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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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6위 선진국 아르헨티나 22번 IMF 구제금융 내몬 것은 ‘페론주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페소화 54% 평가절하·보조금 삭감 등 경제 비상조치 단행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3-12-18 16: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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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는 지난 40년간 9번의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 ‘남미의 병자’로 불려왔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도 무려 22차례나 받았다.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IMF가 지원하는 구제금융에 의지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이미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다. 연간 140%가 넘는 인플레이션,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된 페소화, 국민 중 40%는 빈곤층,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 등 각종 경제지표들은 빨간불이 켜져 있는 상태다.

    “일본의 반대 유형이 아르헨티나”

    9월 12일(현지 시간) 아르헨티나 라플라타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당시 하비에르 밀레이 자유전진당 후보가 전기톱을 휘두르고 있다. [뉴시스]

    9월 12일(현지 시간) 아르헨티나 라플라타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당시 하비에르 밀레이 자유전진당 후보가 전기톱을 휘두르고 있다. [뉴시스]

    아르헨티나는 1930년대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 세계 6위, 교역량 10위의 선진국이었다. 팜파스라 불리는 비옥한 초원에서 생산되는 대두(콩)와 밀, 옥수수, 쇠고기 등을 수출해 엄청난 국부를 축적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무너진 근본적인 원인은 이른바 ‘페론주의’ 때문이다.

    페론주의는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인 1946~1955년과 1973~1974년에 추진했던 좌파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을 말한다. 페론 대통령은 외국 자본을 몰아내고, 철도·전화·가스·전기 등 기간산업을 국유화했고, 무상 복지 대폭 확대, 노동자 임금 매년 25% 인상 등을 추진해 자유시장 경제였던 아르헨티나 국가 시스템을 사회주의로 바꾸었다. 페론주의 정책에 따라 재정 지출이 과도해지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서서히 침몰했고 결국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미국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는 “전 세계에는 선진국과 후진국, 일본, 아르헨티나 등 네 가지 유형의 국가가 있다”며 “한 세기 내에 선진국에 진입한 유일한 국가가 일본이고, 그 반대가 아르헨티나”라고 지적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포퓰리즘의 달콤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아르헨티나 국민이 선거 때마다 페론주의를 주장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선택해왔다는 것이다.

    페론주의 청산을 주장하며 대선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경제난 극복을 위해 극약 처방 조치를 내렸다. 선거 유세 때 전기톱을 들고 페론주의 정책들을 과감하게 제거하겠다고 공언했던 것들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루이스 카푸토 경제부 장관은 12월 12일 밀레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0개 경제 비상조치들을 발표했다. 이른바 ‘전기톱 계획(chainsaw plan)’이라고 불리는 이 조치에는 △페소화 54% 평가절하 △에너지·교통 보조금 삭감 △1년 미만의 정부 근로 계약 미갱신 △새로운 공공사업 입찰 중지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의 재정 이전 최소화 △정부 부처 18→9개와 사무국 106→54개로 축소 △수입 사전허가제(SIRA) 폐지를 통한 절차 간소화 △국가 광고 1년간 중단 등이 담겼다. 카푸토 장관은 경제비상 조치들을 단행한 것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주요 문제는 재정 적자”라며 “경제난에 대한 결과만 공격할 뿐 누구도 재정 적자라는 원인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밀레이 대통령은 빈곤층의 반발 등을 우려해 대응 정책도 내놓았다. 카푸토 경제부 장관은 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 지출을 두 배로 늘릴 예정이라면서 보편적 아동수당은 2배로 인상하고, 전 국민의 40%에 해당하는 빈곤층에 제공하는 식료품 카드 지원도 1.5배 확대한다고 밝혔다.

    “물가 20~40% 오를 것”

    밀레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재정적자 감소를 위해 페소화를 54% 평가절하했다. [GETTYIMAGES]

    밀레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재정적자 감소를 위해 페소화를 54% 평가절하했다. [GETTYIMAGES]

    이번 조치들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것은 페소화를 대폭 평가 절하한 것이다. 이에 고정환율제를 운영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에서 달러/페소화 환율이 365페소에서 800페소가 됐다. 페소화 가치가 54%나 평가 절하된 셈이다. 이 조치로 아르헨티나 정부가 정한 공식 환율과 ‘블루 달러(암시장 등 비공식 환율)’와의 괴리도 줄어들 전망이다.

    페소화를 대폭 평가 절하한 이유는 무엇보다 재정적자를 줄이려는 의도 때문이다. 카푸토 장관은 “아르헨티나는 지난 123년 중 113년간 재정 적자를 겪었고, 항상 그 적자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며 “이제는 재정 적자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정적자를 막기 위해 중앙은행에서 더 많은 페소화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면서 페소화의 가치가 하락한 만큼 이를 공식 환율에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밀레이 대통령은 12월 10일 취임사에서 “나라에 돈이 없다”며 “폐허처럼 변한 사랑하는 조국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페소화 평가절하가 아르헨티나의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악화시켜 서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밀레이 대통령은 “앞으로 몇 달 내 물가가 20~40%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민들이 수개월간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가는 이미 들썩이고 있다. 국내선 항공권 가격이 50∼100% 인상됐고, 휘발유 가격도 37%나 올랐다. 앞으로 물가 상승 압박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의 11월 물가상승률은 160.9%를 기록해 10월의 142.7%에 이어 1989∼1990년 초(超)인플레이션 이후 최대치 기록을 경신했다.

    이번 조치들 중 교통과 에너지 보조금 삭감도 빈곤층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 분명하다. 카푸토 장관은 “정치는 사람들 주머니에 돈을 넣어준다는 식으로 속이고 있는데 우리 모두는 보조금이 무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며 “마트에서 인상된 가격으로 사람들의 교통비를 내주는 것”이라고 교통과 에너지 보조금 삭감 조치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에너지 보조금 삭감으로 전체 GDP의 0.5%, 교통 보조금 삭감으로 0.2%에 달하는 재정지출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빈곤층은 견디기가 힘들 것으로 보인다. 국제신용평가회사인 피치는 “아르헨티나의 긴축은 고통스러울 것이며, 앞으로의 길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고 분석했다.

    밀레이 대통령과 아르헨티나 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사회적 불안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어온 국민들이 현재의 상황을 반전시킬 시간을 밀레니 대통령에게 주겠지만 인내심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도로 봉쇄를 포함한 거리 시위와 집회를 엄격히 제한하는 치안 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불법으로 규정한 집회와 시위의 경우 이를 주최한 시민사회단체 등에 질서유지에 들어간 비용을 청구하는 법안 역시 의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반정부 시위로 ‘전기톱 정책’이 중단되는 것을 막겠다는 밀레이 대통령의 의지가 읽힌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공공기관이 보유한 자산들도 대거 매각할 계획이다. 마누엘 아도르니 대통령실 대변인은 “정부는 공공기관에서 보유한 관용차와 비행기 등 자산을 매각하기로 했다”며 “특히 관용차 기사는 현재의 절반 수준까지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아도르니 대변인은 “대통령 관저에 내걸린 그림까지 내다 팔 계획”이라며 “빈곤층 미성년자 130만 명이 밥을 굶는 상황에서 정부가 대통령 관저에 있는 값비싼 그림들에 대한 거액의 보험료를 내온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국영기업이자 거대 에너지 회사인 YPF가 소유한 항공기 2대도 매물로 내놓을 예정이다. 아르헨티나는 IMF에서 제공한 440억 달러(약 57조 2000억 원)의 구제금융을 내년 9월부터 갚아야 한다. 아르헨티나 정부로서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더욱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

    “시장의 보상 있을 것”

    IMF와 미국 월가 등에선 밀레이 대통령과 아르헨티나 정부의 이번 조치를 호평하고 있다. 줄리 코작 IMF 대변인은 “아르헨티나 정부의 이 대담한 조치는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을 보호하고 외환 체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공공 재정을 크게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조치의 단호한 이행은 경제를 안정시키고 보다 지속 가능한 민간 부문 주도의 성장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투자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씨티그룹, 골드만삭스는 아르헨티나 국채를 매입할 것을 추천했다. 미국 투자은행들은 “새 정부의 초기 조치가 건설적이고, 이에 대한 시장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밀레이 대통령은 페소화 대신 미국 달러화를 아르헨티나의 법정 화폐로 삼을 것이라는 대선 공약은 일단 접었다. 이 공약을 이행할 수 없을 만큼 경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소화를 대체할 만큼의 달러를 보유하고 있지도 않은 데다 막대한 아르헨티나의 외채와 정부부채 등을 감안하면 자칫 경제가 더 불안해질 수도 있다. 의회와 국민들 대부분 역시 관련 정책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밀레이 대통령은 이 공약을 유보했다. 실제로 달러화 전환에 반대 의사를 밝혀왔던 카푸토 장관을 경제장관으로 기용했다.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밀레이 대통령의 전기톱 정책을 앞두고 페론주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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