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6

2010.05.10

‘호모 워커스’의 출현

걷기 본능 회복 신인류 문화건강족 … 걷기, 등산 제치고 생활체육 1위로 등극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10-05-10 09: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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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워커스’의   출현
    태초에 인간이 있고, 길이 있었다. 영장류가 ‘인류’로 특정된 시점은 그들이 창조적 사고를 하며 직립보행을 하는 순간이었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로 불리는 영장류의 출현, 즉 ‘생각하며 꼿꼿이 걷는 존재’의 탄생이 인류의 시작이었다. 생각하는 인류의 출현 이후 효율적인 이동을 보장하는 단거리 공간에는 절로 길이 만들어졌다. 진화가 거듭되면서 인간은 스스로 길을 만들어나갔다. 역사의 발전에 따라, 시대의 필요에 따라 버리고 새로 만드는 일이 되풀이됐다. 생존과 진화를 위한 길,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하루 수십km를 걷고 또 걸었다.

    걷기는 인간의 대표적 이동수단이다. 인간의 두 다리와 반복된 걷기를 통해 만들어진 길은 스스로 문명을 만들고, 그것을 서로 전파했다. 실크로드, 누들로드, 페이퍼로드…. 걸음을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우마(牛馬)뿐. ‘생각하며 걷는 존재’들은 길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시장을 만들었다. 많이 걷는 자가 더 큰 부를 얻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길을 선점해야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제국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알렉산더 동방원정대의 도보 이동거리는 무려 3200km에 달했다.

    인간의 기억에서 멀어졌던 걷기

    길은 이처럼 생존과 쟁탈의 터전일 뿐 아니라 문화의 본거지였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 그들이 걸어 다닌 길 곳곳에는 갖은 이야기가 별처럼 숨어 있다. 비록 길은 사라져도 길에 뿌려진 수많은 눈물과 사연은 설화로, 전설로, 신화로, 문학으로 살아남았다. 길의 문화는 곧 그 지역의 인문지리학적 특성을 구성했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은 길 위에서 하나가 됐고, 인간은 자연의 거대함에 순응했다. 오를 수 없는 절벽이 나오면 길은 순순히 산을 돌아갔다. 장삼이사는 권력층이 다니는 큰길을 피해 눈에 띄지 않는 숲 속 길을 개척했다. 오솔길, 둘레길, 모로길…. 그 길 주변에는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숲과 목마름을 달래줄 물줄기가 있었다.

    그렇게 길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소통 공간이자 문명과 문화의 전파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걷기와 자연의 길은 20세기에 들어 ‘기계 말’인 자동차와 콘크리트길, 아스팔트길이 출현하면서 인간의 기억에서 점점 멀어졌다. 급기야 인간은 자신의 본령인 ‘생각하며 걷는 존재’임을 망각했다. 아스팔트가 나라의 모세혈관을 장악하고, 자동차가 불어나는 속도만큼 ‘걷는 인간’의 수는 줄어들었다. 계단은 엘리베이터와 케이블카로 대체됐다. 하루 평균 3만 보 이상을 걷던 인간이 불과 100년 사이 하루 1000보를 겨우 걷는 존재로 바뀌었다. 문명이 고도화할수록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기를 포기했다. 아니, 거부했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걷기는 가난뱅이의 전유물이 됐다. 그리고 불러오는 뱃살은 부의 상징이 됐다.



    걷기 본능을 잃어버린 인간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둥피둥 살이 찐다. 단단했던 근육은 지방으로 변하고 머리에는 근심, 걱정만 가득하다. 자연으로부터의 격리로 삶의 의미를 잃었다. 인류는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동맥경화·우울증 등 온갖 질환이 엄습해 자신의 목숨 줄을 옥죄자, 그제야 ‘걷기 본능’에 주목했다. 돈을 벌 만큼 번 선진국 중산층은 서서히 육체적·정신적 건강이 시간보다, 돈보다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이른바 ‘웰빙(well-being·참살이)’ 바람이 불어닥친 것. 그것은 하나의 조류가 아닌, 인간 속성으로의 복귀 선언이자 자연과의 새로운 조우를 의미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웰빙 걷기 열풍

    하지만 1990년대 인간에게 걷기 열망을 되살려낸 불씨는 정작 건강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구원’과 ‘극기’의 차원에서 걷기 시작했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정신 건강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종교적, 철학적 자아 찾기’에서 비롯됐다. 대표적인 길이 유럽의 산티아고 순례길(800km)이고, 한국의 국토종단 순례길이다. 뙤약볕 아래서 수백km를 걷는 동안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신과 신(神)을 재발견한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쏟아지는 경험을 한다.

    ‘호모 워커스’의   출현

    현생 인류 호모사피엔스의 조상인 호모에렉투스. 직립보행은 인류의 본능이자 속성이다.

    199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테마가 있는 길과, 배우면서 걷기에 대한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옛길에 대한 탐구 열기가 바로 그것. 일단의 지리학자와 고지도 전문가인 고(故) 이우영 선생이 조선의 옛길을 지리학적으로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다. 역사지리학이 발전하지 못한 한국에서 조선의 8대로(영남대로, 호남대로, 관동대로 등)를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관련 문헌만으로 복원하는 작업은 엄청난 고난이 뒤따랐다.

    이들의 작업은 이후 옛길 걷기 전문가인 신정일 씨와 언론인들이 실제 그 길을 걷고 길에 얽힌 역사와 사연, 전설, 신화 등을 묶어 소개함으로써 대중에게 알려졌다.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아예 사라지거나, 보존돼 있다 해도 옛길인 줄 모르던 길에 역사와 구전문학이라는 테마를 불어넣음으로써 대중에게 생각하고 느끼면서 걷는 재미를 안겨주었다. 사실 매년 20여만 명이 찾는다는 산티아고 순례길도 1980년대까지는 연간 수천 명의 순례자만 찾는 단순한 옛길에 불과했다. 이 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80여 개국에 6000만 부가 팔려나간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 덕분이었다.

    2000년대 들어 길 관련 저작과 기사에 자극받아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옛길 걷기 모임’이 잇따라 결성됐다. 이들은 직접 옛길을 찾아 나섰고, 자신들이 걸은 길에 대한 정보와 감상을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뒤이어 각 지방자치단체가 자기 지역의 옛길 복원에 발 벗고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도 뒤늦게 이에 동참했다.

    걷기 열풍은 웰빙 문화가 더해지면서 불이 붙었다. 2000년대 후반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개막되면서 사람들은 생각하고 느끼는 재미에 더해 몸이 건강해지는 걷기를 원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다. 걸으면서 그 길을 걸어간 선조의 체취도 맡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끼면서 건강도 도모하는 일석삼조의 길 걷기가 시작된 것. 테마가 있는 웰빙 걷기가 인기를 끌자 산림청과 환경부 등 산림 관리 주체들은 너도나도 숲길과 생태체험 길의 조성에 들어갔다.

    이 때문일까. 지난 수십 년간 건강관리를 위한 운동의 대명사였던 등산과 조깅은 그 자리를 걷기에 내줬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생활체육활동 참여 실태조사’에 따르면 생활체육 참여순위 1위는 단연 걷기였다. 2위인 헬스(14.4%)와 3위인 등산(13.6%)보다 2배나 많은 30%의 사람이 건강관리 수단으로 걷기를 선택했다. 2003년 이래 꾸준히 3위권에 머물던 조깅은 5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걷기가 이토록 인기를 끄는 것은 별다른 준비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친인간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과체중인 사람과 노인들은 등산과 조깅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고, 빠르게 걷는 것이 뛰는 것보다 지방분해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아는 상식. 인간의 뼈는 모두 206개, 이 중 25%에 이르는 52개의 뼈가 양발에 있는데, 뛰거나 산을 오르내리는 등 심한 운동은 이 뼈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뼈와 뼈를 잇는 무릎과 발의 관절들은 걸을 때보다 뛸 때 2배 이상의 충격을 받는다. 헉헉거리며 뛸 때 신체는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지만, 오래 걸으면 몸에 나쁜 지방을 끌어다 소모한다. 근육은 일절 손을 안 대고 지방만 연소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난치성 질환인 아토피 피부염을 비롯해 각종 질환의 치료와 전반적인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숲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숲길 걷기에 참여하는 사람이 날로 늘고 있다. 산림청이 산을 찾는 사람의 등산 유형을 분석한 결과, 산 정상을 올라가는 사람(54.1%)과 산기슭의 숲길을 트레킹하는 사람(45.1%)이 비슷하게 나올 정도다. 숲길을 걷는 사람이 늘면서 등산(산 정상을 올라가는) 인구도 2010년 최초로 줄었다(산림청 ‘산림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보고서’).

    호모 워커스, 서울 숲길을 말하다

    이처럼 환경부, 산림청, 문화체육관광부, 농림수산식품부, 각 지방자치단체, 관련 기관단체가 너도나도 걷기 좋은 길 조성에 나서는 것은 반갑지만 ‘길과 걷기’에 관한 정책을 아우르고 조율하며 통합, 홍보할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가 없어 현장에서는 혼선을 빚고 있다. 길 조성 주체가 중복되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다투기도 하며, 상대방을 폄훼하는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생각하고 느끼는 걷기를 통해 건강을 도모하는 신인류 문화건강족 ‘호모 워커스(walkers)’의 탄생에 발맞춰 ‘주간동아’는 올 한 해 전국에 산재한 걷기 좋은 길을 테마별, 지역별로 소개하기로 했다. 첫 작업으로 서울 도심의 숲길을 기자들이 직접 걸어보고 그 길에 담긴 사연을 글로 옮겼다. 서울에 수십 년 사는 사람도 그런 길이 있었는지 모를 아름다운 숲길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은 있는데 몸이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운동화를 꺼내 신고 집 앞 골목길부터 걷기 시작하자. 어쩌면 그 길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을 수도 있다. 음미하고 걷는다면 우리 주위엔 산티아고 길보다, 제주 올레길보다 걷기에 더 좋은 길이 참으로 많다.

    산림청 후원 ‘숲길 정책의 발전 방향’ 토론회

    “숲길에 스토리를 심어라”


    ‘호모 워커스’의   출현
    “비행기가 점에서 점으로, 버스나 기차는 선으로 가는 여행이라면 걷기는 입체여행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길에 담긴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숲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걷기 문화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선 길의 스토리 찾기가 가장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4월 16일 건국대 상허연구관에서 열린 ‘숲길 정책의 발전 방향’ 토론회에서 패널로 참가한 동아일보 김화성 전문기자(‘길 위에서 놀다’ 저자)는 “숲길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까지 고민해야 할 때다. 길에 스토리를 심어줘야 한다. 숲에 있는 식물 하나하나에도 이야기를 붙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신산행문화 정립을 위한 숲길정책’을 발표한 이미라 산림청 산림휴양등산과장은 “산림청이 꿈꾸는 숲길의 미래는 ‘집 앞에서 걸어서 백두대간까지’를 숲길로 만드는 것”이라며 “산림청은 체계적인 숲길 조성을 위한 중장기 계획(‘트레킹 숲길 네트워크’ 조성 계획) 아래 2016년까지 백두대간, DMZ 트레일을 근간으로 간선과 지선을 합쳐 총 4840km 숲길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 과장은 “숲길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길을 살리는 개념으로 접근하겠다. 숲길 정책 수립과 집행에서 민·관 거버넌스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론회 참가자들의 관심은 단연 ‘숲길의 스토리텔링’에 모아졌다. 사단법인 ‘나를 만나는 숲’ 한광용 사무처장은 “길은 선이 아닌 면, 공간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단순히 길을 새로 만들고 이어붙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길 주변의 이야기를 서로 이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산티아고 길에 순례자가 모이는 이유도 길이 지니는 의미 때문이다. 길에는 걸으며 배우기, 걸으며 성찰하기, 걸으며 치유하기 등 다양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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