이점 못지않게 부작용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일부 지역에서부터 규제를 완화시키며 위험도를 낮춰보려는 것이다. 준비가 완료되기도 전에 일단 일부터 저질러놓고 후에 문제가 생기면 ‘뒤로 돌아가’ 하는 한국적 일처리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일본 특유의 조심스러움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11월5일 구조개혁특구 법률안은 일단 내각을 통과했으며 당일 국회에 상정됐다. 법률이 국회 심의를 거쳐 확정되면 내년 4월 시행에 들어간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신청을 받아 3개월 내에 통보를 해주도록 되어 있으니 빠르면 7월에는 ‘일본 속의 또 다른 일본’이 탄생한다. 한 나라에 두 개의 법률이 적용되는 ‘1국2제도’가 실현될 가능성도 있다. 중국이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반환받은 뒤 홍콩에 독자적인 행정권을 부여한 것처럼 이 특구 안에서는 일본 국내 관련 법이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구조개혁특구 법안은 지난해부터 차근차근 준비되어 왔다. 2001년 6월 총리 직속으로 구조개혁추진본부를 만든 고이즈미 내각은 ‘경제재정 운영과 구조개혁에 관한 기본방침’을 결정하면서 구조개혁특구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구조개혁추진본부의 본부장을 총리가, 위원을 각부 장관이 맡은 것은 행정적인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지만 범정부적 개혁의지를 과시하면서 관료집단의 저항의지를 국민의 힘을 빌려 꺾어보려는 뜻도 담겨 있다.
이후 일본 정부는 6월부터 10월 중순까지 4개월 동안 각 지방단체와 민간기업으로부터 규제개혁에 관한 의견을 받았다. 모두 1045개 항목의 의견이 접수됐다. 정부는 이들 의견에 대해 각 부처의 의견을 참고한 끝에 최종적으로 14개 법률의 일부 규제조항을 특정 지역에 한해 풀기로 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경제 개혁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 법안들을 완화하기 위해 ‘구조개혁특구’라는 새로운 카드를 뽑아들었다.
△ 주식회사의 농업 분야 진출을 허용한다.(농지법)
△ 노인복지 시설의 설립은 공공기관이 하되 운영은 민간이 하는 ‘공설민영(公設民營)’ 방식을 허용한다.(노인복지법)
△ 항만시설을 민간이 장기 임대해 사용할 수 있다.(항만법)
△ 시정촌(市町村·우리나라의 시읍면과 비슷한 하부 행정조직)이 급여를 부담할 경우 독자적인 기준에 의해 교직원을 채용할 수 있다.(시정촌립학교직원급여부담법)
△ 외국인 연구자의 체류기간을 2년 연장해 총 5년으로 하고 연구활동과 함께 경영활동도 가능하게 한다.(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
△ 시 중심지역에서 대규모 소매점포를 신설하거나 변경하는 수속을 간소하게 한다.(대규모소매점포입지법)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각 지역별로 검토되고 있는 특구 내용은 이보다 더 재미있다. 이시가와 현은 카지노특구, 오키나와 현은 자유무역특구, 야마나시 현은 와인산업진흥특구, 후쿠시마 현의 한 도시는 일본 전통주제조특구를 각각 제안했다. 또 아이치 현은 국제자동차특구, 쓰시마 섬은 초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국제교류특구, 일본 북부지대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일부 남아 있는 홋카이도의 한 도시는 아이누문화특구를 구상중이다.
각 부처 동의안 받기가 마지막 관문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이 공개된 뒤 일본 언론의 상당수는 관료의 저항 등으로 개혁 내용이 부실해지고 알맹이가 빠졌다고 평했다. 애당초 1045개 항목에 관해 정부 각 부처의 의견을 들었지만 이중에서 가능하다는 답을 들은 항목은 79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불가 판정’을 받았다. 대폭적인 규제개혁을 원하는 일본 국민들의 시각과는 크나큰 거리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후생성(우리나라의 노동부와 보건복지부 기능을 합한 부처)에는 총 146개 항목의 건의가 있었는데 특히 의료 분야에 주식회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병원 진출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주식회사가 경영하는 병원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후생성과 일본의사회 등은 ‘주식회사는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언제든 문을 닫아버릴 것’이라는 이유로 주식회사의 병원 참여를 줄곧 반대해왔다.
그러나 일본의 일부 언론매체는 이를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현재 의료계 상황을 보면 이미 황금만능주의가 침투할 만큼 침투했다는 것이다. 의약품 과잉처방, 빈번한 의료과실, 치료비 부당과잉청구 등 불상사가 이어지고 있다. 진료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수입도 시원치 않다며 소아과를 없애버리는 병원도 많다. 의료 부문에 기업이 진출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바로 이런 의료계의 잘못된 현실로 인해 나오게 됐다는 것. 사실 ‘주식회사=악’이란 등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자금조달이 손쉽게 된다거나 고가의 의료기기를 도입하기 쉬워지는 점, 주주와 이사회 등의 경영 관여로 정보 공개도가 높아지는 점 등 주식회사가 갖는 장점도 많다. 때문에 병원뿐만 아니라 학교에도 주식회사의 참여를 바라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현재의 법안에 이런 부분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또 각 부처에 사실상의 거부권이 남아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법안에 따르면 특구에서 사업을 하려면 각 부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기껏 신청해도 각 부처가 마음에 안 들면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문제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법안이 확정되고 규제들이 완화되어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면 특구지역의 경제가 활성화될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직접 일을 맡아 진행해야 할 기업들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왠지 걸린다. 그만큼 기업은 구조개혁특구 계획을 비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역시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