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간의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새삼스레 확인한 건 그라운드의 글로벌화였다. 가령 불운에 울긴 했지만 프랑스팀은 인종의 용광로 같은 무지개 빛 팀 컬러로 예의 현란한 예술축구를 보여줬다. 사실 2류팀이었던 프랑스가 갑자기 강팀으로 부상한 가장 큰 비결은 바로 다인종 선수 구성이었다. 운동신경이 우수한 흑인선수도 많지만 출신지별 축구 스타일의 장점을 골고루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팀도 비슷하다. 베컴 등 뛰어난 백인스타도 있지만 오랫동안 부진하던 영국팀이 근래 들어 옛 면모를 회복하고 있는 데는 이방인 선수들의 활약이 컸다.
굳이 다국적 인종 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수들 활동무대의 글로벌화는 대부분의 팀에서 공통적이다. 주로 유럽리그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과 어울린 경험은 세계 축구의 흐름을 흡수하고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축구경기도 그런 의미에서 글로벌화하고 있는 셈이다. 예컨대 사우디아라비아의 참패에는 자국 선수의 외국 진출을 막는 국수주의의 후유증이 있었던 듯하고, 이번에 선전했지만 독일이 최근 정상급 대열에서 밀려난 것은 전술의 단순함과 함께 게르만 순수주의를 고집해 글로벌화를 외면한 것도 한 이유로 보인다. 축구장 밖에서 시작된 글로벌화가 이젠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축구장 안에까지 진출한 글로벌화는 정작 그 밖에서는 역풍을 맞고 있다. 최근 전개되는 글로벌화가 진정한 의미, 즉 평등과 화합의 바탕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경이란 장벽의 철폐와 자유로운 사람의 교통을 그 최소한의 전제라고 한다면, 그 최소한에 대한 거부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유럽의 극우 부활 조짐이다. 이 극우의 핵심이 바로 외부인,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이다. 프랑스 대선의 르펜 돌풍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인종주의는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의 인종주의는 느닷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일까. 난데없는 사태가 아니라는 단서는 90년대 후반에 새롭게 떠오른 젊은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의 한 영화에 드러나 있다. 그의 작품 중 특히 ‘증오’라는 영화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로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는 이민자들의 세계에 앵글을 맞춘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파리 빈민촌의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백인이면서도 차별당하는 유대계 프랑스인, 노예처럼 수탈받아 온 아랍인의 한 후예,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이다. 이 빈민촌을 무대로 그 자신이 헝가리에서 이주한 유대인 2세인 감독은 기성사회에 대한 이민 2세들의 증오와 좌절을 담았다. 화려한 샹젤리제 거리 뒤편, 파리의 뒷골목에는 ‘증오’에서와 같은 가난과 어둠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대개 외부에서 들어온, 소수 인종들의 삶의 공간이다.
그런데 이런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거리는 지난 1970년대 조성되었다. 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대거 받아들인 식민지 출신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교외에 형성한 빈민촌인 셈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극우나 반이민의 정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80년대 유럽의 경제침체와 함께 프랑스가 불황에 짓눌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실업률은 높아 가고 범죄가 늘어났다. 당연히 불만도 쌓여갔다. 불만은 출구를 필요로 한다. 그 출구에 프랑스적 관용의 정신인 ‘톨레랑스’ 대신 증오가 잠식해 들어왔다. 그것은 프랑스의-혹은 서구사회의-톨레랑스의 한계다. 과거 식민지의 백성들을 하인처럼 거느릴 때는 좋았으나 이젠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처지에선 톨레랑스는 설 땅을 잃는다.
축구장 밖의 세계에서는 그라운드 안에서의 화합으로는 덮을 수 없는, 글로벌화의 구멍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국팀도 비슷하다. 베컴 등 뛰어난 백인스타도 있지만 오랫동안 부진하던 영국팀이 근래 들어 옛 면모를 회복하고 있는 데는 이방인 선수들의 활약이 컸다.
굳이 다국적 인종 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수들 활동무대의 글로벌화는 대부분의 팀에서 공통적이다. 주로 유럽리그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과 어울린 경험은 세계 축구의 흐름을 흡수하고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축구경기도 그런 의미에서 글로벌화하고 있는 셈이다. 예컨대 사우디아라비아의 참패에는 자국 선수의 외국 진출을 막는 국수주의의 후유증이 있었던 듯하고, 이번에 선전했지만 독일이 최근 정상급 대열에서 밀려난 것은 전술의 단순함과 함께 게르만 순수주의를 고집해 글로벌화를 외면한 것도 한 이유로 보인다. 축구장 밖에서 시작된 글로벌화가 이젠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축구장 안에까지 진출한 글로벌화는 정작 그 밖에서는 역풍을 맞고 있다. 최근 전개되는 글로벌화가 진정한 의미, 즉 평등과 화합의 바탕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경이란 장벽의 철폐와 자유로운 사람의 교통을 그 최소한의 전제라고 한다면, 그 최소한에 대한 거부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유럽의 극우 부활 조짐이다. 이 극우의 핵심이 바로 외부인,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이다. 프랑스 대선의 르펜 돌풍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인종주의는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의 인종주의는 느닷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일까. 난데없는 사태가 아니라는 단서는 90년대 후반에 새롭게 떠오른 젊은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의 한 영화에 드러나 있다. 그의 작품 중 특히 ‘증오’라는 영화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로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는 이민자들의 세계에 앵글을 맞춘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파리 빈민촌의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백인이면서도 차별당하는 유대계 프랑스인, 노예처럼 수탈받아 온 아랍인의 한 후예,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이다. 이 빈민촌을 무대로 그 자신이 헝가리에서 이주한 유대인 2세인 감독은 기성사회에 대한 이민 2세들의 증오와 좌절을 담았다. 화려한 샹젤리제 거리 뒤편, 파리의 뒷골목에는 ‘증오’에서와 같은 가난과 어둠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대개 외부에서 들어온, 소수 인종들의 삶의 공간이다.
그런데 이런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거리는 지난 1970년대 조성되었다. 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대거 받아들인 식민지 출신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교외에 형성한 빈민촌인 셈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극우나 반이민의 정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80년대 유럽의 경제침체와 함께 프랑스가 불황에 짓눌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실업률은 높아 가고 범죄가 늘어났다. 당연히 불만도 쌓여갔다. 불만은 출구를 필요로 한다. 그 출구에 프랑스적 관용의 정신인 ‘톨레랑스’ 대신 증오가 잠식해 들어왔다. 그것은 프랑스의-혹은 서구사회의-톨레랑스의 한계다. 과거 식민지의 백성들을 하인처럼 거느릴 때는 좋았으나 이젠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처지에선 톨레랑스는 설 땅을 잃는다.
축구장 밖의 세계에서는 그라운드 안에서의 화합으로는 덮을 수 없는, 글로벌화의 구멍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