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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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느껴지는 판화 에세이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5-01-20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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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무게’ 느껴지는 판화 에세이
    “죽을 병을 앓고 난 지금 나는 저 숲 속 나무들처럼 때가 되면 버릴 줄도 알 것 같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내 예술조차 집착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도 나무처럼 겨울이 오면 삭풍에 몸을 맡겨 나뭇잎은 물론 잔가지들도 모조리 날려 보낼 것이다”(김봉준).

    김봉준의 목판화 이야기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동아일보사 펴냄)를 들고 어떻게 읽을까 잠시 고민했다. 거기에는 세상을 읽어주는 판화가 있고 판화마다 꼭 어울리는 글귀가 달려 있다. 1980년대 농민운동·민중운동을 하면서 방황과 투쟁을 거듭하던 시기가 그려지는가 하면 긴 암 투병생활이 있고, 어느새 실크로드의 여행기로 바뀐다. 후반부에 들어가면 장인문화로서 ‘목판화론’을 펼치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간다. 자서전도 아니고 평론집이나 판화작품집도 아니다. 그냥 판화가 김봉준의 삶을 그대로 퍼다 옮겨놓은 듯한 책이다. 강원도 문막에서 텃밭을 일구며 자연인으로 살고 있는 김봉준씨는 홍익대 미대 재학중 민중미술운동에 뛰어들었고, 80년대를 각종 집회와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걸개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치열한 80년대를 지나 노조가 쇠퇴하는 90년대에 접어들자 그는 도시생활을 접고 산골로 들어갔다. 비로소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이제는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악성 림프샘 종양, 이미 3기. 투병생활중 그는 숲의 생태와 공동체문화에 눈떴다. 깨달음의 결실은 해마다 진밭마을에서 열리는 ‘숲과 마을 미술축전’으로 이어졌다.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담았다. 김씨는 지난 세월을 정리하지 않고는 앞길이 무거워 나아갈 수 없기에 훨훨 날려 버리려는 마음으로 이 책을 냈다고 했다. 치열하게 산 자만이 담아낼 수 있는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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