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3

2009.07.07

흙 움켜진 비장한 ‘바랭이’ 햇살 가득 담은 ‘쇠비름’

  • 입력2009-07-01 13:1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흙 움켜진 비장한 ‘바랭이’ 햇살 가득 담은 ‘쇠비름’

    <B>1</B> 밭에서 자라는 쇠비름과 바랭이. 낭비 없이 생명활동을 한다. <B>2</B> 바랭이 뿌리.<br> <B>3</B> 닭의장풀 뿌리. 아주 작은 솜털조차 자신보다 훨씬 큰 흙덩이를 부여잡고 있다.<B>4</B> 쇠비름나물. 맛은 낯설지만 여름철 보양식이다.

    여름이면 온갖 생명이 왕성하다. 짐승도 나무도 곡식도 다 그러하다. 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한마디로 여름풀은 징글징글할 정도다. 뽑고 돌아서면 또 풀이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풀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고, 김매는 요령도 터득하게 된다. 더 나아가 풀에게서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며, 심지어 어떤 풀은 사람에게 얼마나 소중한 약이 되는지도 깨닫는다.

    예전에 나는 풀은 뿌리가 없으면 다 죽는 줄 알았다. 밭두렁에서 쑥쑥 자라는 쑥을 베어 밭고랑에 깐 적이 있다. 죽은 다음 썩어서 곡식의 거름이 되라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장마 기간에 줄기에서 뿌리가 다시 난 것이다. 쑥은 꺾꽂이로도 번식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부끄럽기도 했거니와 힘들게 그 쑥을 다시 다 뽑아야 했다.

    풀에 대해 알면 알수록 풀마다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이 독특하다는 것에 놀란다. 바랭이를 보자. 이 풀은 뻗어가는 모양새가 거미줄 쳐지듯 방사상(放射狀)이다. 땅바닥을 기며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가다 줄기 마디에서 다시 뿌리를 내린다. 이 변화가 하루 이틀 사이에는 크게 달라지는 게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슬근슬근 뻗어가다가 마디마디 뿌리를 내리고 다시 그 뿌리에서 새롭게 줄기를 뻗어가니 어느 순간부터 그 힘이란! 그럴 때 이 풀을 뽑으려고 하면 마치 지구 전체를 붙잡고 있는 느낌이다. 도저히 사람 손으로 감당이 안 된다.

    마디마디 고비마다 생명으로 뻗어가기

    생명력이 이러니 풀이 어릴 때 뽑아줘야 한다. 바랭이는 외떡잎식물. 뿌리를 뽑으면 수염뿌리가 잘 기른 사람 수염 모양으로 달려 나온다. 뽑힌 뿌리는 작은 흙을 움켜쥐고 있어 생명의 경이로움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결코 죽을 수 없다는 비장함! 한번은 밭에 있는 바랭이를 뽑는다고 다 뽑았다. 그러고 며칠 지나 다시 보니 풀 하나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수십 개 수염뿌리 중 딱 하나가 미처 뽑히지 않고 아주 조금 땅에 묻혀 있었다.



    만일 사람이 이 상황에 처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바랭이는 싱그럽게 살아 있다. 뿌리 한 가닥이라도 땅에 박고 있으면 흔들림이 없다. 식물 내부에서 어떤 비상체제를 만드는가. 한마디로 경이롭다. 이런 풀과 씨름하다 보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거나 자괴감을 갖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된다. 나도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바랭이가 낮은 자세로 땅을 기다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듯, 내게 주어진 이러저러한 기회도 삶의 뿌리가 되지 않겠나. 그러니 작은 기회라도 감사하며 함부로 내쳐서는 안 된다는 걸 배운다.

    가끔 나는 바랭이가 가진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의식을 올린다. 해 뜨기 전, 바랭이 풀잎에 이슬이 싱그럽다.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바랭이 줄기 하나를 딴다. 겉에 묻은 흙을 털어내려고 껍질을 벗긴다. 속살이 드러나면 이를 앞니로 조금 벤다. 씹으면 아삭거리며 풀 맛이 느껴진다. 조금 더 씹으면 단맛이 돈다. 먹고 난 뒷맛이 아련히 남는다.

    애물단지 잡초가 알고 보면 보약

    바랭이 다음으로 들고 싶은 풀은 쇠비름. 이 풀은 요즘 여름 나물로 관심을 모은다. 인터넷에서 판매도 되고, 손수 채집해 요리한 글이 많이 올라온다. 사람들 삶이 자연과 지나치게 멀어지다가 다시 그 구심력을 받는다고 할까. 어느새 애물단지 잡초가 돈이 되는 세상이다. 쇠비름은 5월 말부터 시작해 여름 내내 돋아난다. 장마 전 혹독한 가뭄에도 싹이 나고 그냥 내버려두면 어느 틈에 밭 전체가 붉게 물들 만큼 번진다.

    나는 쇠비름을 보면 참 ‘알뜰한 식물’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낭비가 없다고 할까. 독특한 광합성 덕에 잎이 윤이 나고 통통하다. 뽑는다고 만지다 보면 손끝에 닿는 느낌도 좋아 슬그머니 입에 침이 고이기도 한다. 가뭄과 뜨거운 햇살에도 쇠비름은 흔들림 없이 윤기와 통통함을 자랑한다. 자연이 주는 넉넉함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한다.

    쇠비름은 줄기와 잎에 물기를 많이 머금고 있다. 뿌리째 뽑아 햇살 아래 며칠씩 둬도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그 생명력 때문인지 사람도 이를 즐겨 먹으면 오래 산다고 장명채(長命菜)라고도 부른다. 또한 쇠비름은 다섯 가지 빛깔을 가지고 있다고 오행초라 부른다, 잎은 푸르고, 줄기는 붉다. 꽃은 노랗고 열매는 검으며 뿌리는 희다. 그래서인지 약성도 좋아 한방에서는 마치현(馬齒) 이라 부르며 다양한 약재로 쓴다. 피가 맑아지고 피부가 좋아지며 오줌이 잘 나온단다. 내가 자랄 때 곪거나 부스럼이 나면 만병통치약처럼 귀하게 쓰이던 이명래 고약의 주재료도 바로 쇠비름이다.

    사실 쇠비름은 아주 잘 무치지 않으면 나물로 맛이 좋은 편은 아니다. 밍밍한 맛에 끈적끈적 미끈미끈하다. 대신 약이자 생명력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면 먹을 만하다. 쇠비름나물은 요리법도 간단하다. 끓는 물에 적당히 데쳐 찬물에 헹군 뒤 꼭 짜서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고추장, 간장, 들기름, 다진 마늘로 양념장을 만들어 버무리면 된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한 식감이지만 익숙해지면 그만의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정 낯설면 다른 나물에 쇠비름을 조금 섞으면 된다. 이를테면 비름나물이나 고춧잎나물처럼 익숙한 나물과 무치면 이질감 없이 먹을 수 있다. 서양에서는 쇠비름을 상추와 함께 샐러드에도 쓴다니, 먹기 나름이다.

    쇠비름 외에도 생명력이 왕성한 먹을거리 풀은 많다. 비름, 닭의장풀, 명아주…. 뜨거운 여름, 지치지 않고 충만한 삶을 원한다면 들판에서 저절로 자라는 나물을 뜯어 무쳐 먹어보자. 생명력이란 꼭 먹어서만 생기는 게 아니다.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는 모든 과정에서 이뤄지지 않겠나.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