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4

2011.09.19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다고?

‘적과의 동침’ 프랑스판에서 독일과 협력 주장 나와…패션 못지않은 화려한 남성 편력 또다시 화제

  • 파리=백연주 통신원 byj513@naver.com

    입력2011-09-19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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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다고?

    예술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했던 디자이너와 음악가의 관계를 그린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프랑스 패션계 대모 코코 샤넬과 현대 음악의 거장 스트라빈스키의 뜨거운 사랑을 그린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가 8월 25일 한국에서 개봉했다. 제62회 칸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했던 이 영화는 ‘도베르만’으로 주목받았던 네덜란드의 얀 쿠넹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샤넬 모델로도 활동했던 프랑스 여배우 안나 무글라리스와 스트라빈스키를 완벽하게 재현한 마스 미켈슨의 열연이 돋보인다. 하지만 영화와는 별개로 최근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다는 놀라운 주장이 제기돼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패션 천재 샤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 heur Chanel)은 188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노점상 아버지와 재봉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두 살 되던 해 지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자식 5남매를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샤넬은 언니, 여동생과 함께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수녀 복장과 수도원 실내장식 속에서 살았던 6년간이 샤넬 패션의 근간이 됐다(샤넬의 상징인 블랙과 화이트의 간결한 조화, 질서정연한 구성 등).

    # 어두웠던 유년기

    수도원에서 디자인에 재능을 보인 샤넬은 열여덟 살 되던 해에 본격적으로 재단과 재봉 일을 배웠다. 그리고 타고난 능력을 인정받아 1903년 그람파이르(Grampayre) 아틀리에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특별할 것 없는 인생에 만족할 수 없던 그는 1907년 라 로통드(La rotonde)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프랑스 육군 장교와 부유층 남성이 드나들며 시간을 보내던 명소로, 많은 고객이 스물네 살의 샤넬을 ‘코코(Coco)’라 부르며 아꼈고 이후 코코는 그의 영원한 애칭이 됐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무대를 압도한 가수로서의 일탈은 그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

    샤넬은 디자인뿐 아니라 남성 편력도 화려했다. 운명적인 첫 번째 만남도 라 로통드에서 이뤄졌다. 뮤직홀을 즐겨 찾던 전 육군 장교 에티엔 발장(´Etienne Balsan)은 젊고 매력적인 샤넬에게 빠졌다. 말 사육과 승마대회에 투자하던 이 젊은 재벌은 지방 뮤직홀 여가수인 샤넬을 프랑스 상류층의 사교계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던 패션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등 아낌없는 애정을 쏟았다. 하지만 불과 일 년 만에 샤넬은 운명이라 믿었던 에티엔과 결별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영국인 사업가 아서 케이플(Arthur Capel)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Boy’라 불린 아서는 천부적인 사업가로, 샤넬 인생 최대의 인물이자 연인으로 꼽힌다. 그는 샤넬이 에티엔의 지원으로 모자 매장을 개업할 때 경영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1910년엔 활동무대를 넓힐 수 있도록 자본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파리의 캄봉 거리에 샤넬 매장이 들어설 수 있도록 후원자 구실을 했다. 이후 샤넬의 사업은 캄봉에 이어 도빌과 비아리츠까지 총 3개 매장으로 늘어나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아서는 10년간 샤넬의 연인으로 지냈으며 이별 후 다른 여자와 결혼했으나, 1919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샤넬의 영원한 친구였다.

    # 샤넬, 그의 남자들

    1921년 샤넬은 파리 캄봉 거리 27, 29, 31번지 전체를 자신의 매장으로 채울 만큼 유명한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샤넬은 더는 수동원에서 재봉질하던 고아가 아니었다. 그는 코르셋에 갇혀 있던 여성의 패션에 자유의 날개를 달았다. 또 남성복에도 다양한 실험을 감행했으며, 주로 자신의 연인에게서 작품 모티프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향수를 잘 모르는 이라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샤넬 N°5’를 만들어냈다. 이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중 하나는 디미트리 파블로비치(Dimitri Pavlovich)와의 사랑이 향수를 만들었다는 설이다. 샤넬은 당시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러시아 공작 디미트리와 연인이었는데, 그에게서 소개받은 조향사와 공동 작업을 해 보드카 술병을 연상시키는 N°5를 완성했다는 것. 이외에 연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영향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대음악의 거장 스트라빈스키와 샤넬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데,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의 재능에 매료됐다. 샤넬은 뛰어난 음악 실력에도 경제난에 허덕이던 스트라빈스키에게 자신의 별장에서 지내며 작품 활동을 하라고 제안했으며, 이를 받아들인 스트라빈스키는 아내 카트린과 4명의 자녀를 데리고 별장으로 이사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샤넬을 사랑했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샤넬은 스트라빈스키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그의 대작 ‘봄의 제전’ 공연에서 의상을 담당하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염문설이 제기됐을 때 샤넬은 그를 향한 마음을 표현했으나, 스트라빈스키는 단 한 번도 샤넬과의 사랑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N°5는 스트라빈스키가 샤넬의 별장에 머물던 시기에 완성한 ‘파이브 이지 피스(Five easy pieces)’라는 곡을 듣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 요원 번호 F-7124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다고?

    샤넬이 사망한 지 40년이 넘었어도 그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고 있다.

    샤넬에게 영감을 준 다른 연인들도 있는데, 문학적 감각을 가르쳐준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 6년간 열애했던 웨스트민스터 공작(Duc de westminster)은 아직도 거론된다.

    미국 언론인 할 본(Hal Vaughan)이 쓴 ‘적과의 동침 : 코코 샤넬의 비밀전쟁’의 프랑스판 출간이 가까워지면서 패션계가 술렁이고 있다. 그동안 샤넬에 관한 책이나 영화 등이 많았지만 이 책이 유독 화제가 되는 이유는 ‘코코 샤넬이 독일 스파이’라는 저자의 주장 때문이다. 할 본은 프랑스, 영국, 독일의 다양한 역사자료를 연구한 결과 “코코 샤넬이 57세였던 1940년, 독일 첩보기관 압베어(Abwehr)에 채용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샤넬이 요원 번호 F-7124로 암호명 웨스트민스터를 통해 활동했는데, 이 암호명은 그의 친구이자 연인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에게서 따온 것이라고. 또한 할 본은 샤넬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도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당시 독일 재벌들의 마음에 들려면 반유대적 사상을 갖고 있어야만 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경멸감을 내세우며 재벌들과 어울렸고, 그 결과 그들만큼 부자가 됐다. 1933년 그가 히틀러를 유럽 영웅으로 칭하는 발언을 한 것도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

    이 책 내용에 따르면, 샤넬은 모로코에서 활동하던 전직 게슈타포 요원이자 나치의 스파이 채용을 담당했던 루이 드 보프를렁(Louis de Vaufreland) 남작을 만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샤넬을 스페인으로 보내 새로운 공작원을 채용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그는 이 스파이 활동의 대가로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있던 조카 앙드레의 석방을 요구했다. 1940년 독일군에 점령당한 프랑스 곳곳에서 레지스탕스가 생겨났으며, 고문과 단속에도 많은 프랑스 국민이 자유와 해방에 대한 열망을 이어갔지만 샤넬은 조금 달랐다.

    당시 샤넬은 독일 나치 장교이자 공작원이던 한스 군터 폰 딘클라게(Hans Gunther von Dincklage)와 오랫동안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항간에는 ‘Spatz’라 불리던 이 장교의 배려로 독일군 의 파리 점령 기간에 독일 소유의 호화 호텔 리츠의 7층 스위트룸에서 안전하게 장기투숙할 수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1944년 해방 이후 프랑스 정부는 독일군과 협력했다는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샤넬을 소환했다.

    하지만 매국노라는 지탄의 소리를 듣던 샤넬은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연인일 때 그의 소개로 친분을 맺은 윈스턴 처칠의 도움으로 심문을 받기도 전 풀려났다. 이후 그는 스위스로 망명했다가 1954년 파리로 돌아왔다. 샤넬 매장 뒤 좁은 곳에서 생활하던 그는 전쟁 당시 묵었던 리츠호텔로 옮겨 1971년 여든일곱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거주했다. 그의 무덤은 스위스 로잔에 있는데 ‘전쟁 당시 독일군에 협력했다’는 혐의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프랑스 정부가 그의 무덤을 자국 내에 만드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 말 많고 탈 많은 세기의 디자이너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형제들과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극도의 외로움을 느꼈던 샤넬은 어쩌면 수많은 연인의 품에 안겨 고독을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나치 스파이 연루설을 접한 일부 프랑스 패션계 인사는 더는 고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며 분노하나, 다른 한편에서는 매국노의 패션브랜드가 프랑스를 대표한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는 의견이다. 요원번호 F-7124, 암호명 웨스트민스터…. 새삼 거론되는 샤넬의 정체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의 패션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과 재능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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