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마디, 혹은 세월의 굽이에서, 사람들은 예외 없이 회고와 전망의 유혹에 빠진다. 갑자기 ‘철학관‘이 붐비고, ‘신 내림‘을 받은 이들에 대한 기대 심리가 맹렬히 발동한다. 그것은 마치 홍역과도 같고, 봄(혹은 가을)이면 찾아오는 계절병과도 같다. 하물며 올해가 ‘대망의‘ 2000을 앞둔 1999년임에랴!
2000년, 혹은 2001년. 그때의 기술흐름, 특히 인터넷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와 현재의 흐름을 수평적으로 외삽(外揷)하는 방식의 미래 예측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실상 과거에도 그러한 예측이 들어맞은 적은 별로 없다). 예컨대, 오늘날의 컴퓨터 산업계를 이끄는 기업 중 하나로 꼽히는 IBM의 창업자 토머스 왓슨이 1950년대 초에 했던 전망을 보자. 그는 단지 서너 대의 컴퓨터만으로도 선진국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서너 대라고?
지금 전세계에 있는 컴퓨터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컴퓨터 장치들까지 포함할 경우 10억개를 족히 넘는다.(애드리언 베리 지음, ‘500년 후의 미래‘ 중에서). 하긴 당시 컴퓨터의 ‘두뇌‘가 오늘날과 같은 극소형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아니라 진공관이었고, 그 크기만도 길이 30m, 높이 3m, 깊이 1m나 되는 ‘전선과 진공관들로 이루어진 공룡‘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오판(誤判)이다. 당시의 컴퓨터-존 폰 노이만이 만든 애니악(ENIAC)의 경우-는 1만 8000개의 진공관뿐 아니라 1500개의 연결선, 7만개의 저항기, 1만개의 축적기, 6000개의 토글스위치(손잡이가 위아래고 작동하는 스위치) 등을 포함해 10만개가 넘는 부속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새로운 문제를 풀려면 모든 스위치를 재조정하고 한 번에 하나씩 모든 전선을 다시 꽂아야 했으며, 작동 스위치를 켜면 온 마을의 전깃불이 흐려질 정도로 많은 전력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오판의 사례가 또다른 예측과 전망의 시도를 가로막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날-그래서 미래(未來)다-을 미리 알고자 하는 욕구는 거의 생래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예측이 아무리 부정확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에대해 흥미와 흥분을 느낀다.
이른바 ‘편재(偏在)컴퓨팅‘(Ubiquitous Computing)이다. 다시 말해 전세계 어느 곳에서든 연결되는 컴퓨터 생활이 이뤄진다는 말이다. 20세기 말의 자본주의 시장은 네트워크 인프라의 완벽한 구축이야말로 노다지의 기본 바탕임을 절감하고 있다. 수많은 자본가와 기업들은 무선이든 구리선이든, 혹은 광섬유 케이블이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전세계를 좀더 촘촘히 연결하고 싶어한다. 연결망으로부터 비즈니스가 나오고,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니만 모든 나라들에서 이처럼 유선(有線)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나 몽골, 아프리카 나라들은 인공위성 등을 이용한 ‘무선‘네트워크가 더 유리할 것이다.
미래는 다운로드가 아닌 ‘흐름‘
여기에서 ‘흐름‘은 ‘동시성‘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리얼플레이어나 윈도즈 미디어 플레이어를 생각하면 더 이해하기 쉽다. 몇 MB씩이나 되는 파일을 모두 다운로드 받은 뒤 이를 실행하는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해당 파일이나 사이트를 클릭하는 순간 파일이 ‘흐르면서‘ 소리나 동영상이 서비스되는 방식, 이른바 ‘스트리밍‘Streaming)미디어다.
모든 비용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디지털 경제의 문법은 현실 경제의 그것과 반대다. 현실 경제가 유한한 공급에 의해 제한받았다면, 디지털 경제에서는 유한한 수요에 의해 고통받는다. 다시 말해 수요자는 한정돼 있는 데 반해, 상품(정보)를 공급하려는 기업이나 채널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말 그대로 무한경쟁이다. 이는 무한 증식과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의 특성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예컨대 ‘뉴욕타임스‘가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자사의 뉴스나 정보를 유료화했다고 하자. 어떻게 될까? 순순히 돈을 낼까? 아니다. 거의 모든 네티즌들이 발길을 끊을 것이다. 왜? ‘뉴욕타임스‘ 웹사이트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뉴스와 정보를 공급하는 사이트는 인터넷에 미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이다.
미세한 것이 아름답다
미래의 기술과 인터넷은 적어도 두 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축소시킬 것이다. 하나는 ‘거리의 소멸‘을 통해서, 또 하나는 더욱 더 작은 장비를 통해서. 분자 정도가 아니라 원자의 수준에서 물질의 변형과 조합을 시도하는 나노기술(Nanotechnology)은 우리가 지금 쓰는 여러 장비와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물질을 극단적일 만큼 미세한 크기로 줄여놓을 것이다(‘나노‘는 ‘10억분의 1‘의 뜻). 입는 컴퓨터나 (머리나 얼굴에)쓰는 컴퓨터를 넘어 눈동자나 귓속, 심지어 두뇌 속에 이식하는 컴퓨터가 일반화할지도 모른다
창의적인 표현의 르네상스가 온다
테크놀로지가 20세기 말에 끼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음악이나 영화, 책 같은 ‘예술‘ 장르를 디지털 신호로 바꿔 배달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그 효과는 비단 우리가 대중음악을 감상하는 방식의 변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의 불멸성을 실현했다. 얼마 전까지도 적당한 관객이나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예술작품은 속절없이 사형 선고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디지털화하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을 갖는다. 역시 무한대에 가까운 유통망(네트워크) 덕택이다.
물론 예술의 디지털화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이 디지털 신호를 암호화해 적절한 비용을 낸 사람에게만 해당 예술 작품을 보여주거나 들려줄 경우, 또다른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정보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간의 갈등. 빛에는 늘 그늘이 따르게 마련이다.
2000년, 혹은 2001년. 그때의 기술흐름, 특히 인터넷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와 현재의 흐름을 수평적으로 외삽(外揷)하는 방식의 미래 예측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실상 과거에도 그러한 예측이 들어맞은 적은 별로 없다). 예컨대, 오늘날의 컴퓨터 산업계를 이끄는 기업 중 하나로 꼽히는 IBM의 창업자 토머스 왓슨이 1950년대 초에 했던 전망을 보자. 그는 단지 서너 대의 컴퓨터만으로도 선진국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서너 대라고?
지금 전세계에 있는 컴퓨터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컴퓨터 장치들까지 포함할 경우 10억개를 족히 넘는다.(애드리언 베리 지음, ‘500년 후의 미래‘ 중에서). 하긴 당시 컴퓨터의 ‘두뇌‘가 오늘날과 같은 극소형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아니라 진공관이었고, 그 크기만도 길이 30m, 높이 3m, 깊이 1m나 되는 ‘전선과 진공관들로 이루어진 공룡‘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오판(誤判)이다. 당시의 컴퓨터-존 폰 노이만이 만든 애니악(ENIAC)의 경우-는 1만 8000개의 진공관뿐 아니라 1500개의 연결선, 7만개의 저항기, 1만개의 축적기, 6000개의 토글스위치(손잡이가 위아래고 작동하는 스위치) 등을 포함해 10만개가 넘는 부속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새로운 문제를 풀려면 모든 스위치를 재조정하고 한 번에 하나씩 모든 전선을 다시 꽂아야 했으며, 작동 스위치를 켜면 온 마을의 전깃불이 흐려질 정도로 많은 전력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오판의 사례가 또다른 예측과 전망의 시도를 가로막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날-그래서 미래(未來)다-을 미리 알고자 하는 욕구는 거의 생래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예측이 아무리 부정확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에대해 흥미와 흥분을 느낀다.
이른바 ‘편재(偏在)컴퓨팅‘(Ubiquitous Computing)이다. 다시 말해 전세계 어느 곳에서든 연결되는 컴퓨터 생활이 이뤄진다는 말이다. 20세기 말의 자본주의 시장은 네트워크 인프라의 완벽한 구축이야말로 노다지의 기본 바탕임을 절감하고 있다. 수많은 자본가와 기업들은 무선이든 구리선이든, 혹은 광섬유 케이블이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전세계를 좀더 촘촘히 연결하고 싶어한다. 연결망으로부터 비즈니스가 나오고,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니만 모든 나라들에서 이처럼 유선(有線)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나 몽골, 아프리카 나라들은 인공위성 등을 이용한 ‘무선‘네트워크가 더 유리할 것이다.
미래는 다운로드가 아닌 ‘흐름‘
여기에서 ‘흐름‘은 ‘동시성‘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리얼플레이어나 윈도즈 미디어 플레이어를 생각하면 더 이해하기 쉽다. 몇 MB씩이나 되는 파일을 모두 다운로드 받은 뒤 이를 실행하는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해당 파일이나 사이트를 클릭하는 순간 파일이 ‘흐르면서‘ 소리나 동영상이 서비스되는 방식, 이른바 ‘스트리밍‘Streaming)미디어다.
모든 비용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디지털 경제의 문법은 현실 경제의 그것과 반대다. 현실 경제가 유한한 공급에 의해 제한받았다면, 디지털 경제에서는 유한한 수요에 의해 고통받는다. 다시 말해 수요자는 한정돼 있는 데 반해, 상품(정보)를 공급하려는 기업이나 채널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말 그대로 무한경쟁이다. 이는 무한 증식과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의 특성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예컨대 ‘뉴욕타임스‘가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자사의 뉴스나 정보를 유료화했다고 하자. 어떻게 될까? 순순히 돈을 낼까? 아니다. 거의 모든 네티즌들이 발길을 끊을 것이다. 왜? ‘뉴욕타임스‘ 웹사이트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뉴스와 정보를 공급하는 사이트는 인터넷에 미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이다.
미세한 것이 아름답다
미래의 기술과 인터넷은 적어도 두 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축소시킬 것이다. 하나는 ‘거리의 소멸‘을 통해서, 또 하나는 더욱 더 작은 장비를 통해서. 분자 정도가 아니라 원자의 수준에서 물질의 변형과 조합을 시도하는 나노기술(Nanotechnology)은 우리가 지금 쓰는 여러 장비와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물질을 극단적일 만큼 미세한 크기로 줄여놓을 것이다(‘나노‘는 ‘10억분의 1‘의 뜻). 입는 컴퓨터나 (머리나 얼굴에)쓰는 컴퓨터를 넘어 눈동자나 귓속, 심지어 두뇌 속에 이식하는 컴퓨터가 일반화할지도 모른다
창의적인 표현의 르네상스가 온다
테크놀로지가 20세기 말에 끼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음악이나 영화, 책 같은 ‘예술‘ 장르를 디지털 신호로 바꿔 배달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그 효과는 비단 우리가 대중음악을 감상하는 방식의 변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의 불멸성을 실현했다. 얼마 전까지도 적당한 관객이나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예술작품은 속절없이 사형 선고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디지털화하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을 갖는다. 역시 무한대에 가까운 유통망(네트워크) 덕택이다.
물론 예술의 디지털화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이 디지털 신호를 암호화해 적절한 비용을 낸 사람에게만 해당 예술 작품을 보여주거나 들려줄 경우, 또다른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정보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간의 갈등. 빛에는 늘 그늘이 따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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