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2

2007.04.24

파시즘은 드라마를 먹고 자란다

고구려 얼 계승 삼족오 제복 해프닝…‘허구’드라마가 어느 순간 실재 역사로 둔갑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7-04-18 18: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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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즘은 드라마를 먹고 자란다

    히틀러유겐트(사진 위)와 유사성 논란을 불렀던 삼족오소년소녀대 발대식 모습.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해프닝이 있었다. 어느 단체에서 고구려 기상을 되살리기 위해 소년소녀단을 창단했다고 한다. 21세기에 민족의 기상을 계승하려고 스카웃을 조직한다는 발상도 우습지만, 디지털 시대 소년 소녀들에게 준(準)군사적 디자인의 제복을 입히는 획일성의 취향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난히 민족주의적인 한국 대중이 고구려의 얼을 이어나가겠다는 데 시비를 걸 것 같지는 않고, 아이들에게 유니폼 좀 입혔다고 그게 국가주의적인 한국 대중의 취향을 거스를 것 같지도 않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고구려의 얼을 계승하겠다는 장한 소년 소녀들이 입고 있는 제복이 공교롭게도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유겐트가 입었던 유니폼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게 아닌가. 게다가 아이들의 팔에는 완장이 채워져 있는데, 또다시 공교롭게도 그 색깔이 빨간색. 거기에는 하얀색 동그라미 안에 검은색으로 삼족오가 그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히틀러 유겐트의 깃발이다. 듣자 하니 행사 리허설에서는 오른팔을 43도로 치켜올리는 나치식 경례까지 등장했단다.

    누리꾼들이 삼족오소년소녀대와 히틀러유겐트의 유사성을 지적하자, 주최 측에서는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한 누리꾼들에게 한때 법적 대응도 검토했지만 행사를 망치고 싶지 않아 그만뒀다”고 발끈했다. 나치가 무슨 인간 별종인 줄 아나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나치 역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넘쳐흐르는 조국애와 민족애를 주체 못해 유니폼을 입고 군사적 혹은 준군사적 집단을 이루기를 좋아했을 뿐. 정치적 파시즘은 보통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가진 이런 심정적 파시즘의 토양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히틀러유겐트

    물론 이 소년소녀대를 만든 이들은 그것을 ‘스카웃’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독일에서도 어린 시절 히틀러유겐트 대원이었던 노인들은 그 시절을 ‘피크닉’ 비슷한 것으로 기억한다. 어른들이야 거기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도, 어린 시절에 같은 또래 아이들이 모여 함께 거리를 행진하고 자연으로 나가 텐트 치고 야영하는 것처럼 신나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독일의 노인들 중에는 히틀러유겐트를 유년기의 모험과 낭만으로 기억하며 거기에 진한 향수까지 드러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고구려 삼족오 대축제’의 홈페이지는 이런 인사말로 방문객을 맞는다. “삼족오는 우리 문화이자 역사입니다. 역사가 지금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하늘과 강물이, 황금사슴이 ‘잃어버린 역사’의 회복을 부르짖습니다. 당신이 바로 역사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뜻과 힘을 모아 잊혀진 고구려의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할 때입니다. 미래강국 COREA의 건설을 위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일, 그것은 살아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의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말이 그리 도발적으로 들리지 않지만, 오늘날 서구에서 이런 어법은 ‘극우파’의 언사로 간주된다. 나치도 ‘모두 뜻과 힘을 모아’ 잊혀진 북방 기마민족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려 했다. 그게 바로 우수한 아리아 인종의 민족서사다. 히틀러가 한 일도 패전국 독일을 미래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 아니었던가. 나아가 남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 멋대로 설정한 국가적 목표를 남에게 ‘가장 고귀한 의무’로 덮어씌우려 드는 고질병 역시 우익 전체주의자들이 잘 고치지 못하는 버릇이다.

    로고스에서 뮈토스로의 퇴행

    “수고 많으셨습니다. KBS, MBC, SBS! 1500년 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삼족오를 깨워줘 고맙습니다. 몰염치한 중국의 동북공정이, 일본의 독도공정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자존심과 역사의식을 분연히 일깨워줘 너무도 고맙습니다!” 홈페이지의 인사말은 3개 방송사에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마도 MBC의 ‘주몽’, KBS의 ‘대조영’, SBS의 ‘연개소문’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고구려 역사기념관’과 ‘삼족오소년소녀대’라는 현실이 드라마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실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어린이들은 영화가 끝나도 온몸에 영화를 흠뻑 뒤집어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스파이더맨’을 봤다고 하자. 그들은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두 손바닥을 벽에 대고 거기에 들러붙는 흉내를 내려 할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가상과 현실, 허구와 실재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어린아이만의 일일까.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헤켈의 가설은 인간사회에도 적용돼 인류의 유년기에는 성인들도 둘을 구별하지 못했다. 바로 신화의 시대다.

    문자의 등장과 더불어 신화(mythos)의 시대도 저물고 이제 이성(logos)의 시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역사는 늘 일직선으로 발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이성에서 신화로 퇴행하는 변괴가 일어나기도 한다. 19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그 현상이다. 문화사적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인간의 정신이 로고스에서 다시 뮈토스로 퇴행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나치들은 대중의 머리에서 냉철한 비판적 역사의식을 지우고, 그 빈자리에 뜨거운 감동을 주는 북방 기마민족의 신화를 채워넣으려 했다.

    파시즘은 드라마를 먹고 자란다

    지난해 열린 ‘고구려 삼족오 대축제’(왼쪽)와 고구려 쌍영총 고분벽화의 ‘삼족오’.

    역사냐 신화냐

    “역사의식을 분연히 일깨워줘 너무도 고맙습니다!” 홈페이지의 인사말은 매우 징후적이다. 아무리 역사를 표방해도 드라마는 ‘역사’일 수 없고 그저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발견되는 오류와 왜곡들은 그것들이 의도된 게 아닌 한 그냥 너그럽게 봐줘야 한다. 대신 드라마를 보고 ‘역사의식’을 얻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재미’ 혹은 ‘감동’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식’을 그것도 ‘분연히’ 일깨워줘 고맙다는 말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삼족오는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동물이고, 고구려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발견되는 문양이다. 또 고구려에서 삼족오를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근거도 실은 없다. 게다가 삼족오는 “1500년 동안이나 깊이 잠들어 있던” 것. 우리 민족에게 이른바 ‘정체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삼족오가 없었던 그 1500년 동안에 형성된 것일 게다. 따라서 삼족오를 되살려 민족의 상징으로 삼자는 주장은 사실 로고스에 속하는 냉철한 ‘역사적 의식’이 아니라, 뮈토스에 해당하는 ‘신화적 의식’이다.

    신화 속에서 허구와 실재는 하나가 된다. 허구에서 나와 현실이 된 삼족오소년소녀대는 바로 이 신화적 의식의 산물이다. 일찍이 그리스의 정신이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바뀔 때, 그리하여 철학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싸울 때, 철학자들은 종종 이성을 가지고 신화를 비웃곤 했다. 삼족오 문양을 간판에 그려넣은 광화문 어느 삼계탕집의 간판은 “만약 말(馬)들이 신상을 만든다면 신을 말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말처럼 신화 파괴적이다. 어쨌든 그 간판이 행사하는 시각적 도발에는 모종의 통쾌함이 있다.

    미디어가 역사 의식을 바꾼다

    최근에 일어난 고구려 드라마 붐, 그 결과 생긴 삼족오 해프닝은 대중의 의식이 로고스에서 뮈토스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서 문자가 소리와 그림으로 변해가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다시 찾아온 영상문화와 구술문화는 로고스적 사유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그리스 사회를 닮았다. 아직 역사도 없고 철학도 없고 경전도 없던 시절에는, 시와 조각과 건축 같은 ‘이미지’로 구현된 신들의 이야기가 곧 역사이자 철학이자 종교였다. 역사의식을 드라마로 대체해버리는 상황. 비슷하지 않은가?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의 뮈토스는 나치의 것처럼 위험하지는 않다는 점. 중국은 10배가 넘는 인구를, 일본은 10배가 넘는 경제력을, 러시아는 10배가 넘는 영토를 갖고 있다. 때문에 한국판 신화는 독일의 것처럼 나라 밖으로 뻗어나갈 수 없고 고작해야 나라 안의 ‘자위’에 그칠 뿐이다. 게다가 한국의 뮈토스는 공격적이라기보다 방어적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공정에 허구로나마 맞서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대적할 수 없는 상대에게 늘 ‘주관적 승리’를 거두는 아Q의 애처로움마저 있다.

    문자와 함께 인간은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문자문화의 몰락과 더불어 역사주의의 시대도 저물어가고 있다. 역사 이전과 역사 이후는 문자 대신 영상과 구술을 주요한 소통 매체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래서일까? 역사시대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역사 이전의 뮈토스가 역사시대의 종언과 함께 역사 이후에 부활하고 있다. 최근 일어난 고구려 붐의 가장 큰 원인은 동북공정이나 독도공정이 아니라, 어쩌면 이 미디어의 변화가 대중에게 끼친 의식의 변화에 있는지도 모른다.

    - 진중권의 교양 돋보기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독자 여러분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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