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8

2014.03.10

野, 野 헤쳐 모여라!

한국민주당부터 ‘민주+안철수’까지 야당은 선거 앞두고 이합집산

  • 박성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swpark@donga.com

    입력2014-03-10 0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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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野, 野 헤쳐 모여라!

    2003년 11월 열린 열린우리당 창당대회.

    우리의 정당사, 그중에서도 야당사는 이합집산 역사라 할 만큼 ‘헤쳐 모여’가 잦았다. 특히 대통령선거(대선)나 총선을 앞두고 창당 또는 분당을 거듭하는 등 정당정치가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정치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보수 야당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국민주당(1945년 9월·한민당)은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대항하는 반공우익정당으로 출발했다.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 집권에 협력하지만 정부 조각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반(反)이승만 노선으로 바꾸고 대한민국당과 합쳐 민주국민당(1949년 2월)으로 개칭한 뒤 본격적인 야당의 길을 걷는다.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 사건을 계기로 민국당 보수파와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을 포함한 범야권이 결집해 민주당이 탄생했다(1955년 9월). 민주당은 신익희, 조병옥 중심의 구파와 장면, 박순천 중심의 신파가 최고위원 등 주요 당직을 5대 5로 안배했다.

    4·19혁명으로 민주당의 내각제 정부가 출범하지만 신·구파가 격하게 대립해 5·16군사정변 이후 민주당 구파가 떨어져나가 민정당을 만들었다. 이후 다시 신파 중심의 민주당과 합쳐 민중당(1965년 5월)을 만들었지만 지리멸렬하다 1967년 2월에야 통합야당인 신민당이 탄생한다.

    정당정치 뿌리 내리지 못한 구조

    신민당을 이끌던 김영삼(YS), 김대중(DJ) 등 야당 주요 인사는 유신정권 붕괴 이후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됐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1981년 1월)과 국민당이 야당 공백을 메웠다. 정통 야당의 맥은 1985년 12대 총선(2·12총선)을 1개월 앞두고 창당된 신한민주당을 통해 부활했다. 5공화국 독재에 맞선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가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토대로 탄생한 신한민주당은 ‘2·12 돌풍’을 일으키며 억눌렸던 야당 위력을 떨쳤다.



    5공 정권에 대한 이민우 총재의 타협적 자세에 반발한 동교동과 상도동 양대 세력이 대거 신민당을 탈당해 창당(1987년 5월)한 통일민주당은 재야 및 대학생은 물론 ‘넥타이부대’까지 함께한 직선제 개헌운동을 주도했다.

    野, 野 헤쳐 모여라!
    하지만 1987년 ‘6·29선언’ 후 처음 치르는 대통령 직선제하의 대선을 앞두고 YS, DJ 양 김의 후보 단일화가 실패로 끝나자 DJ는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했고 각각 대선에 출마했다. 결과는 양 김 모두 패배였다.

    1990년 통일민주당이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탄생했다. 이에 야권은 평화민주당이 재야운동가를 영입해 만든 신민주연합당(1991년 4월)에 3당 합당을 거부한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이기택 씨가 이끌던 ‘꼬마 민주당’)을 합해 민주당을 만드는 것으로 대응했다(1991년 9월).

    1992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패배,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95년 7월 정계 복귀를 선언하면서 이기택 씨가 이끌던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국민회의는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김종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와 손잡은 DJP연합을 성사시켰다. 김대중 대선후보는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15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처음으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이다.

    잔류한 민주당 내에서 김원기, 노무현, 이부영 등 비당권파는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라는 소모임을 만들었다. 민주당은 이후 개혁신당과 통합(1995년 12월)했고, 2년 뒤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쳐 한나라당이 될 때 통추 멤버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며 국민회의에 합류했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서는 1997년 9월 이인제 경기도지사가 대선후보 경선에 불복, 탈당해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국민신당은 이 전 지사가 대선에서 패한 이후 국민회의에 흡수됐다.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 세력을 합류하게 해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국민회의 간판을 바꿔 달고 신장개업한 것이다. 이때 386세대로 부르던 학생운동권 출신 ‘젊은 피’가 대거 수혈됐다. 당시 김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의 법통(法統)을 “자유당 치하에서 창립하고 4·19 이후 집권한 민주당(제2공화국)의 맥을 이은 50년 민주정통의 정당”이라고 규정할 만큼 애착을 보였다.

    국회의원 115석이 당선된 새천년민주당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내세워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비주류가 된 DJ 동교동계와 주류로 등장한 친노(친노무현) 세력이 쇄신 논란을 거듭한 끝에 친노 그룹이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창당(2003년 11월)하는 분당 사태를 겪었다. 열린우리당에는 유시민 전 의원의 개혁국민정당과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개혁 성향의 ‘독수리 5형제’(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우재)도 합류했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에서 노 대통령 탄핵 역풍을 타고 과반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임기 말 지지도가 바닥권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노 대통령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며 탈당한 김한길 의원 등은 그해 5월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열린우리당과 열린우리당 탈당파 80명, 민주당 탈당파로 구성된 중도통합민주당,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선진평화연대 등을 합치면서 중도개혁세력을 표방한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해 대선을 치렀다.

    오직 권력 획득과 유지 수단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한 뒤인 2008년 2월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통합민주당이 출범했고, 같은 해 7월 민주당으로 개명했다. 민주당은 2011년 9월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친노와 시민사회 세력이 결성한 ‘혁신과 통합’(한시적으로 시민통합당을 창당), 그리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까지 참여하는 민주통합당을 만들었다(2011년 12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연패한 민주통합당은 지난해 5·4전당대회에서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고 새 출발을 다짐했으나 좀처럼 지지율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다 3월 1일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연합과 ‘제3지대 신당’ 창당에 합의함으로써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안철수 새정치연합 의원은 3월 5일 민주당과의 통합신당 창당을 위한 지도부 상견례 자리에서 “지금까지 야권에 통합과 헤어짐의 역사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민주+안철수’ 신당의 유통기한이 언제까지가 될지 현재로선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오직 선거를 위해, 오너의 권력 획득과 유지를 위해 수시로 이합집산을 거듭해온 역사를 되풀이한다면 집권에도, 정당정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점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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