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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SURE | 채지형의 On the Road

아스라했던 추억이 살고 있다

머물러 있어 아름다운 섬, 교동도

아스라했던 추억이 살고 있다

아스라했던 추억이 살고 있다

교동향교.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찾으러 갔다가 마음이 허해진 기억, 다들 한 번쯤 있을 터다. 요새는 10년 이상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가게가 드물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달리고, 나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위기감이 온몸을 감싼다.

그럴 때면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섬, 교동도로 향해보자. 월선포 선착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에 오른 듯 시간이 머물러 있는 섬, 교동도.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15분이면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곳이지만, 섬을 거닐다 보면 마라도쯤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멀고 먼 느낌이다.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주민들의 주업이 농사일 만큼 넓디넓은 평야를 품고 있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더 벌이가 좋은 일을 찾아 하나둘 도시로 떠나면서 이제 교동도는 고즈넉한 섬이 됐다.

옛 추억 깨워주는 대룡시장

교동도에서 먼저 찾은 곳은 가장 번화하다는 대룡시장이다. 막상 대룡시장에 가보니 ‘번화하다’라는 단어가 쑥스러울 정도로 한가했다. 지나가는 아저씨를 보고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랬더니 가던 길을 멈추고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더니 “좋은 데서 왔네, 멀리서 볼 것도 없는 여기까지 왜 왔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시장은 조용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돌아다니는 이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300m 남짓한 골목길은 심심하지 않았다. 골목대장 놀이를 하던 그 시절의 골목이 그곳에 살아 있었다. 어쩜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과장을 더하자면, 쿠바의 먼지 쌓인 아바나 거리를 보는 기분이었다.

대룡시장 한가운데 있는, ‘약’이라고 커다랗게 쓴 빨간색 간판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빠뜨렸다. 어머니가 조제실에서 약을 빻던 기억, 약국 한가운데에 있던 연탄난로, 100원 하던 박카스까지…. 평소엔 생각지도 못한 과거의 장면들이 팝콘처럼 마구 튀겨져 나왔다.

반가움에 약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담한 약방 안에는 오래전에 생산이 중단된 약 이름이 선팅돼 있었고, 깨진 유리창에는 깔끔하게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다. 일부러 빈티지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해놓은 것처럼, 어찌나 말끔하던지.

“여기서 약방을 낸 지도 50년이 넘었어. 옛날에는 이렇게 한가하지 않았지. 이 섬에 3만명까지도 살았는걸. 땅이 좋아서 다들 부자였다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람이 많았어. 북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휴전선이 열리기를 기다렸지. 지금은 다들 제 갈 길로 갔지만 말이야.”

동산약방의 나의환(78) 할아버지는 교동도의 살아 있는 역사였다. 할아버지가 그려주는 교동도 이야기는 책 속의 내용이 아니라,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는 바로 이 자리의 이야기였다.

“여기에서 약방 하면서 아이들 모두 번듯한 학교에 보냈어. 걔들이 어디에 사냐고? 여기 없지. 시카고와 서울에 살아. (자식들이) 같이 살자고 하는데, 우린 여기가 편해. 이젠 익숙한 게 좋아.”

말씀이 끝날 즈음 곱게 나이 드신 할머니가 방에서 나오셨다. 약국 한구석의 자그마한 목화나무에 목화가 열렸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16세 소녀 같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동산약방의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골목으로 다시 나섰다. 연말만 되면 갈아엎는 도시의 보도블록과 달리, 바닥은 1970년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밟던 그 보도블록의 패턴을 갖고 있었다. 신발가게를 들여다보니 ‘한국판 크록스’라고 할 만한, 따뜻한 털이 달린 까만 고무신이 수북이 쌓여 있다. 신발가게 앞에 있는 다방에서는 껌 씹는 소리와 올드 팝 ‘마이웨이’의 클라이맥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골목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아스라했던 추억이 살고 있다

1 교동도 대룡시장의 약방. 2, 3 옛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룡시장 골목길. 4 집에 걸어놓은 생선.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함석 문도 자주 눈에 띈다. 지금은 가게 문을 닫을 때 셔터를 내리지만, 옛날에는 직사각형의 함석문 조각들로 문을 닫았다. 시장 중심가의 담벼락에는 생선이 대롱대롱 걸려 있고, 철물점인지 고물상이지 헷갈리는 로터리 상점은 사람은 없이 문만 활짝 열려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시장이지만, 마음에는 참 크게 다가왔다. 뭔지 모를 안정감이 스며들었다. 시장을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이런 위안을 얻게 되다니! 교동도의 젊은이들에게는 답답한 시장일 수 있겠지만, 이기적인 여행자의 마음으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역사가 숨 쉬는 작은 섬

교동도에는 유적도 많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데, 한때는 송도와 한양의 관문 노릇을 했다. 교동향교는 그때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곳. 고려 충렬왕 12년 안향 선생이 공자의 초상화를 들여와 봉안한 곳이다. 향교에는 공자의 신주와 우리나라 유현들의 위폐를 모신 대성전, 유생들이 공부했던 명륜당,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가 있다. 향교 문이 닫혀 있다고 그냥 가면 아쉽다. 왼쪽의 관리사무소에 관리인이 상주하니, 문을 열어달라고 해서 향교를 돌아볼 것.

교동도는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이 유배된 지역이라 연산군 적거지가 있다. 조선 인조 7년 교동에 처음으로 영이 설치될 때 축조된 교동읍성도 교동의 문화유적이다. 그런데 연산군과 관련된 유적이나 교동읍성은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이 훼손됐다. 교동읍성은 주민들이 성곽의 돌을 날라 담으로 쌓기도 했다. 제대로 복원하면 훌륭한 문화유산이 될 텐데 안타까움이 앞섰다.

마을을 돌아보다가 대문도 없는 소담한 집을 발견했다. 낮은 처마 밑에는 수수가 소소하게 걸렸고 그 옆에는 무청이 달려 있다. 담이 예뻐 렌즈에 담고 있는데, 마침 문을 열고 할머니가 나오셨다. 올해 아흔이라는 조일여 할머니는 수수로 비를 만들 것이라고 하셨다. 무청은 시래기로 만들어서 인천 사는 작은아들네로 보내실 거란다. 지난주에는 김장을 해서 아들들에게 다 보내셨단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할머니는 뭔가 생각난 듯 “어쩌지, 집에 먹을 게 마땅치 않은데. 추워서 뭐 좀 먹여 보내야 할 텐데…”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할머니의 그 마음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 할머니의 마음처럼 오랫동안 바뀌지 않고 있어준 교동도가 무척 고마웠다.

강화로 돌아가기 위해 월산포항으로 가는 길.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가교가 세워지고 있었다. 다리가 놓인 뒤에도 교동도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도시로 돌아가면, 잠시나마 ‘빨리빨리’를 잊을 수 있었던 교동도가 금세 그리워질 것 같다.

[ 여 행 정 보 ]
교동도에 들어가려면 강화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한다. 배는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떠난다(화개해운 032-933-4268). 밀물 때는 15분이면 교동도에 닿지만, 썰물 때는 50분이나 걸리니 물때를 알아보고 가는 것이 좋다. 배 운임은 자동차(운전자 포함) 1만4000원, 한 사람에 1500원. 섬 내를 돌아다니려면 승용차를 가져가는 것이 편하다.




주간동아 2009.12.22 716호 (p94~95)

  • 채지형 여행작가 www.traveldesign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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