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5

2012.07.09

혼을 던져 날마다 ‘감동의 드라마’

프로야구 노장 투수 3인방 “나이는 숫자에 불과”

  • 김도헌 스포츠동아 기자 dohoney@donga.com

    입력2012-07-09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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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을 던져 날마다 ‘감동의 드라마’

    KIA 타이거즈 최향남.

    “이제 한물갔다.” “가능성 없는 무모한 도전이다.”

    다들 그랬다. 더러는 “미친 짓”이라고 “제 분수도 모른다”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 시선에 굴하지 않았다. 야구에 대한 못다 이룬 꿈과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보란 듯 마운드에서 힘차게 공을 뿌리고 있다.

    KIA 타이거즈 최향남(41)과 LG 트윈스 류택현(41), 그리고 SK 와이번스 최영필(38) 등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세 베테랑 투수가 2012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눈물과 땀으로 이룬 값진 열매다.

    01 KIA 마무리로 돌아온 ‘풍운아’ 최향남

    1990년 해태에 입단해 올해로 프로 생활 23년째를 맞는 최향남의 야구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풍운아’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해태 초년병 시절 ‘불펜의 선동열’이라고 불렀던 최향남은 1997년 LG로 이적해 이듬해 12승 투수로 거듭났다. LG의 에이스 구실을 하다 2004년 다시 KIA로 이적했다.



    평탄할 것 같던 그의 야구 인생은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욕망이 꿈틀대면서 소용돌이쳤다. 변변한 에이전트도 없이 2006년 무작정 태평양을 건넜고, 클리블랜드 산하 트리플A 버펄로 바이슨스에서 1년간 활약했다. 서른 중반을 넘어선 투수에게 빅리그 경험 기회가 선뜻 찾아올 리 없었지만 그는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유턴해 2007년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타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빠르게 정면승부를 펼치는 덕에 ‘퇴근 본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부산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공이 더 좋아졌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한 번 미국행을 선택했다. 2009년 재차 태평양을 건넜지만 여전히 빅리그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2010년 일본 독립리그를 거쳐 2011년 롯데에 재입단했고, 팔꿈치 부상으로 1군에 한 번도 서보지 못한 채 지난해 7월 방출됐다.

    마흔이 넘은 나이, “최향남도 이제 끝났다”는 얘기가 돌았지만 그는 역시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였다. 올 초 미국 휴스턴으로 건너가 LG 시절 후배 투수였던 김혁섭 씨가 코치로 있는 크리스천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재기의 칼을 갈았다. 미국에서 뛸 팀을 찾지 못하자 결국 테스트를 거쳐 시즌 중반 친정팀 KIA 유니폼을 다시 입었고, 6월 17일 감격적인 1군 마운드를 다시 밟았다.

    1971년생으로 LG 류택현, 최동수와 함께 현역 최고참인 최향남은 선동열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고 팀의 마무리 투수로 뛰고 있다. 6월 27일 LG와의 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으로 시즌 첫 세이브를 챙겼다. 41세 2개월 30일에 올린 역대 두 번째 최고령 세이브였고, 개인적으로는 2008년 9월 11일 넥센과의 경기 이후 1385일 만에 얻은 값진 기록이었다.

    02 아들과 함께 뛰는 꿈꾸는 최영필

    혼을 던져 날마다 ‘감동의 드라마’

    SK 와이번스 최영필.

    1997년 현대 유니폼을 입고 프로 생활을 시작한 최영필은 2001년 한화로 이적한 뒤 2010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FA) 선수 자격을 얻었다. 남들은 9년 만에 얻는 FA 자격을 5년이나 더 걸려 통산 14시즌을 마치고서야 얻은 최영필은 당연히 FA 권리를 행사했지만, 원 소속구단인 한화는 물론 다른 구단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연봉이 7000만 원에 불과했음에도, 연봉 300%와 보상선수 1명 또는 연봉 450%를 전 소속구단인 한화에 보상해야 하는 FA 규정 탓에 졸지에 미아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최영필은 FA 규정이 족쇄가 되어 지난 한 시즌을 통째로 쉬었다. 멕시칸리그와 일본 독립리그를 전전하며 언젠가 다시 찾아올 기회를 묵묵히 기다렸다. 그가 힘겨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종현 군과 함께 프로야구 무대에서 뛰는 사상 첫 ‘부자(父子)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 덕분이었다. 현재 제물포고 1학년에 재학 중인 종현 군은 이르면 2015년 프로 유니폼을 입을 수 있다.

    다행히 올 초 FA 제도의 모순점이 부각되면서 원 소속구단 한화가 보상권리를 포기해 최영필은 SK 유니폼을 입었다. 6월 초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사회에서는 ‘최영필 구제법’을 만들고, 최영필과 같은 또 다른 FA 미아가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기도 했다.

    SK 불펜에서 소금 같은 구실을 하는 최영필은 6월 15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1.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해 승리투수의 감격을 누렸다. 728일 만의 승리였다. 공교롭게도 상대팀은 그가 10년간 몸담았던 친정 한화였다.

    03 마흔 살에 칼을 댄 류택현의 도전

    혼을 던져 날마다 ‘감동의 드라마’

    LG 트윈스 류택현.

    1994년 프로에 입단해 불펜에서 맹활약했던 류택현은 LG 소속이던 2010년, 중반 800게임 넘게 등판해도 끄떡없던 ‘고무팔’에 탈이 나면서 선수 생활을 마감할 위기에 몰렸다. 비싼 돈을 들여 나이 든 투수의 재활을 도울 리 만무한 구단은 전력분석요원 자리를 주겠다며 은퇴를 권유했다. 도전정신이 투철한 동기생 최향남마저도 수술하려는 그에게 “미쳤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마흔 살 류택현은 “이성적으로는 이미 은퇴를 결심했는데, 내 안에 있는 나는 내게 도전하라고 채찍질을 한다”며 구단에 방출을 요청한 뒤 자비로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 나이에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은 선수도 없거니와,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었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힘겨운 재활 과정을 버텨냈다.

    수술 후 미국 LA에서 재활 기초 과정을 마친 그는 지난해 4월부터 LG 2군 연습장인 구리구장에서 본격적인 재활에 들어갔고, 이때 2군 감독이던 김기태 현 1군 감독이 그의 남다른 열정에 주목했다. 결국 지난해 말 테스트를 거쳐 플레잉코치 자격으로 올 초 LG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다. 그의 열정에 반해 플레잉코치 자격을 주긴 했지만 김 감독도 그의 현역 복귀에는 회의적이었다. 코치로 후배들을 잘 돌봐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류택현은 오키나와 캠프에서 열린 일본 프로팀과의 연습경기에서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면서 마침내 ‘코치’ 타이틀을 떼고 ‘현역 선수’로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됐다. 류택현은 4월 8일 올 시즌 처음으로 등판한 삼성과의 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630일 만에 다시 밟은 1군 무대였고, 960일 만에 맛본 감격의 승리였다. 류택현은 4월 13일 KIA와의 경기에서 개인통산 814경기에 등판해 ‘한국 프로야구 투수 역대 최다 출장’ 신기록도 세웠다.

    하지만 불의의 부상이 또 한 번 발목을 잡았다. 4월 말 외야에서 몸을 풀다 동료의 연습 타구에 갈비뼈가 미세하게 골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미세 골절 정도로 좌절할 그가 아니었다. ‘나이 들어 회복이 더딜 것’이라는 주변의 부정적 시선을 보란 듯이 씻어내며 6월 6일 1군에 복귀해 다시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류택현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한국 프로야구 투수 최다 출장 기록을 새롭게 쓰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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