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지리산은 높고 크다. 일찍이 지리산에 은거했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72)도 “(지리산은)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는다”(天鳴猶不鳴)고 읊조리며 듬직한 지리산을 닮고자 했다. 남명이 떠난 지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지리산은 3도(道) 5군(郡)에 걸칠 만큼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산줄기를 드리우고 있다. 그 한 자락이라도 품은 고장들은 모두 이 산을 영산(靈山)으로 섬길 뿐만 아니라 저마다 제 땅의 지리산이 가장 웅장하고 아름답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구름바다 위에 뾰족이 솟아오른 지리산 주릉(主稜)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은 오로지 산청군뿐이다. 산청 땅에서도 특히 단성면과 신안면의 경호강변에 서면 주봉인 천왕봉에서 세석평전 토끼봉 반야봉 등을 거쳐 노고단까지 거침없이 내달린 100여리의 주릉이 장쾌하게 조망된다.
산청 읍내에서 단성면을 찾아가는 길에 시원스레 뚫린 대전-통영간 고속도로(현재는 함양에서 진주까지의 구간만 개통)를 마다한 채 좁고 구불구불한 3번 국도를 고집하는 것도 이 탁월한 조망 때문이다. 경호강의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이 국도는 서쪽으로의 시야가 활달해서 하나의 굵직한 선으로 이어진 지리산 연봉(連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신안면 소재지인 하정리에서 20번 국도로 갈아타고 단성교를 건너면 단성면이다.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서는 지리산과 한줄기 바람에도 거세게 일렁이는 경호강변의 대숲이 머릿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1914년까지만 해도 어엿한 현(縣)이었던 단성면은 두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목화가 재배되었으며, 조선 철종 때에는 진주민란의 도화선이 된 단성 봉기가 발발했다.
고려 공민왕 때에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1329∼98)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 열 톨을 붓대 속에 몰래 갖고 들어왔다. 고향인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로 내려온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씨를 뿌렸다. 간신히 3년 만에 한 그루의 목화를 키우는 데 성공하여 100여개의 씨를 얻었고, 그로부터 10년도 채 못 되어 목화 재배는 온 나라에 널리 퍼졌다. 이후 정천익은 목화씨 빼는 기계를 만들고, 문익점의 손자 문래는 실 잣는 기계인 물레를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백성들의 의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현재 배양마을의 국도변에 자리한 목화시배지(木花始培地, 사적 제108호)에는 해마다 목화씨가 뿌려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넓은 잎 사이로 산골 새색시처럼 수더분한 꽃잎을 펼친 목화꽃을 볼 수 있는데, 아득한 시절의 소꿉친구를 만난 듯 반가움이 각별하다.
목화시배지에서 다시 큰길로 접어들어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어서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즐비한 남사리에 다다른다. 헌데 이 마을의 대부분 고택들은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반촌(班村) 특유의 위엄이 아닌 졸부의 만용과 허세가 엿보인다. 아닌게아니라 20세기 초에 부(富)와 위세를 보이려고 지어진 부농(富農) 주택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골목을 돌아들 때마다 길고도 깊숙하게 이어지는 흙돌담길이 유난히 정겹고, 높은 담 너머로 해묵은 가지를 늘어뜨린 배롱나무 감나무 회화나무 등도 듬직하여 보기 좋다.
남사리를 뒤로 하고 지리산의 깊숙한 기슭으로 향하는 길에는 일부러라도 짬을 내어 단속사터에 들러봄직하다. 폐허로 변한 절터에는 한 쌍의 삼층석탑과 부러진 당간지주만 외로이 남아 있는데도 황량함보다는 오히려 푸근함이 느껴진다. 지리산의 너른 품이 절터를 아늑하게 감싼 데다 불국사의 석가탑처럼 단아한 멋과 안정감이 돋보이는 두 기의 삼층석탑이 절터를 지키고 서 있기 때문이다.
남사리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40여리쯤 들어가면 시천면 소재지인 사리다. 옛날 덕산이라 부르던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리산 동부지역의 교통 요충지이자 물산의 집결지였다. 또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도학자이자 동갑내기인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학문이 깊었던 남명 조식의 은거지로도 유명하다.
사리와 그 이웃마을인 원리에는 지금도 산천재(山天齋) 남명묘소 덕천서원(德川書院) 세심정(洗心亭) 등 남명의 자취가 서린 유적이 남아 있는데, 한결같이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덕천강변의 산천재 마당에 심어진 몇 그루의 배롱나무는 아직 어리고 성긴데도 여름철과 초가을 내내 탐스런 꽃송이를 흐드러지게 피워올려 장관을 이룬다. 그러고 보니 한여름의 태양보다도 붉은 배롱나무꽃은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처사(處士)로 살았던 남명의 단심(丹心)을 상징하는 듯싶다.
사리 삼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어디로 갈지 잠시 고심하다가 삼장면 방면의 왼쪽으로 길머리를 돌렸다. 그래야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진 지리산과 실개천처럼 가늘어진 덕천강을 바라보며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친 김에 지리산 천왕봉의 동쪽 자락에 깃들인 대원사와 숲 좋고 물 맑은 대원사 계곡을 한번 들러보고도 싶었다.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때에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이다. 그러나 1948년의 여순사건 당시에 모두 불탔다가 1955년 중창된 탓에 고색창연한 맛은 별로 없다. 그 대신 50여명의 비구니들이 참선하는 도량답게 아주 깔끔하고 고즈넉하다. 특히 경내 곳곳마다 정성스레 가꾼 화단과 원통보전 뒤쪽의 가지런한 장독대가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정갈하게 해준다.
때마침 대원사로 들고나는 길가와 삼장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59번 지방도변에는 철 늦은 여름꽃과 때 이른 가을꽃이 한데 피어 있었다. 한꺼번에 두 계절을 느끼게 하는 그 풍정이 매우 독특한데, 여러 꽃 중에서도 들국화의 일종인 벌개미취가 가장 두드러져 보였다. 긴 꽃대 위에서 동그란 보랏빛 꽃잎을 펼친 꽃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그 꽃의 아름다움을 익히 알고 가로화로 심은 관(官)의 안목과 배려 또한 그지없이 반갑고도 고마운 탓이다.
하지만 구름바다 위에 뾰족이 솟아오른 지리산 주릉(主稜)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은 오로지 산청군뿐이다. 산청 땅에서도 특히 단성면과 신안면의 경호강변에 서면 주봉인 천왕봉에서 세석평전 토끼봉 반야봉 등을 거쳐 노고단까지 거침없이 내달린 100여리의 주릉이 장쾌하게 조망된다.
산청 읍내에서 단성면을 찾아가는 길에 시원스레 뚫린 대전-통영간 고속도로(현재는 함양에서 진주까지의 구간만 개통)를 마다한 채 좁고 구불구불한 3번 국도를 고집하는 것도 이 탁월한 조망 때문이다. 경호강의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이 국도는 서쪽으로의 시야가 활달해서 하나의 굵직한 선으로 이어진 지리산 연봉(連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신안면 소재지인 하정리에서 20번 국도로 갈아타고 단성교를 건너면 단성면이다.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서는 지리산과 한줄기 바람에도 거세게 일렁이는 경호강변의 대숲이 머릿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1914년까지만 해도 어엿한 현(縣)이었던 단성면은 두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목화가 재배되었으며, 조선 철종 때에는 진주민란의 도화선이 된 단성 봉기가 발발했다.
고려 공민왕 때에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1329∼98)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 열 톨을 붓대 속에 몰래 갖고 들어왔다. 고향인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로 내려온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씨를 뿌렸다. 간신히 3년 만에 한 그루의 목화를 키우는 데 성공하여 100여개의 씨를 얻었고, 그로부터 10년도 채 못 되어 목화 재배는 온 나라에 널리 퍼졌다. 이후 정천익은 목화씨 빼는 기계를 만들고, 문익점의 손자 문래는 실 잣는 기계인 물레를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백성들의 의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현재 배양마을의 국도변에 자리한 목화시배지(木花始培地, 사적 제108호)에는 해마다 목화씨가 뿌려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넓은 잎 사이로 산골 새색시처럼 수더분한 꽃잎을 펼친 목화꽃을 볼 수 있는데, 아득한 시절의 소꿉친구를 만난 듯 반가움이 각별하다.
목화시배지에서 다시 큰길로 접어들어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어서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즐비한 남사리에 다다른다. 헌데 이 마을의 대부분 고택들은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반촌(班村) 특유의 위엄이 아닌 졸부의 만용과 허세가 엿보인다. 아닌게아니라 20세기 초에 부(富)와 위세를 보이려고 지어진 부농(富農) 주택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골목을 돌아들 때마다 길고도 깊숙하게 이어지는 흙돌담길이 유난히 정겹고, 높은 담 너머로 해묵은 가지를 늘어뜨린 배롱나무 감나무 회화나무 등도 듬직하여 보기 좋다.
남사리를 뒤로 하고 지리산의 깊숙한 기슭으로 향하는 길에는 일부러라도 짬을 내어 단속사터에 들러봄직하다. 폐허로 변한 절터에는 한 쌍의 삼층석탑과 부러진 당간지주만 외로이 남아 있는데도 황량함보다는 오히려 푸근함이 느껴진다. 지리산의 너른 품이 절터를 아늑하게 감싼 데다 불국사의 석가탑처럼 단아한 멋과 안정감이 돋보이는 두 기의 삼층석탑이 절터를 지키고 서 있기 때문이다.
남사리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40여리쯤 들어가면 시천면 소재지인 사리다. 옛날 덕산이라 부르던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리산 동부지역의 교통 요충지이자 물산의 집결지였다. 또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도학자이자 동갑내기인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학문이 깊었던 남명 조식의 은거지로도 유명하다.
사리와 그 이웃마을인 원리에는 지금도 산천재(山天齋) 남명묘소 덕천서원(德川書院) 세심정(洗心亭) 등 남명의 자취가 서린 유적이 남아 있는데, 한결같이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덕천강변의 산천재 마당에 심어진 몇 그루의 배롱나무는 아직 어리고 성긴데도 여름철과 초가을 내내 탐스런 꽃송이를 흐드러지게 피워올려 장관을 이룬다. 그러고 보니 한여름의 태양보다도 붉은 배롱나무꽃은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처사(處士)로 살았던 남명의 단심(丹心)을 상징하는 듯싶다.
사리 삼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어디로 갈지 잠시 고심하다가 삼장면 방면의 왼쪽으로 길머리를 돌렸다. 그래야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진 지리산과 실개천처럼 가늘어진 덕천강을 바라보며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친 김에 지리산 천왕봉의 동쪽 자락에 깃들인 대원사와 숲 좋고 물 맑은 대원사 계곡을 한번 들러보고도 싶었다.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때에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이다. 그러나 1948년의 여순사건 당시에 모두 불탔다가 1955년 중창된 탓에 고색창연한 맛은 별로 없다. 그 대신 50여명의 비구니들이 참선하는 도량답게 아주 깔끔하고 고즈넉하다. 특히 경내 곳곳마다 정성스레 가꾼 화단과 원통보전 뒤쪽의 가지런한 장독대가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정갈하게 해준다.
때마침 대원사로 들고나는 길가와 삼장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59번 지방도변에는 철 늦은 여름꽃과 때 이른 가을꽃이 한데 피어 있었다. 한꺼번에 두 계절을 느끼게 하는 그 풍정이 매우 독특한데, 여러 꽃 중에서도 들국화의 일종인 벌개미취가 가장 두드러져 보였다. 긴 꽃대 위에서 동그란 보랏빛 꽃잎을 펼친 꽃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그 꽃의 아름다움을 익히 알고 가로화로 심은 관(官)의 안목과 배려 또한 그지없이 반갑고도 고마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