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는 연주회가 끝난 뒤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어머니, 이 편지를 받는 밤엔 침대 위에 질퍽하게 똥오줌 누시고 깔고 해서 주무십시오’라고 희한한 문안을 드린다. 어머니가 모차르트에게 보낸 답장은 한술 더 뜬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연주회 성공을 축하한다. 마음껏 똥오줌 싸서는 베갯머리에 칠하고 거기 코를 박고 어미 편지 묻고 자도록 하여라. 아, 사랑하는 내 천재야!’
민속학자이자 국문학자인 김열규 교수(인제대)의 저서 ‘욕-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에 소개된 이 일화는 ‘똥타령’ 편지가 유행하던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의 사회적 관습을 보여준다. 요즘 같으면 함부로 입에 올렸다간 불쾌감과 상스런 인상만 줄, 욕에 가까운 이 단어가 신명과 흥겨움의 상징이었던 시대도 있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광주에서 열렸던 ‘욕쟁이 대회’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이 대회에서 으뜸상을 받은 사람은 경남 고성에 사는 한 노인이었는데 그는 ‘날강도 찜 쪄서 안주 삼고, 화냥년 경수 받아 술 빚어먹고, 피똥 싸고 죽을 남원 사또 변학도와 사돈해서 천하 잡놈 변강쇠 같은 손주 볼 놈’이라는 무지막지한 욕을 퍼부어댐으로써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우리말에 얼마나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욕이 많은지 알 수 있었던 이 대회는 그러나 비난여론에 밀려 다시 열리지 못했다.
인격모독·친근감 표현 ‘두 얼굴’
살면서 욕 한번쯤 안해본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많은 욕을 듣고 또 직접 하기도 한다. 공중화장실에 가면 으레 야한 그림과 함께 쓰여 있는 음담패설을 볼 수 있고, 평소엔 얌전하던 사람들이 술 마시고 고래고래 욕을 하며 싸우는 광경도 흔히 볼 수 있다.
왜 욕인가. 욕 나오는 세상이라서? 사는 게 욕돼서?
이유야 어쨌든 왈칵, 느닷없이, 불끈 솟구치는 게 바로 욕이다. 욕은 언어와 그것에 딸려 있는 인간 행위가 질서라든가 체계와 체제를 벗어던진 상황에서 폭발한다. 욕은 보통의 언어가 아닌 제2의 언어이고, 또 다른 언어다. 언어 논리라든가, 이성에 매인 언어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분화하는 언어, 이른바 갈 데까지 간 파국의 경지가 욕이다. 따라서 욕의 본성은 ‘반란’ ‘파괴’ ‘폭행’ ‘예외’ ‘소외’ ‘일탈’ 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욕의 또 다른 특징은 ‘야누스적’이라는 데 있다. 욕은 가장 친한 사람과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모두 쓰인다. 미워하는 이에겐 인격모독이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밌고 친근감 있는 우의의 표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욕은 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한다. “이년의 팔자 더럽게 타고나서…”라고 중얼대면 그것은 자학이다. 이럴 경우 욕은 사디즘과 마조히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언어다.
오랫동안 욕은 그늘의 말, 음지의 말이었다. 어엿한 한국어이면서도 구석에 처박혀서는 감시당하고, 구박받고, 쫓김을 당하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고 할까. 그러나 어느샌가 욕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나와 대명천지를 활보하고 있다. 공적인 자리에선 쓰기 어려운 음지의 말이 사이버 공간에서 버젓이 활자화된 형태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고, 욕사전이 발간되는 등 욕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고 있는 것.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 중에는 대사의 태반이 욕으로 점철된 작품도 많다. 이른바 ‘욕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 것이다.
‘넘버 3’ ‘주유소 습격사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같은 영화에는 건달, 양아치, 노는 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욕을 입에 달고 산다. ‘넘버 3’의 마동팔 검사(최민식 분) 역시 건달 못지않은 욕쟁이다. “내가 제일 × 같아 하는 말이 뭔 줄 아냐?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야, 정말 × 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 있어? 죄를 저지르는 × 같은 새끼들이 나쁜 거지” 같은 그의 대사는 포복절도할 웃음을 선사하며 인기를 끌었다.
한편 저예산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영화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충무로의 타란티노’라는 별명을 얻은 류승완 감독(27)은 ‘죽거나…’에서 생생한 뒷골목 언어를 구사했고, 여기에 적당한 유머까지 곁들여 영화의 극적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돈도 없고 빽고 없고 머리도 나쁘지만, 자존심 하나만큼은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욕을 한다. 단지 입으로 내뱉는 언어가 아니라 온몸으로 내뿜는 처절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욕이다.
이 영화에 직접 배우로도 출연한 류감독은 “내가 평소에 친구들하고 쓰는 말, 동생과 동생 친구들이 나누는 말을 듣고 대사로 썼다. 건달들 대사는 취재도 좀 했다. 영화에서 ‘대사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대사는 인물들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고, 가짜 같지 않게 하는 ‘리얼리티’가 생명이다. 욕설의 쾌감과 비애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죽거나…’에 나오는 욕은 폭력의 악순환에 대한 탄식, 엇나가기만 하는 운명에 대한 깊은 한숨이 되어 폐부를 찌른다. 김주환 교수(연세대 신문방송학과)는 “욕은 때에 따라 설득력 있는 정치적 발언이 되기도 하고 촌철살인의 짧은 시가 되기도 한다”면서 “류감독 영화에서의 욕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절규이기에 관객들과 즉각적이고도 완벽한 소통을 이뤄낸다. ‘죽거나…’는 욕과 싸움 장면이 많지만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애정이 느껴지는 영화”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쓰이는 욕이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만은 아니다. 올해 초 개봉한 영화 ‘행복한 장의사’는 섹스와 폭력 장면이 전혀 없는 영화인데도 시골 청년의 걸쭉한 입담 등을 이유로 ‘18세 이용가’ 등급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잣대’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반론도 있다.
점점 거칠고 험해지는 요즘의 영화대사를 두고 ‘극한을 향해 치닫는 영화의 자해소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 것. 조희문 교수(영화평론가·상명대)는 “근래의 영화들은 욕에 대한 최소한의 자제나 여과도 생략한 것처럼 보인다. 여과 없이 욕을 내뱉는다고 영화의 리얼리티가 높아지고 수준이 나아진다고 믿는다면 오늘의 영화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영화의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적 유대를 위한 진지한 성찰 역시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꼭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쓰였을 때, 탁월한 풍자와 통찰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욕이다. 다들 바로 되자고 하는 욕, 세상 제대로 돌아가자고 다그치는 욕이 아쉬운 요즘이다.
민속학자이자 국문학자인 김열규 교수(인제대)의 저서 ‘욕-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에 소개된 이 일화는 ‘똥타령’ 편지가 유행하던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의 사회적 관습을 보여준다. 요즘 같으면 함부로 입에 올렸다간 불쾌감과 상스런 인상만 줄, 욕에 가까운 이 단어가 신명과 흥겨움의 상징이었던 시대도 있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광주에서 열렸던 ‘욕쟁이 대회’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이 대회에서 으뜸상을 받은 사람은 경남 고성에 사는 한 노인이었는데 그는 ‘날강도 찜 쪄서 안주 삼고, 화냥년 경수 받아 술 빚어먹고, 피똥 싸고 죽을 남원 사또 변학도와 사돈해서 천하 잡놈 변강쇠 같은 손주 볼 놈’이라는 무지막지한 욕을 퍼부어댐으로써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우리말에 얼마나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욕이 많은지 알 수 있었던 이 대회는 그러나 비난여론에 밀려 다시 열리지 못했다.
인격모독·친근감 표현 ‘두 얼굴’
살면서 욕 한번쯤 안해본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많은 욕을 듣고 또 직접 하기도 한다. 공중화장실에 가면 으레 야한 그림과 함께 쓰여 있는 음담패설을 볼 수 있고, 평소엔 얌전하던 사람들이 술 마시고 고래고래 욕을 하며 싸우는 광경도 흔히 볼 수 있다.
왜 욕인가. 욕 나오는 세상이라서? 사는 게 욕돼서?
이유야 어쨌든 왈칵, 느닷없이, 불끈 솟구치는 게 바로 욕이다. 욕은 언어와 그것에 딸려 있는 인간 행위가 질서라든가 체계와 체제를 벗어던진 상황에서 폭발한다. 욕은 보통의 언어가 아닌 제2의 언어이고, 또 다른 언어다. 언어 논리라든가, 이성에 매인 언어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분화하는 언어, 이른바 갈 데까지 간 파국의 경지가 욕이다. 따라서 욕의 본성은 ‘반란’ ‘파괴’ ‘폭행’ ‘예외’ ‘소외’ ‘일탈’ 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욕의 또 다른 특징은 ‘야누스적’이라는 데 있다. 욕은 가장 친한 사람과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모두 쓰인다. 미워하는 이에겐 인격모독이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밌고 친근감 있는 우의의 표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욕은 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한다. “이년의 팔자 더럽게 타고나서…”라고 중얼대면 그것은 자학이다. 이럴 경우 욕은 사디즘과 마조히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언어다.
오랫동안 욕은 그늘의 말, 음지의 말이었다. 어엿한 한국어이면서도 구석에 처박혀서는 감시당하고, 구박받고, 쫓김을 당하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고 할까. 그러나 어느샌가 욕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나와 대명천지를 활보하고 있다. 공적인 자리에선 쓰기 어려운 음지의 말이 사이버 공간에서 버젓이 활자화된 형태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고, 욕사전이 발간되는 등 욕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고 있는 것.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 중에는 대사의 태반이 욕으로 점철된 작품도 많다. 이른바 ‘욕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 것이다.
‘넘버 3’ ‘주유소 습격사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같은 영화에는 건달, 양아치, 노는 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욕을 입에 달고 산다. ‘넘버 3’의 마동팔 검사(최민식 분) 역시 건달 못지않은 욕쟁이다. “내가 제일 × 같아 하는 말이 뭔 줄 아냐?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야, 정말 × 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 있어? 죄를 저지르는 × 같은 새끼들이 나쁜 거지” 같은 그의 대사는 포복절도할 웃음을 선사하며 인기를 끌었다.
한편 저예산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영화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충무로의 타란티노’라는 별명을 얻은 류승완 감독(27)은 ‘죽거나…’에서 생생한 뒷골목 언어를 구사했고, 여기에 적당한 유머까지 곁들여 영화의 극적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돈도 없고 빽고 없고 머리도 나쁘지만, 자존심 하나만큼은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욕을 한다. 단지 입으로 내뱉는 언어가 아니라 온몸으로 내뿜는 처절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욕이다.
이 영화에 직접 배우로도 출연한 류감독은 “내가 평소에 친구들하고 쓰는 말, 동생과 동생 친구들이 나누는 말을 듣고 대사로 썼다. 건달들 대사는 취재도 좀 했다. 영화에서 ‘대사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대사는 인물들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고, 가짜 같지 않게 하는 ‘리얼리티’가 생명이다. 욕설의 쾌감과 비애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죽거나…’에 나오는 욕은 폭력의 악순환에 대한 탄식, 엇나가기만 하는 운명에 대한 깊은 한숨이 되어 폐부를 찌른다. 김주환 교수(연세대 신문방송학과)는 “욕은 때에 따라 설득력 있는 정치적 발언이 되기도 하고 촌철살인의 짧은 시가 되기도 한다”면서 “류감독 영화에서의 욕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절규이기에 관객들과 즉각적이고도 완벽한 소통을 이뤄낸다. ‘죽거나…’는 욕과 싸움 장면이 많지만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애정이 느껴지는 영화”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쓰이는 욕이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만은 아니다. 올해 초 개봉한 영화 ‘행복한 장의사’는 섹스와 폭력 장면이 전혀 없는 영화인데도 시골 청년의 걸쭉한 입담 등을 이유로 ‘18세 이용가’ 등급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잣대’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반론도 있다.
점점 거칠고 험해지는 요즘의 영화대사를 두고 ‘극한을 향해 치닫는 영화의 자해소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 것. 조희문 교수(영화평론가·상명대)는 “근래의 영화들은 욕에 대한 최소한의 자제나 여과도 생략한 것처럼 보인다. 여과 없이 욕을 내뱉는다고 영화의 리얼리티가 높아지고 수준이 나아진다고 믿는다면 오늘의 영화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영화의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적 유대를 위한 진지한 성찰 역시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꼭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쓰였을 때, 탁월한 풍자와 통찰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욕이다. 다들 바로 되자고 하는 욕, 세상 제대로 돌아가자고 다그치는 욕이 아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