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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386세대의 진화, 新중년이 사는 법 03

묵직한 지갑 여는 중년 신사들

자기 가꾸기 열중, 패션·명품 시장 큰손으로 급부상

묵직한 지갑 여는 중년 신사들

묵직한 지갑 여는 중년 신사들

신세계백화점은 중년 남성을 겨냥해 편집매장‘신세계 멘즈 컬렉션’을 개설했다.

#중견기업 CEO 김모(53) 씨는 요즘 “세련되고 젊어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40대 때는 오히려 50대로 오해받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기분 좋은 변화가 일어난 셈. 그 변화의 비결은 슈트와 구두에 있다. 김씨는 늘 사이즈가 넉넉한 검은색 정장과 검정 구두를 교복처럼 걸치고 다녔다. 보수적이고 딱딱해 보인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러다 2~3년 전부터 편집매장(특정 아이템에 관한 여러 브랜드를 갖춰놓은 매장)을 즐겨 찾으며 몸에 꼭 맞는 슈트를 입기 시작했다. 차츰 바지 길이도 이전보다 짧게 줄이고 구두 색상도 어두운 갈색으로 바꿨다. 과거에는 쇼핑하는 시간이 아까웠는데 이제는 쇼핑하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매장에서 패션 전문가에게 여러 패션 브랜드의 역사, 철학, 특징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도 흥미롭다. 김씨는 패션에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패션 덕분에 삶이 즐겁고 여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공무원 강모(51) 씨는 요즘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구두를 신는다. 지인의 추천으로 큰마음 먹고 구입했다가 수제 구두의 매력에 빠졌다. 구두가 차츰 자신의 발에 길드는 느낌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남들은 사치라 하지만, 한번 구입하면 20년 이상은 신을 수 있으니 오히려 돈이 아깝지 않다. 예전에는 늘 아내와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지만, 요즘은 홀로 쇼핑한다. 클래식 슈트, 비즈니스 캐주얼, 아웃도어 룩 등 때와 장소에 맞는 옷을 구입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중년 남성 적극 공략 나선 패션·유통 업체

술과 담배 사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족을 위해서만 돈을 쓰는 배불뚝이 아저씨. 지금까지 중장년 남성이라 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이미지가 아닐까. 자기 관리, 특히 패션·미용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였던 이들이 패션·유통업계의 주요 고객으로 떠오르고 있다. 백화점 매출 수치가 이를 증명한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본점 구매고객 중 40, 50대 남성의 구매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16.3%에서 2010년 22.2%로 늘었다. 신세계백화점의 신사복 매출 신장률은 2008년 2.0%에서 2010년 27.2%로 증가했다. 신세계백화점 나승 남성팀 팀장은 “경제력을 갖춘 중년 남성이 백화점의 큰손 고객으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년 남성이 자신을 가꾸려고 지갑을 열기 시작하자 패션·유통·명품 업체들은 이들을 사로잡을 상품과 편집매장을 속속 내놓고 있다. 가장 먼저 나선 곳은 롯데백화점으로 2007년 애비뉴엘점 2층에 편집매장 ‘슈와다담’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구두, 가방, 시계, 넥타이, 장갑, 모자, 시가 용품 등 남성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잡화를 판매한다. 입점한 브랜드는 주로 수입 브랜드로 독일 여행가방 ‘리모와’, 영국 수제화 ‘크로켓앤존스’ 등이 있다. ‘슈와다담’은 매장을 연 이래 매년 20%가 넘는 매출 신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을 제외한 여타 백화점이 본격적으로 중년 남성 전용 편집매장을 내놓은 것은 2010년부터다. 현대백화점은 2010년 8월 서울 압구정동 본점에 중년 남성을 위한 고급 캐주얼 의류 편집매장 ‘리비에라’를 열었다. 리비에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있는 고급 휴양지 지명. 이 매장은 여성 의류보다 남성 의류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에 착안해 만들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40, 50대 중년 남성이 격식을 지키면서도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캐주얼 브랜드가 국내에 없어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들여왔다”고 설명했다. 리비에라는 문을 연 지 반년이 조금 지났지만 이미 목표 대비 120% 이상의 매출을 거두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2010년 10월 330㎡(100여 평) 규모의 편집매장 ‘신세계 멘즈 컬렉션’을 개설했다. 이곳에서는 유럽 정통 클래식 정장, 캐주얼 의류, 골프웨어 등 명품급 브랜드 20여 개를 취급한다. 정장 한 벌이 150만~400만 원대로 저렴하지는 않지만 한 번에 2~3벌을 구입하는 중장년 남성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신세계 이정하 홍보팀 주임은 “현재 모든 중장년 남성이 매장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율이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며 “남성 잡화 매장, 캐주얼 매장 등 전반적인 중장년 남성 매장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갤러리아백화점은 지난해 12월 압구정동 명품관 이스트(EAST)에 30~50대 남성을 겨냥한 편집매장 ‘지스트리트 494 옴므’를 열었다. 출발이 늦은 만큼 차별화를 꾀했다. 아예 국내 맞춤복 전문점 ‘장미라사’, 이탈리아 정장 브랜드 ‘스테파노 리치’와 협업해 PB(자체 브랜드) 상품을 선보인 것. 물론 이외에 이탈리아 ‘체사레 아톨리니’, 영국 ‘이타우츠’ 등 고급 남성복 브랜드도 판매한다.

묵직한 지갑 여는 중년 신사들

제일모직이 선보인 니나리치 남성복 모델 뱅상 카셀.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패션업체들도 주요 고객을 놓칠 리 없다. 제일모직은 2010년 니나리치(NINA RICCI) 남성복을 시장에 내놓았다. 니나리치 남성복은 전형적인 클래식 정장에서 벗어나 비즈니스 캐주얼을 주요 제품으로 내세운다. 제일모직 양희준 홍보팀 과장은 “니나리치는 40, 50대 남성만 공략한다는 게 특징”이라며 “중년 남성의 체형을 고려하면서도 컬러, 디자인 등은 젊은 감성을 유지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중년 남성이 패션, 명품의 주요 구매자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세대적 특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로 베이비붐의 마지막 세대에 해당한다. 경제 성장의 결과 높은 소득을 누리면서 소비에 대한 욕구도 큰 편이다. 서울대 김난도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는 “이들보다 10년 앞선 세대가 근검, 절약을 미덕으로 여겼다면, 이 세대는 소비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많다”고 분석했다.

특히 중년이 되고 상대적으로 경제적, 심리적 여유가 생기면서 소비도 늘어났다. 서울대 곽금주 심리학과 교수는 “자식을 뒷바라지하고, 직장에서 커리어에 몰두하던 데서 벗어나게 됐다”며 “자신을 돌아보고 가꿀 여유가 생긴 셈”이라고 평가했다.

남성이 패션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한 주변의 시각도 변했다. 남성이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과거와 달리 오히려 감각 있고 앞서 나가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 김난도 교수는 “인터넷의 발달로 이런 현상이 더 가속화했다”며 “남성 패션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변화가 중장년 남성에게도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최근 대중매체에서 ‘꽃중년’ ‘노무족(No More Uncle)’ ‘레옹족’ 등 자신을 가꾸는 중장년 남성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유행하는 것도 좋은 예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중장년 남성의 쇼핑 횟수가 늘어난 것을 넘어 이들의 스타일 연출이 섬세하고 과감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대표적인 것이 사이즈의 변화다. 과거에는 넉넉한 사이즈를 선호했다면 최근에는 몸에 꼭 맞는 슬림한 스타일을 선택한다는 것.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현빈이 입은 정장 스타일을 예로 든 전문가가 많았다. 정통 맞춤 슈트 편집매장 란스미어 남훈 팀장은 “3~4년 전부터 중년 남성이 컬러와 소재 선택에도 민감해졌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검정 구두에서 벗어나 갈색, 초콜릿 색상 구두를 선호하고, 바지와 구두 색상을 달리한다. 또 양복 재킷이 기모 소재라면 넥타이도 기모 소재의 캐시미어를 택하는 등 소재를 통일한다. 중장년 남성이 과거보다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에 자연스러워지고 오히려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 젊은이처럼 아주 튀지는 않지만 남과 다른 것을 추구한다.”

나 홀로 쇼핑에 패션 토론 다반사

묵직한 지갑 여는 중년 신사들

중장년 남성들의 명품 소비가 늘면서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패션·유통· 명품 업체들의 경쟁도 가속화될 전망이다.

쇼핑하는 행태도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중장년 남성이 쇼핑 자체를 즐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내와 함께 백화점을 둘러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홀로 쇼핑을 즐기는 이가 늘고 있다. 남훈 팀장은 “란스미어의 주요 고객은 전문직 종사자, 회사 임원, CEO인데 이들은 주로 홀로 매장을 찾는다”며 “평균적으로 매장에 머무는 시간이 긴 편으로 패션을 두고 의견을 교환하는 일도 다반사”라고 말했다. 또 그는 앞으로 옷차림을 하나의 문화로 이해하고 안목을 키우려는 남성이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중장년 남성의 명품 소비가 늘어나는 데 명품에 대한 동경과 욕구가 큰 우리나라의 특성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곽금주 교수는 “우리나라는 세대를 막론하고 유명한 브랜드의 명품을 하나 정도는 소유해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40, 50대가 되면 그동안 가족을 위해 근검, 절약했던 것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용하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명품 소비라는 분석이다.

경영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2010년 7월 ‘2010년 한국 명품 시장조사’ 보고서에서 “한국인은 어떤 문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명품 친화 성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화여대 함인희 사회학과 교수가 쓴 ‘중산층의 정체성과 소비문화’에 따르면, 이들은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기 시작한 세대로 특히 교육 수준이 높은 집단을 중심으로 상대적 비교와 브랜드 파워에 민감하다.

베이비붐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이들 세대가 고령화 초입에 접어든 지금,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패션·유통·명품 업체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주간동아 2011.02.14 774호 (p28~30)

  •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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