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법조비리, 심재륜 전 대구고검장의 항명파동, 검찰총장 부인을 향한 옷로비의혹, 진형구 대검공안부장의 파업유도의혹, 김태정 전 법무부장관과 박주선 전 청와대법무비서관의 구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진 법조스캔들이 99년 한해 나라를 휘청거리게 했다. 검찰이 바로 서고 사법부의 위상과 권위를 바로잡아 ‘법치의 기강’을 재건하는 일은 새 세기 가장 시급한 국민적 과제 중 하나가 됐다.
사람들은 이를 위해 다시 처음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법조인양성소인 사법연수원 개혁에서부터 법조 개혁이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면 그것부터 바로잡는 것이 개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수업방식·생활 고3과 비슷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폭탄주’로 망신살 뻗친 한국 검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검 공안부장까지 감옥에 잡아넣은 그 지독한 ‘폭탄주 문화’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사법연수원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연줄 동기의식 등이 시작되는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한 법조인의 얘기다.
사법연수원은 ‘정의감에 불타는 실력있는 법조인’을 사회에 배출해 왔다고 진정으로 자부하는가. 71년 개원한 이래 28년여간 ‘비판의 성역’에 있던 사법연수원을 향해 지금 검사의 추궁 보다 매서운 ‘독설’이 시작됐다.
경상도 시골출신의 A씨(28·고려대졸)는 98년 12월28일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된 뒤 달라진 자신의 ‘신분’을 체감했다고 한다. 고향마을 어귀에 ‘경축 쭛쭛쭛씨의 아들 사시합격-쭛쭛종친회’와 같은 축하현수막이 5개나 걸렸다. 그가 졸업한 초-중-고교에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다음달 그를 위해 열린 ‘마을축하잔치’엔 ‘군수님’까지 와서 그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아직까지 시골에서 사법시험 합격은 옛날의 ‘과거급제’와 동일한 말이다. 합격자수가 늘어 희소성은 예전 같지 않지만 소위 ‘사시 패스’에 대한 ‘범사회적 동경’이 현격히 떨어졌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A씨와 같은 사시합격생들이 ‘진짜 법조인’이 되기 위해 2년(4학기) 동안 ‘집체교육’을 받는 곳이 서울 서초동 1700-1호 소재 사법연수원이다. 그런데 올해 3월 입소해 12월까지 37학점을 이수하고 있는 30기 연수생 694명 사이엔 ‘서초고등학교’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수업방법이나 생활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3 교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12월20일 사법연수원에선 2학기 ‘형사재판실무시험’이 한창이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시험은 진행됐다. 시험도중 도시락을 먹거나 한 사람씩 번갈아 화장실을 가는 이색장면이 연출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수원생들은 시간이 아까워 식사는 그냥 건너뛰었다. 시험은 연수원생들이 A4용지로 200여쪽에 이르는 공판기록과 수사기록을 꼼꼼히 살펴 2명의 피고인에게 ‘특수절도, 변호사법 위반, 도로교통법 위반…’등등의 죄명과 형량을 판결하고 그 이유를 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자칫 죄명이 하나라도 빠지면 석차는 순식간에 수십등씩 내려간다. 시험장은 마치 사법시험을 다시 보는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휩싸였다. 시험에는 ‘이력이 난’ 연수원생들도 “솔직히 보름간 학기시험을 치르고 나면 탈진할 지경”이라고 한다.
사법연수원생들은 연수생활 2년간 오로지 ‘시험’과 ‘석차’밖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연수원 성적이 좋아야 판-검사로 임용될 수 있고, 좋은 보수를 주는 로펌에도 취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연수원의 한 교수는 “사법연수원에서 행복은 성적순”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한 30기 사법연수원생은 연수원생활 1년을 이렇게 토로했다. “낮이나 밤이나 시험에 나올 만한 ‘판례’를 뒤지고 오로지 성적을 잘 받는 데만 골몰하게 됐다. 밖에선 ‘옷로비’로 세상이 떠들썩하다지만 연수원 안에선 아무도 그런 문제로 토론하지 않는다. 복사하다가 혹시 빠진 게 없는지 챙기는 데에 더 관심이 많다.”
사법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만 생각하는 ‘법률기술자의 양산’이 사법연수원의 ‘성적 지상주의’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 법사위 조순형의원(국민회의)은 “법률가는 사회의 최종적 가치기준이며 양심이다. 진실을 밝히고 약자를 보호하는 패기가 요구된다. 그러나 사법연수원만 나오면 이런 의식들이 시들해진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에도 법조론, 법조윤리 등 인성교육을 위한 과목이 있고 시험도 치른다. 그러나 연수원생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한 연수원생은 “이런 과목들은 문제은행방식으로 출제되기 때문에 ‘달달 외기 잘하는’ 연수원생들에게 전혀 변별력이 없고 당연히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은 대신 판사-검사-변호사의 실무교육만큼은 확실히 시킨다고 주장한다. 연수생이 공소장, 판결문, 변론요지서를 직접 작성하고 1년여간 현장체험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론이 있다. 88년부터 91년까지 사법연수원 교수생활을 역임한 바 있는 오병선변호사(고등고시 13회)는 23일 사법연수원의 실무교육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연수원생들은 확정된 사실관계를 제시받은 다음 여기에 관련법을 적용해 판결하는 연습을 한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세상에는 ‘확정된 사실’이란 없다. 모든 재판에서 대립되는 양 측이 제시하는 ‘팩트’는 서로 모순적이다. 말하자면 전제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법적용’이 아니라 판사가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연수원은 이 부분에 대한 교육을 간과하고 있다. 사법시험으로 어느 정도 검증된 ‘논리훈련’만 반복해 연수원생들을 혹사시키고 있다. 이는 또다른 형태의 ‘주입식 교육’이다.” 오변호사의 주장은, 예를 들어 법학도들이 직접 재판 관계인들과 인터뷰하거나 신문하고, 협상도 하며 사실관계를 밝혀 나가는 미국 뉴욕대(NYU)의 실무실습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수료를 앞두고 있는 29기 연수생 590명 중 지난 12월23일 현재 판-검사 임용신청을 한 사람은 219명 정도. 나머지 371명은 본인의 의사야 어쨌든 변호사가 된다. 그러면 사법연수원은 다수를 차지하는 예비변호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만족스런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가. 지난달 연수원생 30기 482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연수원생들은 변호사교육비중이 약하고(61.3%), 강의가 불성실했다(42.2%)고 답했다. 서울지역의 한 변호사는 “변호사사무실에 연수생들이 오면 우선 귀찮아한다. 변호사 실무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이 대법원 산하에 있다 보니 교육의 큰 틀도 판-검사 선발위주다. 변호사로 진출하는 다수 연수생들에겐 2년간의 교육치고는 내용이 빈약하고 시작부터 ‘열등의식’만 심어준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청소년보호위원회의 강지원위원장(95∼97년 사법연수원 교수· 검사)은 현재의 사법연수원교육의 문제점을 ‘성적 지상주의, 실무적 실효성 부족, 법조인의 윤리-가치관 교육 미약, 변호사의 경쟁력확보 실패’로 규정지었다.
그렇다면 교육 외적인 연수원생활은 어떨까. 2학기 시험이 끝난 21일은 사법연수원이 ‘술독’에 빠진 날이었다. 30기 한 반원 60여명은 이날 이 반 전담교수(사법연수원의 교수들은 모두 현직 판-검사들이다) 3명과 함께 1차로 한식집에 갔다. 술잔 돌리는 방법은 ‘법조3륜’을 연상시켰다. 교수 3명이 선착으로 맥주잔에 소주를 넣은 폭탄주를 한잔씩 마신 다음 동시에 연수원생 3명에게 폭탄주를 주는 방법으로 전원에게 술잔이 돌았다. 2차는 조단위로 나눠 부근의 맥주집에서 열렸다. 여기서도 교수가 양주와 맥주로 만든 폭탄주를 먼저 마시면 ‘조장’인 연수원생이 이를 받아 ‘병권’을 쥐고 다른 연수원생들에게 서너 잔씩을 거푸 돌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연수원생들은 독특한 동기의식, 기수의식을 쌓아간다고 한다.
여기에다 사법연수원엔 쭛쭛대 법대 동문회, 쭛쭛고 동문회, 쭛쭛지역 향우회… 등 많은 소모임들이 활발히 열리고 있다. 연수원 기수의식, 학연과 지연에 얽힌 모임 등은 연수원생들이 현직으로 진출한 이후에도 계속 따라 다닌다.
천정규변호사(사시28회)는 사법연수원생으로 있던 지난해 창원지검에서 실무연수를 하면서 피의자에 대한 검찰의 가혹행위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천변호사는 “거의 모든 사법연수원생들은 관행적인 사법기관의 비리나 모순을 알고도 그냥 지나친다”고 말했다. 실습을 담당하는 기관이 연수점수를 매기기 때문이다. 연수생들은 이렇듯 연수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순치’돼 간다고 법률소비자연맹 홍금애이사는 말한다. 한국 법조3륜간의 투명하지 못한 로비, 판-검사 인사 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학연-지연설, 연수원 기수에 따라 종적으로 그어진 인간관계와 여기서 비롯된 전관예우, 자정노력의 부족 등 지금까지 표출된 한국사법기관의 어두운 모습들은 결국 사법연수원 생활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법관 20년 경력의 서울지역 한 변호사는 지금도 연수원 동기-선후배와의 인간관계가 의뢰인을 유치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털어놓았다. “사건의 담당판사가 정해지지 않은 고소인의 경우, 변호사를 고를 때 실력과 신뢰도를 많이 본다. 그러나 사건담당 판사와 검사가 누구인지 미리 알게 되는 피고소인은 사정이 다르다. 연수원동기관계 등 판-검사와의 인간적 친밀도가 변호사선택의 제1 척도가 된다”는 것이 이 변호사의 얘기다.
대통령자문기구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12월22일 밝힌 ‘사법개혁최종안’은 사법연수원 대신 ‘한국사법대학원’을 신설하도록 하고 있다. 사법연수원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사법연수원이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데는 학계, 시민단체, 법조계, 정치권, 심지어는 연수원조차 이의가 없다. 그러나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선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법대학원에서 2년수료 후 직역별로 1년간 실무교육을 따로 하자는 것이다.”(김학근 사법개혁추진위 간사·사시23회) “사법대학원은 본질적으로 사법연수원에서 이름만 바꾼 것이다. 법조계의 고질적 비리를 막기 위해선 사법연수원이나 이와 유사한 기관은 아예 없애고 로스쿨(Law-school)로 가야 한다.” (조순형의원, 법률소비자연맹) “이론중심육의 로스쿨제는 한국법조계의 실무대처능력을 약화시키므로 절대 안된다. 대신 사법기관 비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 법조인들의 윤리는 확립된다.” (오병선변호사) “사법시험 합격자에 대해 사법연수원과 같은 집체교육은 폐지하고 합격자가 개별기관에서 독자적으로 실무수습을 받은 뒤 변호사 자격을 얻도록 하자.”(김제완 성신여대 법대교수) “사시합격생 1000명 시대엔 사법연수원교육은 1년 정도로 줄여 기본적 소양교육만 담당하고 실무교육은 현직기관에 완전히 맡기는 것이 좋다.”(이성보 사법연수원 기획교수) “변호사 시장개방을 앞두고 있다. 국가간 외교통상 관계에서도 유능한 변호사가 국익을 더 잘 보호한다. 사법연수원의 고리타분한 성적중심 교육으론 안된다. 변호사의 특화된 능력과 국제경쟁력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예비법조인 양성교육이 바뀌어야 한다.”(한 30기 사법연수원생)
사법연수원과 사법연수원생은 ‘법치국가 한국’을 선두에서 이끌어 나갈 집단이다. 이들에 대한 개혁이 막 닻이 올랐다. 지금이 바로 우리 사회가 예비법조인들에게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되짚어 볼 시점인지 모른다.
81년 10월 확정된 사법연수원 원훈은 ‘꾸준한 수련, 바른 법조인’이다. 바른 법조인상은 88년 10대 대법원장 취임사에서 제시됐다. ‘국민은 여러분의 양심을 믿습니다. 사회는 여러분의 용기를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여러분의 지혜를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위해 다시 처음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법조인양성소인 사법연수원 개혁에서부터 법조 개혁이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면 그것부터 바로잡는 것이 개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수업방식·생활 고3과 비슷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폭탄주’로 망신살 뻗친 한국 검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검 공안부장까지 감옥에 잡아넣은 그 지독한 ‘폭탄주 문화’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사법연수원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연줄 동기의식 등이 시작되는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한 법조인의 얘기다.
사법연수원은 ‘정의감에 불타는 실력있는 법조인’을 사회에 배출해 왔다고 진정으로 자부하는가. 71년 개원한 이래 28년여간 ‘비판의 성역’에 있던 사법연수원을 향해 지금 검사의 추궁 보다 매서운 ‘독설’이 시작됐다.
경상도 시골출신의 A씨(28·고려대졸)는 98년 12월28일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된 뒤 달라진 자신의 ‘신분’을 체감했다고 한다. 고향마을 어귀에 ‘경축 쭛쭛쭛씨의 아들 사시합격-쭛쭛종친회’와 같은 축하현수막이 5개나 걸렸다. 그가 졸업한 초-중-고교에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다음달 그를 위해 열린 ‘마을축하잔치’엔 ‘군수님’까지 와서 그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아직까지 시골에서 사법시험 합격은 옛날의 ‘과거급제’와 동일한 말이다. 합격자수가 늘어 희소성은 예전 같지 않지만 소위 ‘사시 패스’에 대한 ‘범사회적 동경’이 현격히 떨어졌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A씨와 같은 사시합격생들이 ‘진짜 법조인’이 되기 위해 2년(4학기) 동안 ‘집체교육’을 받는 곳이 서울 서초동 1700-1호 소재 사법연수원이다. 그런데 올해 3월 입소해 12월까지 37학점을 이수하고 있는 30기 연수생 694명 사이엔 ‘서초고등학교’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수업방법이나 생활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3 교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12월20일 사법연수원에선 2학기 ‘형사재판실무시험’이 한창이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시험은 진행됐다. 시험도중 도시락을 먹거나 한 사람씩 번갈아 화장실을 가는 이색장면이 연출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수원생들은 시간이 아까워 식사는 그냥 건너뛰었다. 시험은 연수원생들이 A4용지로 200여쪽에 이르는 공판기록과 수사기록을 꼼꼼히 살펴 2명의 피고인에게 ‘특수절도, 변호사법 위반, 도로교통법 위반…’등등의 죄명과 형량을 판결하고 그 이유를 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자칫 죄명이 하나라도 빠지면 석차는 순식간에 수십등씩 내려간다. 시험장은 마치 사법시험을 다시 보는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휩싸였다. 시험에는 ‘이력이 난’ 연수원생들도 “솔직히 보름간 학기시험을 치르고 나면 탈진할 지경”이라고 한다.
사법연수원생들은 연수생활 2년간 오로지 ‘시험’과 ‘석차’밖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연수원 성적이 좋아야 판-검사로 임용될 수 있고, 좋은 보수를 주는 로펌에도 취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연수원의 한 교수는 “사법연수원에서 행복은 성적순”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한 30기 사법연수원생은 연수원생활 1년을 이렇게 토로했다. “낮이나 밤이나 시험에 나올 만한 ‘판례’를 뒤지고 오로지 성적을 잘 받는 데만 골몰하게 됐다. 밖에선 ‘옷로비’로 세상이 떠들썩하다지만 연수원 안에선 아무도 그런 문제로 토론하지 않는다. 복사하다가 혹시 빠진 게 없는지 챙기는 데에 더 관심이 많다.”
사법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만 생각하는 ‘법률기술자의 양산’이 사법연수원의 ‘성적 지상주의’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 법사위 조순형의원(국민회의)은 “법률가는 사회의 최종적 가치기준이며 양심이다. 진실을 밝히고 약자를 보호하는 패기가 요구된다. 그러나 사법연수원만 나오면 이런 의식들이 시들해진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에도 법조론, 법조윤리 등 인성교육을 위한 과목이 있고 시험도 치른다. 그러나 연수원생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한 연수원생은 “이런 과목들은 문제은행방식으로 출제되기 때문에 ‘달달 외기 잘하는’ 연수원생들에게 전혀 변별력이 없고 당연히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은 대신 판사-검사-변호사의 실무교육만큼은 확실히 시킨다고 주장한다. 연수생이 공소장, 판결문, 변론요지서를 직접 작성하고 1년여간 현장체험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론이 있다. 88년부터 91년까지 사법연수원 교수생활을 역임한 바 있는 오병선변호사(고등고시 13회)는 23일 사법연수원의 실무교육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연수원생들은 확정된 사실관계를 제시받은 다음 여기에 관련법을 적용해 판결하는 연습을 한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세상에는 ‘확정된 사실’이란 없다. 모든 재판에서 대립되는 양 측이 제시하는 ‘팩트’는 서로 모순적이다. 말하자면 전제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법적용’이 아니라 판사가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연수원은 이 부분에 대한 교육을 간과하고 있다. 사법시험으로 어느 정도 검증된 ‘논리훈련’만 반복해 연수원생들을 혹사시키고 있다. 이는 또다른 형태의 ‘주입식 교육’이다.” 오변호사의 주장은, 예를 들어 법학도들이 직접 재판 관계인들과 인터뷰하거나 신문하고, 협상도 하며 사실관계를 밝혀 나가는 미국 뉴욕대(NYU)의 실무실습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수료를 앞두고 있는 29기 연수생 590명 중 지난 12월23일 현재 판-검사 임용신청을 한 사람은 219명 정도. 나머지 371명은 본인의 의사야 어쨌든 변호사가 된다. 그러면 사법연수원은 다수를 차지하는 예비변호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만족스런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가. 지난달 연수원생 30기 482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연수원생들은 변호사교육비중이 약하고(61.3%), 강의가 불성실했다(42.2%)고 답했다. 서울지역의 한 변호사는 “변호사사무실에 연수생들이 오면 우선 귀찮아한다. 변호사 실무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이 대법원 산하에 있다 보니 교육의 큰 틀도 판-검사 선발위주다. 변호사로 진출하는 다수 연수생들에겐 2년간의 교육치고는 내용이 빈약하고 시작부터 ‘열등의식’만 심어준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청소년보호위원회의 강지원위원장(95∼97년 사법연수원 교수· 검사)은 현재의 사법연수원교육의 문제점을 ‘성적 지상주의, 실무적 실효성 부족, 법조인의 윤리-가치관 교육 미약, 변호사의 경쟁력확보 실패’로 규정지었다.
그렇다면 교육 외적인 연수원생활은 어떨까. 2학기 시험이 끝난 21일은 사법연수원이 ‘술독’에 빠진 날이었다. 30기 한 반원 60여명은 이날 이 반 전담교수(사법연수원의 교수들은 모두 현직 판-검사들이다) 3명과 함께 1차로 한식집에 갔다. 술잔 돌리는 방법은 ‘법조3륜’을 연상시켰다. 교수 3명이 선착으로 맥주잔에 소주를 넣은 폭탄주를 한잔씩 마신 다음 동시에 연수원생 3명에게 폭탄주를 주는 방법으로 전원에게 술잔이 돌았다. 2차는 조단위로 나눠 부근의 맥주집에서 열렸다. 여기서도 교수가 양주와 맥주로 만든 폭탄주를 먼저 마시면 ‘조장’인 연수원생이 이를 받아 ‘병권’을 쥐고 다른 연수원생들에게 서너 잔씩을 거푸 돌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연수원생들은 독특한 동기의식, 기수의식을 쌓아간다고 한다.
여기에다 사법연수원엔 쭛쭛대 법대 동문회, 쭛쭛고 동문회, 쭛쭛지역 향우회… 등 많은 소모임들이 활발히 열리고 있다. 연수원 기수의식, 학연과 지연에 얽힌 모임 등은 연수원생들이 현직으로 진출한 이후에도 계속 따라 다닌다.
천정규변호사(사시28회)는 사법연수원생으로 있던 지난해 창원지검에서 실무연수를 하면서 피의자에 대한 검찰의 가혹행위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천변호사는 “거의 모든 사법연수원생들은 관행적인 사법기관의 비리나 모순을 알고도 그냥 지나친다”고 말했다. 실습을 담당하는 기관이 연수점수를 매기기 때문이다. 연수생들은 이렇듯 연수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순치’돼 간다고 법률소비자연맹 홍금애이사는 말한다. 한국 법조3륜간의 투명하지 못한 로비, 판-검사 인사 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학연-지연설, 연수원 기수에 따라 종적으로 그어진 인간관계와 여기서 비롯된 전관예우, 자정노력의 부족 등 지금까지 표출된 한국사법기관의 어두운 모습들은 결국 사법연수원 생활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법관 20년 경력의 서울지역 한 변호사는 지금도 연수원 동기-선후배와의 인간관계가 의뢰인을 유치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털어놓았다. “사건의 담당판사가 정해지지 않은 고소인의 경우, 변호사를 고를 때 실력과 신뢰도를 많이 본다. 그러나 사건담당 판사와 검사가 누구인지 미리 알게 되는 피고소인은 사정이 다르다. 연수원동기관계 등 판-검사와의 인간적 친밀도가 변호사선택의 제1 척도가 된다”는 것이 이 변호사의 얘기다.
대통령자문기구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12월22일 밝힌 ‘사법개혁최종안’은 사법연수원 대신 ‘한국사법대학원’을 신설하도록 하고 있다. 사법연수원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사법연수원이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데는 학계, 시민단체, 법조계, 정치권, 심지어는 연수원조차 이의가 없다. 그러나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선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법대학원에서 2년수료 후 직역별로 1년간 실무교육을 따로 하자는 것이다.”(김학근 사법개혁추진위 간사·사시23회) “사법대학원은 본질적으로 사법연수원에서 이름만 바꾼 것이다. 법조계의 고질적 비리를 막기 위해선 사법연수원이나 이와 유사한 기관은 아예 없애고 로스쿨(Law-school)로 가야 한다.” (조순형의원, 법률소비자연맹) “이론중심육의 로스쿨제는 한국법조계의 실무대처능력을 약화시키므로 절대 안된다. 대신 사법기관 비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 법조인들의 윤리는 확립된다.” (오병선변호사) “사법시험 합격자에 대해 사법연수원과 같은 집체교육은 폐지하고 합격자가 개별기관에서 독자적으로 실무수습을 받은 뒤 변호사 자격을 얻도록 하자.”(김제완 성신여대 법대교수) “사시합격생 1000명 시대엔 사법연수원교육은 1년 정도로 줄여 기본적 소양교육만 담당하고 실무교육은 현직기관에 완전히 맡기는 것이 좋다.”(이성보 사법연수원 기획교수) “변호사 시장개방을 앞두고 있다. 국가간 외교통상 관계에서도 유능한 변호사가 국익을 더 잘 보호한다. 사법연수원의 고리타분한 성적중심 교육으론 안된다. 변호사의 특화된 능력과 국제경쟁력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예비법조인 양성교육이 바뀌어야 한다.”(한 30기 사법연수원생)
사법연수원과 사법연수원생은 ‘법치국가 한국’을 선두에서 이끌어 나갈 집단이다. 이들에 대한 개혁이 막 닻이 올랐다. 지금이 바로 우리 사회가 예비법조인들에게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되짚어 볼 시점인지 모른다.
81년 10월 확정된 사법연수원 원훈은 ‘꾸준한 수련, 바른 법조인’이다. 바른 법조인상은 88년 10대 대법원장 취임사에서 제시됐다. ‘국민은 여러분의 양심을 믿습니다. 사회는 여러분의 용기를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여러분의 지혜를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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