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야망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선 선영을 명당으로 이장하는 것이 관행(?)이다. 구속된 최규선씨가 2001년 4월에 이장한 선영(위). 박시익 교수가 직접 땅 속에 들어가 자다가 간첩으로 몰린 자리(아래). 현재 이후락씨 어머니 무덤이 있다.
조상의 묘를 명당으로 옮김으로써 발복(發福)을 기원하려는 시도는 특히 대선을 1년여 앞둔 시점인 2001년에 눈에 띄게 많았다. 그 해 6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부모 선영을 충남 예산으로 옮겼고, 얼마 뒤 한화갑 민주당 대표도 목포에서 충남으로 부모 선영을 옮겼다.
이 같은 정치인들의 선영 이장은 이미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있었으며 선영 이장에 얽힌 일화또한 많은데 그중 건축사이자 풍수지리 연구가인 박시익씨의 일화가 특히 유명하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한 뒤 건축사사무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박씨는 주택설계가 끝난 후 의뢰인들이 설계변경을 요구하는 바람에 난감했던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뢰인들은 한결같이 풍수지리적 이유를 들며 다시 설계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때까지 풍수설을 미신으로 치부했던 박씨는 이런 경험을 계기로 풍수지리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되어 풍수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점차 명당 발복론을 확신하게 된 그는 ‘만약 죽은 사람이 명당에 들어가 그 후손이 발복을 받는다면, 산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 산다 해도 좋은 영향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풍수 공부를 시작한 지 4년째 되던 해, 그는 당시 서울 종로구의 집을 판 뒤 매우 비싼 값을 치르고 경기 남양주군 사릉(조선 단종비의 무덤) 부근에 있는 1000평 규모의 산을 샀다.
박씨는 명당 혈이 있는 지점의 땅을 시신을 안치할 때와 같은 깊이로 파내고, 그 위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비닐을 덮어 움막을 만든 후 그곳에서 기거했다.
그렇게 지낸 지 한 달째 되던 어느 날 새벽, 움막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장공비 들어라! 너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놀란 그가 잠에서 깨어나 움막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어보니 이게 웬일인가? 예비군, 경찰들이 사방을 포위한 채 움막 쪽으로 총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는 얼떨결에 손을 들고 나와 ‘체포’되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그는 ‘생포된 간첩’이었다.
알고 보니 그를 수상히 여긴 마을 사람들이 박씨를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간첩신고를 받은 경찰은 한 달 가까이 잠복근무를 하면서 박씨가 만나는 사람들은 물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핀 뒤 간첩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자 그를 ‘생포’한 것이다. 연락을 받은 부인이 경찰서로 달려왔지만 간첩 누명을 벗기지는 못했다.
며칠을 고생한 뒤 그는 자신의 부인을 통해 당시 권상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권실장과는 풍수 공부를 함께 한 인연이 있었던 것. 사태를 파악한 권실장의 신원보증으로 박씨는 경찰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또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누가 중간에 다리를 놓았는지 고위 권력층에서 그 땅을 사겠다고 접선해온 것. 알고 보니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계약은 땅을 소개해준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부장이 직접 오지는 않고 부인인지 며느리인지 한 여인이 왔다. 그래서 당시 박씨가 ‘명당 실험’을 하던 자리에는 이후락씨의 어머니가 안장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의 일이다.
그 후 박씨는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87년 ‘풍수지리설 발생 배경에 관한 분석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1년부터는 영남대 대학원에서 풍수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