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9일(이하 현지 시간) 이란 테헤란에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화폐가치 44분의 1로 추락
상점 수가 2만여 개에 이르는 이곳에서 장사하는 바자리(상인)는 4만여 명이나 된다. 이들은 1979년 이슬람 혁명 때 팔레비 왕정에 반대해 아야톨라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가 이끌던 혁명 세력에 지지와 자금을 보내는 등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팔레비 왕정이 서구식 백화점 도입을 강행하자 생존권에 위협을 느낀 바자리들은 “샤(왕)에게 죽음을” 등 ‘왕정 타도’ 뜻이 담긴 구호를 외치며 반대 시위에 앞장서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출범과 신정체제 탄생에 기여했다.그랜드 바자르의 바자리들이 47년 전과 정반대로 최근 “하메네이(이란 최고지도자)에게 죽음을”을 외치며 반정부 시위 사태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 사태는 지난해 12월 28일(이하 현지 시간) 바자리들이 그랜드 바자르에 있는 상점 셔터를 내리고 동맹 휴업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이란 통화 리알의 가치 폭락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각종 상품 가격이 치솟자 더는 장사를 할 수 없다며 상점 문을 닫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란에는 “바자르 상점들이 철시하면 정치적 격동이 벌어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바자리들이 민심의 바로미터 역할을 해왔다. 이슬람 혁명 때도 테헤란 그랜드 바자르에서 바자리들의 휴업과 시위가 왕정 붕괴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바자리는 대부분 정치와 거리를 두었고, 경제 활동을 위해 사회적 안정을 선호한다. 그럼에도 바자리들이 앞장서 이슬람 정권에 반기를 든 것은 이란 경제난으로 국민의 사회적 불만이 폭발 직전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테헤란에 있는 바자르가 상인 주도의 반정부 시위로 1월 6일 문이 닫혀 있다. 뉴시스
전쟁, 은행 파산, 가뭄… 겹악재에 신음
결국 테헤란 그랜드 바자르에서 시작된 바자리들 시위는 전국 각 지역 바자르로 확산했고, 대학생 등 젊은 층과 노조원들이 동참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 비율을 20%로 동결하고 세금을 62% 인상하는 등 긴축 예산을 내놓자 이란 국민의 쌓였던 분노가 폭발했다바자리들이 신정체제에 등을 돌린 이유는 무엇보다 리알화 폭락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28일 바자리들이 철시할 당시 환율은 달러당 147만 리알까지 치솟아 화폐가치가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다. 2015년 이란과 미국 등 서방 간 핵합의가 타결됐을 때 환율이 달러당 3만2000리알이던 것에 비하면 10년 만에 화폐가치가 44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한 셈이다. 이란 정부는 2018년부터 환율을 달러당 4만2000리알로 고정한 바 있다. 이후 이란 정부가 2022년 고정환율제를 폐지하면서 환율은 달러당 28만5000리알이 됐다. 3년 만에 환율이 5분의 1 수준으로 급락한 것이다. 리알화 가치가 이처럼 폭락하자 수입 물가는 급등했고, 생필품 등 모든 상품 가격이 일제히 뛰었다. 이란의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42.2% 상승했으며, 특히 유제품·음료·빵 등 식료품 가격이 전년 동기보다 72% 폭등했다. 물가 급등으로 소비가 크게 위축되자 바자리들은 더는 상점 문을 열 수 없었다.
리알화가 폭락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이란이 지난해 6월 이스라엘과 벌인 ‘12일 전쟁’에서의 패배와 미국의 이란 핵시설 공습을 들 수 있다. 당시 이란은 미사일 등 군사기지와 핵시설은 물론, 전력 공급망 등 각종 인프라가 파괴돼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이란 정권은 미사일 기지와 핵시설 복구에만 몰두하고 민생을 외면했다.
미국 등 서방 제재로 석유 판매 수입이 크게 줄어든 것도 이란의 경제위기를 부채질했다. 게다가 국제유가가 지난해 말부터 배럴당 50달러대로 떨어진 가운데 이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훨씬 싼 가격에 석유를 판매하면서 석유 수출 손실이 크게 늘었다. 프랑스 유로뉴스는 “이란이 지난해 벌어들인 석유 수출 금액은 232억 달러(약 34조 원) 정도로 집계되는데, 대부분 미국의 제재를 피해 중국으로 수출한 것”이라며 “이란은 싼 가격에 석유를 팔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란의 석유 수출은 국내총생산(GDP)에서 18%를 차지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은 신정체제를 떠받드는 성직자와 군부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또 대형 민간 은행 아얀데의 파산도 경제난을 악화했다. 아얀데 은행은 이란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 알리 안사리가 2013년 설립했다. 안사리는 혁명수비대의 자금 조달을 도운 부패한 은행가로 악명이 높았다. 아얀데 은행은 이란 은행 가운데 가장 높은 금리를 제시하며 수백만 명의 예금을 유치했고, 중앙은행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차입했다. 중앙은행은 은행 파산을 막으려고 통화를 발행해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다. 아얀데 은행은 50억 달러(약 7조350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부실채권을 안고 있었고, 결국 파산으로 이어졌다.

반정부 시위 전, 늘 사람들로 붐볐던 테헤란에 있는 바자르. 뉴시스
기득권 부패가 분노 불러
이란 정부는 지난해 말 아얀데 은행 부채를 떠안고 최대 국영은행 멜리 은행과 강제로 합병시켰다. 아드난 마자레이 전 국제통화기금(IMF) 중동 담당 부국장은 “아얀데 은행은 이란 정권 유력 인사들과 연줄이 튼튼한 곳이었다”고 지적했다. 이 은행 외에 다른 5개 은행도 파산 일보 직전 상태에 있다. 중앙은행은 부실 대출에 따른 파산을 막고자 돈을 마구 찍어냈으며, 이 탓에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고 리알화 가치가 폭락했다. ‘60년 만에 최악의 가뭄’으로 불리는 물 부족 사태도 이란 국민을 고통에 빠뜨렸다. 지난해 11월까지 이란 강수량은 평년 대비 81% 감소했으며, 테헤란에 물을 공급하는 5개 주요 댐의 평균 저수량은 10%로 떨어졌다. 이 때문에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수도 이전까지 검토해야 했다.가장 중요한 점은 신정체제를 수호해야 할 혁명수비대가 경제까지 좌지우지하면서 각종 부정부패를 저질러왔다는 것이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독자적인 석유 판매권을 갖는 등 전체 경제의 3분의 1을 장악하고 있다. 또 연간 수익이 수억 달러에 달하는 100여 개 기업을 보유 중인 데다, 정부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았고 통신, 금융, 부동산 등 다양한 산업에도 진출해 이권을 챙겨왔다.
이란의 반정부 시위 사태는 1월 16일부터 혁명수비대와 바시즈 민병대 등의 강경 유혈 진압으로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지난 3주간 시위로 1979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 희생자가 발생했다. 서방 언론은 이번 시위 사태로 발생한 사망자가 최소 5000명이며, 1만6500∼1만8000명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서방 언론은 테헤란 도심 곳곳에 군경이 대거 배치됐으며, 평소 인파와 차량으로 붐비던 거리가 텅 비었고, 마치 계엄령이 내려진 것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위를 촉발한 경제난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만큼 불씨는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는 1월 17일 공개 연설을 통해 반정부 시위로 발생한 사망자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책임으로 돌렸다. 뉴시스
신정체제 붕괴 신호탄 될까
현재 이란은 전체 인구(약 9000만 명)의 37%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공식적인 청년 실업률은 23%지만, 이 통계는 현실과 한참 거리가 멀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이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778달러(약 850만 원)로 2015년 이후 연평균 0.6%씩 감소했다. 옛 왕정의 마지막 왕세자였던 레자 팔레비는 1월 16일 미국 워싱턴DC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란은 지금쯤 중동의 한국이 돼야 했다”며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 이란 GDP는 한국의 5배였지만 지금 우리는 북한이 돼버렸다”고 한탄했다. 팔레비 전 왕세자는 “이란은 인적 자원이나 자연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돌보지 않고, 국가와 자원을 착취하며, 국민을 빈곤에 빠뜨리고, 극단적인 테러 그룹과 지역 안팎의 대리 세력에 자금을 지원하는 신정체제라는 정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이란의 원유 매장량은 세계 4위, 천연가스는 세계 2위를 자랑한다. 에너지 대국이지만 국민은 공산주의보다 더 가혹한 신정체제 탓에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는 반정부 시위로 수천 명이 사망한 것을 인정하면서 그 책임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충성 세력이던 바자리들의 봉기는 앞으로 신정체제라는 견고한 벽이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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