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힘-디지털 LG’ ‘한솔M.com’ ‘내 혈액형은 i’ ‘네이버닷컴’ ‘인터넷쇼핑, 인터넷백화점’ ‘사이버 디지털 디자인 세계로 오십시오’ ‘아날로그 금융시대는 끝났다’. 하루가 다르게 각종 언론매체들이 쏟아놓는 낯설고 생경한 광고카피에 멀미를 느낀다는 30대 후반 직장인 김기훈씨. 그는 요즘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새삼 어릴 적 경험했던 공포를 떠올린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놀이터에는 지구의라 불리는 둥그런 철제 놀이기구가 있었다. 아이들이 철제봉을 잡고 바깥에 매달리면 다른 아이들이 힘껏 기구를 돌리며 놀곤 했다. 한번은 혼자 매달렸는데 세 명의 아이가 지구의를 돌렸고 점점 팔힘이 빠지면서 난 손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 몸이 붕 뜨면서 2~3m쯤 허공을 날아가다 떨어졌고 정신을 잃었다.”
기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결국은 속도감을 견디지 못해 튕겨지고 말았다는 김씨. 요즘 그가 느끼는 공포감도 이와 유사하다.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자신이 ‘디지털 혁명’의 엄청난 속도감을 감당하지 못해 떨어져 나가면 어떻게 하나….
일찌감치 디지털혁명의 조짐을 감지하고 수년 전부터 착실히 준비해온 40대 초반 이재천씨는 인터넷과 관련한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2개월만에 20여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벤처기업 사장이 됐다. 아날로그사회 직장인에서 디지털사회의 사장으로 변신한 그의 성공적인 출발과 진입에 대해 주변에서 찬사를 보낼 때마다 이씨는 아찔한 현기증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한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제 디지털사회는 숙명으로 다가왔다. 변화의 두려움 때문에 기존 사회체제에 안주하려 애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회 부적응자가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로의 의식전환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폭풍처럼 몰아닥친 디지털혁명. 그로 인해 지금 우리 사회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문화가 뚜렷한 대칭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시인이자 문화평론가인 하재봉씨는 “지금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화가 혼재된 양상이지만 불과 몇년 안에 아날로그 문화는 도태될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또 “연속성과 일방통행성을 지닌 아날로그는 효율적 측면에서 더이상 디지털을 따라잡을 수 없다. 반면 종횡무진 불연속성과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하는 디지털은 훨씬 짧은 시간에 다양한 정보와 문화를 쏟아내면서 빠른 속도로 확산-수용되는 특성을 지닌다. 예를 들면 문화수용자가 또다른 문화생산자가 되는 디지털은 문화 평등주의로 가는 분수령이다. 과거와 같은 일방통행성 방식은 조만간 설자리를 잃을 것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화를 좀더 넓은 의미로 확대 해석한다면 지금 우리사회 한 쪽에서 불고 있는 복고바람과 자연으로의 회귀, 선(禪)을 중심으로 한 동양문화 물결은 아날로그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퓨전과 테크노, 인터넷 벤처로 대변되는 문화는 디지털의 기둥을 이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사회의 핵으로 자리한 테헤란밸리는 인터넷과 벤처라는 특유의 새로운 소통코드가 없으면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다. 디지털사회 디지털맨으로서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나누고 얻기 위해 수시로 열리는 벤처파티. 그곳에서 30대 중반의 예비창업자 강인태씨는 톡톡히 소외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쌓은 노하우로 무역업을 구상하고 있다. 인터넷 메커니즘을 모르고선 사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분위기를 살필 겸 벤처파티에 가 봤는데 딴 세상처럼 느껴졌다. 주고받는 대화도 생소하고 사고 자체도 다른 사람들 같았다. 혼자 처진 듯한 막연한 불안감만 안고 돌아왔다.”
최근 새롭게 형성된 ‘퓨전벨트’는 대중적 퓨전문화를 지양하며 독특한 형태로 발전 중이다. 갤러리아백화점 맞은 편 한국주단 뒤쪽 고급 주택가를 끼고 칵테일바, 퓨전음식점, 갤러리 겸 바 등 20여개의 가게가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는 이곳이 일명 ‘퓨전벨트’로 불린다. ZZYZX, 고세, 와사비, 클럽 5번가, 얀, 피네…. 메뉴판도 생소한 조합으로 짜여 있다. ‘헤네시 XO+(퓨전)안주+엘리자베스 아덴 5번가 향수+시가’ ‘와인+시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된 최고급 세팅메뉴는 수십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멋모르고 이곳의 한 바를 찾았다 낭패감을 맛보았다는 30대 후반 홍보전문가 김주연씨. “골목에서부터 외제차 아니면 중대형 국산차 일색이었다. 바 안에서는 주인과 손님 대부분이 서로 친밀한 관계였다. 물론 처음 간 나로선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대화 대부분을 영어로 주고받는 데 기가 질리고 말았다는 김씨. “돈 많은 해외 유학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잠깐 머물렀지만 낯선 문화, 생소한 그들만의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퓨전벨트와 달리 대중적 퓨전스타일로 활기를 띠는 거리가 바로 ‘퓨전존’이다. 도산공원 정문에서 좌우로 난 길을 따라 넓게 형성된 이 지역은 에스테틱숍, 퓨전음식점, 퓨전바, 칵테일바, 주얼리숍, 웨딩숍 등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다. 배타성이 짙은 퓨전벨트와 달리 이곳은 할로윈파티를 비롯해 다양한 이벤트로 퓨전문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을 이어주고 있다.
반면 패션거리로 널리 알려진 로데오거리는 퓨전벨트와 대로 하나를 마주하고 있지만 지난해 말부터 동양풍 물결이 강하게 밀려들고 있다. 이곳 중심에 위치한 패션매장 ‘리리아’에서 만난 안승원실장은 ‘단순’과 ‘심플’로 최근의 흐름을 전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흐름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다양한 아이템의 옷들을 갖추어야 사람들 눈길을 끌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양하고 화려하면 고객들이 혼란스러워 한다. 가능하면 심플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색상도 무채색의 모노 톤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근처에 위치한 ‘전망좋은 방’은 생활소품전문점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 역시 매장 분위기부터 확 달라져 있다. 다소 휑뎅그렁한 느낌을 줄 만큼 간결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것. 검정이나 회색 또는 화이트가 주종을 이루는 가구, 침대, 소파로 꾸며진 쇼룸은 마치 선방에 온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의상이나 생활소품, 인테리어에 불고 있는 동양풍 바람은 지금 일본에서 유행 중인 ‘젠(Zen)스타일’로 통칭된다. 불교의 선(禪)사상이 일본식 표현으로 굳어진 젠스타일은 인위적인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간결함과 절제를 추구하며 자연을 살린 따뜻하고 인간적인 내음을 풍긴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참선과 명상을 위해 선방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한국요가연수원 이태영원장에 따르면 요가와 명상을 위해 수련원을 찾는 연령층이 20대부터 70대까지라고 한다. “저녁시간에는 30~50대 직장인 원생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IMF 이후 한때 원생이 줄었다 최근 들어 다시 많아졌다. 이들은 요가와 명상을 통해 정신적인 엑스터시를 추구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대비되는 문화 공존 현상이 뚜렷이 읽히는 또다른 곳이 바로 서점가다. 교보문고 홍보담당 김정환씨에 따르면 따뜻한 감성 또는 내면을 추구하는 내용의 책과 경제-인터넷 관련 책이 꾸준히 양대 산맥을 이루며 베스트셀러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말부터 노자 바람이 불면서 동양철학, 동양사상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폭증했다. 또 정신세계와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의 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생활패턴이 기술정보화 사회로 급격히 변화하면서 나타나는 반동적 현상인 것 같다. 반면 디지털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인터넷 또는 벤처 관련 책을 많이 찾는 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컴퓨터 인터넷 관련 서적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기감을 느낀 30, 40대가 가장 많이 찾는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혹시 이탈되지 않을까 문득문득 심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40대 초반의 직장인 박상현씨. 그는 마치 ‘자궁 속으로의 회귀’를 꿈꾸듯 가끔씩 미사리 라이브카페를 찾는다. “그곳에 가면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함께 공유했던 추억이 있고 노래가 있고 또래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흘러간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공포도 잠시 잊을 수 있다.”
“인터넷은 대세다. 무조건 뛰어들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사고의 혁신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아날로그와 디지털 어느 쪽을 고수하는지가 성공과 실패, 빈부의 격차를 가른다.”
“지식정보기계화 사회는 빠른 속도로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인터넷이 능사가 아니다.”
분분한 논란이 팽팽한 가운데 어설프게 디지털시대에 동참하려다 고배를 마셨다는 40대 중반의 이종호씨. 그는 8000만원의 퇴직금을 가지고 인터넷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때만 해도 비슷한 나이의 또래에 비해 인터넷을 많이 안다고 자부했던 이씨. “콘텐츠 기획자가 놀이동산, 명품관 등이 있는 가상도시를 만들자고 했을 때 바로 이거다 하고 무릎을 쳤다. 그런데 프로그램 개발비가 30억 정도 들 거라는 말에 손을 들고 말았다. 막상 사업에 뛰어들고 나서야 인터넷에 대해 내가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문화의 대비적 공존 현상은 테끼족과 웹피족, 네오러다이트족 등으로 대칭되는 신인류를 속속 양산하고 있다.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끼를 합성한 신조어인 ‘테끼’. 테끼족은 “21세기 세상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돈다”고 할 만큼 기술정보화시대에 자신의 끼를 맘껏 발휘하면서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웹피족은 웹(Web)과 여피(Yuppie)의 합성어로 인터넷, 정보통신관련 분야에 종사하며 고소득과 풍요로운 여가를 누리는 20, 30대 중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과 달리 네오러다이트족은 기계화 정보화 물결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부류를 지칭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대세인 흐름을 따르려니 숨가쁘고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감이 지금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물과 기름처럼 좀처럼 섞일 것같지 않은 두 문화의 갭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실정이다. 최근 문화-의식의 양극화 현상을 발빠르게 간파한 광고카피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따뜻한 커뮤니티. 인터넷을 따뜻하게 바꿔놓을 사람.’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놀이터에는 지구의라 불리는 둥그런 철제 놀이기구가 있었다. 아이들이 철제봉을 잡고 바깥에 매달리면 다른 아이들이 힘껏 기구를 돌리며 놀곤 했다. 한번은 혼자 매달렸는데 세 명의 아이가 지구의를 돌렸고 점점 팔힘이 빠지면서 난 손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 몸이 붕 뜨면서 2~3m쯤 허공을 날아가다 떨어졌고 정신을 잃었다.”
기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결국은 속도감을 견디지 못해 튕겨지고 말았다는 김씨. 요즘 그가 느끼는 공포감도 이와 유사하다.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자신이 ‘디지털 혁명’의 엄청난 속도감을 감당하지 못해 떨어져 나가면 어떻게 하나….
일찌감치 디지털혁명의 조짐을 감지하고 수년 전부터 착실히 준비해온 40대 초반 이재천씨는 인터넷과 관련한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2개월만에 20여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벤처기업 사장이 됐다. 아날로그사회 직장인에서 디지털사회의 사장으로 변신한 그의 성공적인 출발과 진입에 대해 주변에서 찬사를 보낼 때마다 이씨는 아찔한 현기증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한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제 디지털사회는 숙명으로 다가왔다. 변화의 두려움 때문에 기존 사회체제에 안주하려 애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회 부적응자가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로의 의식전환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폭풍처럼 몰아닥친 디지털혁명. 그로 인해 지금 우리 사회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문화가 뚜렷한 대칭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시인이자 문화평론가인 하재봉씨는 “지금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화가 혼재된 양상이지만 불과 몇년 안에 아날로그 문화는 도태될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또 “연속성과 일방통행성을 지닌 아날로그는 효율적 측면에서 더이상 디지털을 따라잡을 수 없다. 반면 종횡무진 불연속성과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하는 디지털은 훨씬 짧은 시간에 다양한 정보와 문화를 쏟아내면서 빠른 속도로 확산-수용되는 특성을 지닌다. 예를 들면 문화수용자가 또다른 문화생산자가 되는 디지털은 문화 평등주의로 가는 분수령이다. 과거와 같은 일방통행성 방식은 조만간 설자리를 잃을 것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화를 좀더 넓은 의미로 확대 해석한다면 지금 우리사회 한 쪽에서 불고 있는 복고바람과 자연으로의 회귀, 선(禪)을 중심으로 한 동양문화 물결은 아날로그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퓨전과 테크노, 인터넷 벤처로 대변되는 문화는 디지털의 기둥을 이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사회의 핵으로 자리한 테헤란밸리는 인터넷과 벤처라는 특유의 새로운 소통코드가 없으면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다. 디지털사회 디지털맨으로서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나누고 얻기 위해 수시로 열리는 벤처파티. 그곳에서 30대 중반의 예비창업자 강인태씨는 톡톡히 소외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쌓은 노하우로 무역업을 구상하고 있다. 인터넷 메커니즘을 모르고선 사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분위기를 살필 겸 벤처파티에 가 봤는데 딴 세상처럼 느껴졌다. 주고받는 대화도 생소하고 사고 자체도 다른 사람들 같았다. 혼자 처진 듯한 막연한 불안감만 안고 돌아왔다.”
최근 새롭게 형성된 ‘퓨전벨트’는 대중적 퓨전문화를 지양하며 독특한 형태로 발전 중이다. 갤러리아백화점 맞은 편 한국주단 뒤쪽 고급 주택가를 끼고 칵테일바, 퓨전음식점, 갤러리 겸 바 등 20여개의 가게가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는 이곳이 일명 ‘퓨전벨트’로 불린다. ZZYZX, 고세, 와사비, 클럽 5번가, 얀, 피네…. 메뉴판도 생소한 조합으로 짜여 있다. ‘헤네시 XO+(퓨전)안주+엘리자베스 아덴 5번가 향수+시가’ ‘와인+시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된 최고급 세팅메뉴는 수십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멋모르고 이곳의 한 바를 찾았다 낭패감을 맛보았다는 30대 후반 홍보전문가 김주연씨. “골목에서부터 외제차 아니면 중대형 국산차 일색이었다. 바 안에서는 주인과 손님 대부분이 서로 친밀한 관계였다. 물론 처음 간 나로선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대화 대부분을 영어로 주고받는 데 기가 질리고 말았다는 김씨. “돈 많은 해외 유학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잠깐 머물렀지만 낯선 문화, 생소한 그들만의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퓨전벨트와 달리 대중적 퓨전스타일로 활기를 띠는 거리가 바로 ‘퓨전존’이다. 도산공원 정문에서 좌우로 난 길을 따라 넓게 형성된 이 지역은 에스테틱숍, 퓨전음식점, 퓨전바, 칵테일바, 주얼리숍, 웨딩숍 등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다. 배타성이 짙은 퓨전벨트와 달리 이곳은 할로윈파티를 비롯해 다양한 이벤트로 퓨전문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을 이어주고 있다.
반면 패션거리로 널리 알려진 로데오거리는 퓨전벨트와 대로 하나를 마주하고 있지만 지난해 말부터 동양풍 물결이 강하게 밀려들고 있다. 이곳 중심에 위치한 패션매장 ‘리리아’에서 만난 안승원실장은 ‘단순’과 ‘심플’로 최근의 흐름을 전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흐름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다양한 아이템의 옷들을 갖추어야 사람들 눈길을 끌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양하고 화려하면 고객들이 혼란스러워 한다. 가능하면 심플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색상도 무채색의 모노 톤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근처에 위치한 ‘전망좋은 방’은 생활소품전문점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 역시 매장 분위기부터 확 달라져 있다. 다소 휑뎅그렁한 느낌을 줄 만큼 간결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것. 검정이나 회색 또는 화이트가 주종을 이루는 가구, 침대, 소파로 꾸며진 쇼룸은 마치 선방에 온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의상이나 생활소품, 인테리어에 불고 있는 동양풍 바람은 지금 일본에서 유행 중인 ‘젠(Zen)스타일’로 통칭된다. 불교의 선(禪)사상이 일본식 표현으로 굳어진 젠스타일은 인위적인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간결함과 절제를 추구하며 자연을 살린 따뜻하고 인간적인 내음을 풍긴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참선과 명상을 위해 선방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한국요가연수원 이태영원장에 따르면 요가와 명상을 위해 수련원을 찾는 연령층이 20대부터 70대까지라고 한다. “저녁시간에는 30~50대 직장인 원생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IMF 이후 한때 원생이 줄었다 최근 들어 다시 많아졌다. 이들은 요가와 명상을 통해 정신적인 엑스터시를 추구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대비되는 문화 공존 현상이 뚜렷이 읽히는 또다른 곳이 바로 서점가다. 교보문고 홍보담당 김정환씨에 따르면 따뜻한 감성 또는 내면을 추구하는 내용의 책과 경제-인터넷 관련 책이 꾸준히 양대 산맥을 이루며 베스트셀러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말부터 노자 바람이 불면서 동양철학, 동양사상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폭증했다. 또 정신세계와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의 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생활패턴이 기술정보화 사회로 급격히 변화하면서 나타나는 반동적 현상인 것 같다. 반면 디지털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인터넷 또는 벤처 관련 책을 많이 찾는 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컴퓨터 인터넷 관련 서적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기감을 느낀 30, 40대가 가장 많이 찾는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혹시 이탈되지 않을까 문득문득 심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40대 초반의 직장인 박상현씨. 그는 마치 ‘자궁 속으로의 회귀’를 꿈꾸듯 가끔씩 미사리 라이브카페를 찾는다. “그곳에 가면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함께 공유했던 추억이 있고 노래가 있고 또래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흘러간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공포도 잠시 잊을 수 있다.”
“인터넷은 대세다. 무조건 뛰어들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사고의 혁신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아날로그와 디지털 어느 쪽을 고수하는지가 성공과 실패, 빈부의 격차를 가른다.”
“지식정보기계화 사회는 빠른 속도로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인터넷이 능사가 아니다.”
분분한 논란이 팽팽한 가운데 어설프게 디지털시대에 동참하려다 고배를 마셨다는 40대 중반의 이종호씨. 그는 8000만원의 퇴직금을 가지고 인터넷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때만 해도 비슷한 나이의 또래에 비해 인터넷을 많이 안다고 자부했던 이씨. “콘텐츠 기획자가 놀이동산, 명품관 등이 있는 가상도시를 만들자고 했을 때 바로 이거다 하고 무릎을 쳤다. 그런데 프로그램 개발비가 30억 정도 들 거라는 말에 손을 들고 말았다. 막상 사업에 뛰어들고 나서야 인터넷에 대해 내가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문화의 대비적 공존 현상은 테끼족과 웹피족, 네오러다이트족 등으로 대칭되는 신인류를 속속 양산하고 있다.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끼를 합성한 신조어인 ‘테끼’. 테끼족은 “21세기 세상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돈다”고 할 만큼 기술정보화시대에 자신의 끼를 맘껏 발휘하면서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웹피족은 웹(Web)과 여피(Yuppie)의 합성어로 인터넷, 정보통신관련 분야에 종사하며 고소득과 풍요로운 여가를 누리는 20, 30대 중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과 달리 네오러다이트족은 기계화 정보화 물결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부류를 지칭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대세인 흐름을 따르려니 숨가쁘고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감이 지금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물과 기름처럼 좀처럼 섞일 것같지 않은 두 문화의 갭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실정이다. 최근 문화-의식의 양극화 현상을 발빠르게 간파한 광고카피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따뜻한 커뮤니티. 인터넷을 따뜻하게 바꿔놓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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