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고려 말∼조선 초 학자 송은 박익(松隱 朴翊·1332∼98) 선생의 무덤. 박익은 고려 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예부시랑(禮部侍郞), 세자이부중서령(世子貳傅中書令) 한림문학(翰林文學)을 지낸 학자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과 함께 고려 말 팔은(八隱)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지난 9월 태풍으로 인해 이 묘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박익의 후손인 밀성(密城) 박씨 문중은 무덤 보수 작업을 하던 중 무덤 석실(石室) 내부에 벽화가 있는 것을 발견해 문화재청과 동아대박물관에 신고했고, 그 즉시 두 기관은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과정에서 이 무덤이 1987년 전후에 이미 도굴됐음을 확인했다. 당시 도굴꾼들은 나무 얼개를 엮어 무덤 내부로 침입했다. 그 나무들이 썩어 봉토(封土)가 약해졌고 그러던 차에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봉분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고려 벽화는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풍으로 인한 우연한 발견이었지만 벽화의 의미는 적지 않다. 고려 후기의 생활 풍속과 복식(服飾) 문화, 그리고 당시 회화(繪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벽화는 석실 네 면에 모두 그려졌다. 석실은 잘 다듬은 화강암 판석(板石)으로 조립한 장방형(직사각형) 모양이고 크기는 대략 길이 250cm, 높이 180cm, 폭 100cm.
석실 북동쪽 벽화는 도굴 과정에서 많이 훼손됐고 나머지 벽의 경우도 수분으로 인해 일부가 훼손됐다. 박익의 목관을 안치하는 과정에서도 벽화가 훼손됐을 것으로 발굴단은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은 비교적 선명하다.
이번에 발견된 벽화는 모두 인물 풍속화다. 남녀 인물을 비롯해 말(馬), 각종 생활 도구 등이 등장한다. 일부 벽화 가장자리엔 매화(梅)와 대나무(竹)도 그려져 있다. 언뜻 보면 별것 아니지만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자료들이다. 사소한 단서 하나가 과거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벽화는 화강암 판석 위에 석회를 바르고 검은 선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석회가 마르기 전에 적색 남색 먹색 등 세가지 색을 입혀 완성했다. 이를 프레스코 기법이라 하는데 그 특징은 묘사가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벽화를 보면 대칭 구도가 두드러진다. 무덤 주인공(박익)의 머리쪽인 북동쪽으로 이동하는 4인1조의 인물들, 말과 마부의 그림이 모두 대칭이다. 이는 마치 장례행렬도를 연상시킨다.
이 벽화의 의미는 우선 고려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의 그림은 주로 불화만 남아 있다. 인물 풍속화는 거의 없다. 경남 거창 둔마리 고분벽화나 북한의 개성 공민왕릉 벽화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 무용도, 십이지신상 등 종교적 분위기의 그림들이었다. 따라서 박익 묘 벽화는 고려의 일반 회화가 어떠했는지를 연구하는데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또한 고려 복식사 연구에도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남자의 장화와 저고리의 단령(團領·저고리의 둥근 깃), 몸매보다 큰 의복, 몽고풍의 발립(鉢笠)과 여자들의 크고 긴 저고리, 옷차림, 머리 모양, 관모 등은 고려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자료들은 자연스레 당시의 풍속사 연구에도 이어질 수 있다.
매화와 대나무가 발견된 것도 눈길을 끈다. 이들 그림은 인물상 주변에 그려진 것으로 추가 조사 과정에서 최근 확인한 것이다.
충절을 의미하는 세한삼우(歲寒三友·松`-`竹`-`梅)가 고분에서 확인된 것은 이례적이다. 고려 태조 왕건묘 이래 처음 발견된 것으로, 벽화 연구에 새로운 주제로 떠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본다.
박익 무덤에선 이 밖에 박익의 가족관계와 장사를 지낸 때 등을 새겨 넣은 지석(誌石), 연꽃 무늬 등이 새겨진 화문석(花文石) 등도 발견됐다.
문화재청과 동아대박물관은 이달 말까지 조사를 계속한다. 물론 더 이상 새로운 벽화가 확인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벽화의 보존방안을 놓고 고민해야 한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훼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문화재의 운명’이라는 말을 되새겨보아야 할 때다.
지난 9월 태풍으로 인해 이 묘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박익의 후손인 밀성(密城) 박씨 문중은 무덤 보수 작업을 하던 중 무덤 석실(石室) 내부에 벽화가 있는 것을 발견해 문화재청과 동아대박물관에 신고했고, 그 즉시 두 기관은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과정에서 이 무덤이 1987년 전후에 이미 도굴됐음을 확인했다. 당시 도굴꾼들은 나무 얼개를 엮어 무덤 내부로 침입했다. 그 나무들이 썩어 봉토(封土)가 약해졌고 그러던 차에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봉분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고려 벽화는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풍으로 인한 우연한 발견이었지만 벽화의 의미는 적지 않다. 고려 후기의 생활 풍속과 복식(服飾) 문화, 그리고 당시 회화(繪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벽화는 석실 네 면에 모두 그려졌다. 석실은 잘 다듬은 화강암 판석(板石)으로 조립한 장방형(직사각형) 모양이고 크기는 대략 길이 250cm, 높이 180cm, 폭 100cm.
석실 북동쪽 벽화는 도굴 과정에서 많이 훼손됐고 나머지 벽의 경우도 수분으로 인해 일부가 훼손됐다. 박익의 목관을 안치하는 과정에서도 벽화가 훼손됐을 것으로 발굴단은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은 비교적 선명하다.
이번에 발견된 벽화는 모두 인물 풍속화다. 남녀 인물을 비롯해 말(馬), 각종 생활 도구 등이 등장한다. 일부 벽화 가장자리엔 매화(梅)와 대나무(竹)도 그려져 있다. 언뜻 보면 별것 아니지만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자료들이다. 사소한 단서 하나가 과거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벽화는 화강암 판석 위에 석회를 바르고 검은 선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석회가 마르기 전에 적색 남색 먹색 등 세가지 색을 입혀 완성했다. 이를 프레스코 기법이라 하는데 그 특징은 묘사가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벽화를 보면 대칭 구도가 두드러진다. 무덤 주인공(박익)의 머리쪽인 북동쪽으로 이동하는 4인1조의 인물들, 말과 마부의 그림이 모두 대칭이다. 이는 마치 장례행렬도를 연상시킨다.
이 벽화의 의미는 우선 고려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의 그림은 주로 불화만 남아 있다. 인물 풍속화는 거의 없다. 경남 거창 둔마리 고분벽화나 북한의 개성 공민왕릉 벽화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 무용도, 십이지신상 등 종교적 분위기의 그림들이었다. 따라서 박익 묘 벽화는 고려의 일반 회화가 어떠했는지를 연구하는데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또한 고려 복식사 연구에도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남자의 장화와 저고리의 단령(團領·저고리의 둥근 깃), 몸매보다 큰 의복, 몽고풍의 발립(鉢笠)과 여자들의 크고 긴 저고리, 옷차림, 머리 모양, 관모 등은 고려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자료들은 자연스레 당시의 풍속사 연구에도 이어질 수 있다.
매화와 대나무가 발견된 것도 눈길을 끈다. 이들 그림은 인물상 주변에 그려진 것으로 추가 조사 과정에서 최근 확인한 것이다.
충절을 의미하는 세한삼우(歲寒三友·松`-`竹`-`梅)가 고분에서 확인된 것은 이례적이다. 고려 태조 왕건묘 이래 처음 발견된 것으로, 벽화 연구에 새로운 주제로 떠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본다.
박익 무덤에선 이 밖에 박익의 가족관계와 장사를 지낸 때 등을 새겨 넣은 지석(誌石), 연꽃 무늬 등이 새겨진 화문석(花文石) 등도 발견됐다.
문화재청과 동아대박물관은 이달 말까지 조사를 계속한다. 물론 더 이상 새로운 벽화가 확인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벽화의 보존방안을 놓고 고민해야 한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훼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문화재의 운명’이라는 말을 되새겨보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