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지는 목장 풍경 속으로 12인승 미니 버스 한 대와 짐을 가득 실은 승합차 한 대가 달려가고 있었다. 시드니를 출발하여 여섯 시간 남짓,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예순을 바라보는 한국인 선교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버스에 탄 10여명 남짓한 평안교회 교인들과 버스를 운전하는 천보영 선교사는 관광차 나선 사람들이면 꼭 들러야 하는 관광명소들을 단 한 군데도 들르지 않고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들이 찾아가려고 하는 곳은 나니마 빌리지(Nanima Village)다. 1980년대 초까지 종교의 이름을 앞세워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활용했던 나니마 미션(Nanima Mission)이 그들의 목적지였다.
전통악기 두드리며 환영행사
버스가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서 몇몇 초행길의 방문객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예고된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고, 그곳이 호주 속의 마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을 전체가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나니마 빌리지의 지도자인 네빌 브라운씨가 나와 일행들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다른 주민들도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행을 맞는 그곳 원주민들의 태도가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상봉하는 가족들처럼 보였다. 서로 부둥켜안고 뺨을 비비는가 하면 눈시울을 붉히는 여자들까지 있었다.
왁자지껄한 잔칫집 분위기 속에서 점심식사가 끝나고 원주민들의 환영행사가 시작됐다. 그들의 전통악기인 디저리두 연주에 맞춰서 어린이들이 전통무용을 추었다. 나니마 빌리지 출신 어린이들로 구성된 무용 팀은 오는 9월15일에 개최되는 시드니올림픽 개막식 때도 공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원주민들의 환영순서가 끝나고 일행을 이끌고 온 천보영 선교사가 인사말을 전하면서 승합차에 가득 싣고 온 옷가지 등을 나누어주었다. 옷가지는 새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보영 선교사 부부와 평안교회 교인들이 깨끗하게 세탁하고 다림질한 것들이었다.
지난 1988년, 신앙심이 깊은 50대 중년 남자가 은퇴생활을 즐기기 위해 호주로 이민와서 시드니에 정착했다. 그는 1965년에 고려대 상대를 졸업한 이후 약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난 76년 중동으로 진출하여 가구사업을 시작해 크게 성공했다.
그는 호주로 이민오기 전까지 22년간을 중동지역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기독교 성지들을 찾아다녔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성지를 순례하면서 그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졌다. 또한 그는 자신의 현장체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성지순례 비디오 테이프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 영원히 정착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사업을 정리하고 자녀들의 교육과 자신의 은퇴생활 등을 고려하여 호주로의 이민을 결행했다. 호주에서의 이민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호주로 귀환한 존 브라운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됐다. 브라운 목사는 유창한 한국말로 설교를 했고 한국을 사랑하는 목사답게 ‘변조은’이라는 한국 이름도 갖고 있었다.
브라운 목사는 설교를 통해서, 이곳 시드니에 100여명의 한국 출신 목회자들이 있는데 한인들을 위한 목회도 좋지만 호주 원주민들을 위한 선교와 봉사활동에 나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200여년 동안 백인들의 지배를 받아오면서 많은 참혹상을 당한 원주민들은 이미 브라운 목사를 포함한 모든 백인들에게 깊은 증오심을 갖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연유로 한인 목회자들에게 원주민 선교를 당부하고 다녔는데 결과는 별무소득이었다. 보다 못한 천보영씨가 내가 해보겠노라고 나선 것이 지난 1992년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선교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온몸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이들에게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다는 생각에서 52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학대 입학을 결심했다. 주변의 만류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본인 스스로도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지만 마음을 추스르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93년에 입학한 장로교신학대학교 생활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공부도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고, 무엇보다 해외에 가족을 남겨두고 불편한 기숙사에서 4년 동안 생활한다는 현실은 깊은 신앙심 이상의 뼈를 깎는 인내심을 요구했다.
몇 차례의 위기 끝에 신학대를 졸업했고 96년 11월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55세였으니 다른 목사들 같으면 서서히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에 스타트 라인에 선 것이다. 그것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호주파송 선교사 제1호가 되어서….
난관은 선교사가 되는 과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 큰 난관이 호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가 되어 맨 처음 찾아간 원주민 마을에서 당한 일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원주민 청년이 깨진 병을 들고 천 선교사의 길을 막아선 것.
나중에 원주민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애보리지니스’라고 불리는 호주 원주민들의 타민족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엄연히 호주 땅의 주인이면서도 전쟁이나 강화조약도 없이 무단으로 점령한 백인들로부터 갖은 박해를 당하고 가족과 수만년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산산이 조각나는 불행을 겪었던 그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분노였다.
천보영 선교사는 깊은 묵상 끝에 그들의 닫힌 마음부터 열어야 선교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서두르지 말고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하자는 것이 그의 기도 제목이 되었다.
원주민들은 경제 선진국의 국민이면서도 변변한 옷가지 하나 없이 낮은 수준의 생활을 하고, 스포츠 스타나 전통 예술인 등이 되는 길밖엔 별다른 희망이 없다는 엄정한 현실이 그들을 고독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지상에서 가장 열등한 종족이라는 왜곡된 차별의식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는 옷가지 등을 수집하여 손질해서 갖다주고 수시로 음식을 장만하여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의 반응은 밋밋했지만 조금씩 변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엔 선교사 부부 두 사람만으로는 부족했다.
오직 원주민 선교만 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수정하여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그의 생각을 전해들은 호주연합교단 소속의 원주민 노회에서 시드니 벨모어에 위치한 원주민 교회를 사용하도록 해주었다. 이 교회는 원주민 교회로 설립되었으나 교회에 출석하는 원주민들이 없어 힌두교 등 다른 종교단체에 세를 주고 있었다.
그는 교회의 이름을 평안교회라고 짓고 교회의 원주민 선교와 봉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대여섯 시간씩 미니버스를 몰고 원주민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본래의 착한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보영 선교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은 천보영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그 먼 곳에서 시드니로 찾아오기도 한다.
이제 천 길 벼랑의 이쪽과 저쪽을 잇는 가교(架橋)가 놓였다. 그 가교를 잇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사랑이었다. 내년이면 예순이 되는 천보영 선교사의 모습이 마치 20대 청년 선교사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그의 가슴에서 진정한 사랑의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온화한 얼굴의 원주민 조안 윌리(46)가 시드니로 돌아오려는 천보영 선교사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우린 너무 오랫동안 철조망에 갇힌 동물들처럼 사람들을 무서워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니마를 찾아오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입니다. ‘뵈영’(보영)은 이제 나니마의 가족입니다.”
버스에 탄 10여명 남짓한 평안교회 교인들과 버스를 운전하는 천보영 선교사는 관광차 나선 사람들이면 꼭 들러야 하는 관광명소들을 단 한 군데도 들르지 않고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들이 찾아가려고 하는 곳은 나니마 빌리지(Nanima Village)다. 1980년대 초까지 종교의 이름을 앞세워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활용했던 나니마 미션(Nanima Mission)이 그들의 목적지였다.
전통악기 두드리며 환영행사
버스가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서 몇몇 초행길의 방문객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예고된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고, 그곳이 호주 속의 마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을 전체가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나니마 빌리지의 지도자인 네빌 브라운씨가 나와 일행들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다른 주민들도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행을 맞는 그곳 원주민들의 태도가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상봉하는 가족들처럼 보였다. 서로 부둥켜안고 뺨을 비비는가 하면 눈시울을 붉히는 여자들까지 있었다.
왁자지껄한 잔칫집 분위기 속에서 점심식사가 끝나고 원주민들의 환영행사가 시작됐다. 그들의 전통악기인 디저리두 연주에 맞춰서 어린이들이 전통무용을 추었다. 나니마 빌리지 출신 어린이들로 구성된 무용 팀은 오는 9월15일에 개최되는 시드니올림픽 개막식 때도 공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원주민들의 환영순서가 끝나고 일행을 이끌고 온 천보영 선교사가 인사말을 전하면서 승합차에 가득 싣고 온 옷가지 등을 나누어주었다. 옷가지는 새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보영 선교사 부부와 평안교회 교인들이 깨끗하게 세탁하고 다림질한 것들이었다.
지난 1988년, 신앙심이 깊은 50대 중년 남자가 은퇴생활을 즐기기 위해 호주로 이민와서 시드니에 정착했다. 그는 1965년에 고려대 상대를 졸업한 이후 약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난 76년 중동으로 진출하여 가구사업을 시작해 크게 성공했다.
그는 호주로 이민오기 전까지 22년간을 중동지역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기독교 성지들을 찾아다녔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성지를 순례하면서 그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졌다. 또한 그는 자신의 현장체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성지순례 비디오 테이프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 영원히 정착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사업을 정리하고 자녀들의 교육과 자신의 은퇴생활 등을 고려하여 호주로의 이민을 결행했다. 호주에서의 이민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호주로 귀환한 존 브라운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됐다. 브라운 목사는 유창한 한국말로 설교를 했고 한국을 사랑하는 목사답게 ‘변조은’이라는 한국 이름도 갖고 있었다.
브라운 목사는 설교를 통해서, 이곳 시드니에 100여명의 한국 출신 목회자들이 있는데 한인들을 위한 목회도 좋지만 호주 원주민들을 위한 선교와 봉사활동에 나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200여년 동안 백인들의 지배를 받아오면서 많은 참혹상을 당한 원주민들은 이미 브라운 목사를 포함한 모든 백인들에게 깊은 증오심을 갖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연유로 한인 목회자들에게 원주민 선교를 당부하고 다녔는데 결과는 별무소득이었다. 보다 못한 천보영씨가 내가 해보겠노라고 나선 것이 지난 1992년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선교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온몸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이들에게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다는 생각에서 52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학대 입학을 결심했다. 주변의 만류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본인 스스로도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지만 마음을 추스르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93년에 입학한 장로교신학대학교 생활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공부도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고, 무엇보다 해외에 가족을 남겨두고 불편한 기숙사에서 4년 동안 생활한다는 현실은 깊은 신앙심 이상의 뼈를 깎는 인내심을 요구했다.
몇 차례의 위기 끝에 신학대를 졸업했고 96년 11월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55세였으니 다른 목사들 같으면 서서히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에 스타트 라인에 선 것이다. 그것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호주파송 선교사 제1호가 되어서….
난관은 선교사가 되는 과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 큰 난관이 호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가 되어 맨 처음 찾아간 원주민 마을에서 당한 일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원주민 청년이 깨진 병을 들고 천 선교사의 길을 막아선 것.
나중에 원주민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애보리지니스’라고 불리는 호주 원주민들의 타민족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엄연히 호주 땅의 주인이면서도 전쟁이나 강화조약도 없이 무단으로 점령한 백인들로부터 갖은 박해를 당하고 가족과 수만년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산산이 조각나는 불행을 겪었던 그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분노였다.
천보영 선교사는 깊은 묵상 끝에 그들의 닫힌 마음부터 열어야 선교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서두르지 말고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하자는 것이 그의 기도 제목이 되었다.
원주민들은 경제 선진국의 국민이면서도 변변한 옷가지 하나 없이 낮은 수준의 생활을 하고, 스포츠 스타나 전통 예술인 등이 되는 길밖엔 별다른 희망이 없다는 엄정한 현실이 그들을 고독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지상에서 가장 열등한 종족이라는 왜곡된 차별의식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는 옷가지 등을 수집하여 손질해서 갖다주고 수시로 음식을 장만하여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의 반응은 밋밋했지만 조금씩 변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엔 선교사 부부 두 사람만으로는 부족했다.
오직 원주민 선교만 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수정하여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그의 생각을 전해들은 호주연합교단 소속의 원주민 노회에서 시드니 벨모어에 위치한 원주민 교회를 사용하도록 해주었다. 이 교회는 원주민 교회로 설립되었으나 교회에 출석하는 원주민들이 없어 힌두교 등 다른 종교단체에 세를 주고 있었다.
그는 교회의 이름을 평안교회라고 짓고 교회의 원주민 선교와 봉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대여섯 시간씩 미니버스를 몰고 원주민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본래의 착한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보영 선교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은 천보영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그 먼 곳에서 시드니로 찾아오기도 한다.
이제 천 길 벼랑의 이쪽과 저쪽을 잇는 가교(架橋)가 놓였다. 그 가교를 잇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사랑이었다. 내년이면 예순이 되는 천보영 선교사의 모습이 마치 20대 청년 선교사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그의 가슴에서 진정한 사랑의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온화한 얼굴의 원주민 조안 윌리(46)가 시드니로 돌아오려는 천보영 선교사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우린 너무 오랫동안 철조망에 갇힌 동물들처럼 사람들을 무서워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니마를 찾아오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입니다. ‘뵈영’(보영)은 이제 나니마의 가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