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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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있는 者 막 쓰고, 필요한 者 못 쓰고 제대혈 천태만상

미용·항노화 목적 불법시술 만연 … 관련자 엄벌하고 ‘공적 인프라’로 관리해야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7-01-06 16: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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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대 국회 시절 한 의원 보좌관이 제게 ‘제대혈 그거, 우리 의원님이 맞아보고 좋다 그러던데 왜 못 쓰게 하는 거예요’ 하고 묻더라고요. 명백한 불법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기에 깜짝 놀라 쳐다보니 ‘금지해도 맞을 사람은 다 맞잖아요. 차라리 허용해주는 게 낫지 않나요’ 하더군요.”

    의사 출신 보건학 박사로 의료정책 분야에서 일하는 한 인사가 전한 얘기다. 차광렬 차병원그룹 총괄회장 일가의 제대혈 불법시술 의혹이 불거진 직후였다. 이 인사는 해당 의혹에 대해 “사건의 부도덕성 때문에 분통이 터지지만 놀랍지는 않은 일”이라며 “의원 보좌관 얘기를 듣고 좀 알아보니 제대혈 주사가 미용, 항노화 등에 효과가 좋다는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 유행하고 있더라. 일부 사설 제대혈은행은 힘 있는 사람에게 로비용으로 불법 제대혈시술을 해준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차병원에서 벌어진 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제대혈은 가진 자의 영양제?

    제대혈은 사람 제대, 즉 탯줄에 들어 있는 혈액을 뜻한다. 분만할 때만 제한적으로 채취할 수 있는 이 피 안에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 혈액세포를 만드는 어머니 세포(조혈모세포)가 다량 함유돼 있다. 이 때문에 백혈병 등 각종 난치성 혈액질환을 치료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대혈 일정량을 주사기 등을 통해 체내에 투여하는 것을 ‘이식’이라고 하는데 1988년 프랑스에서 5세 어린이가 제대혈 이식을 통해 혈액질환을 치료하면서 제대혈 이식이 세계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98년 급성백혈병 환자가 제대혈 이식으로 새 생명을 얻었고, 이후 관련 연구가 확대됐다. 보건복지부와 대한혈액학회가 펴낸 자료집 ‘제대혈 길라잡이’에 따르면 소아 제대혈 이식 후 5년 생존율은 약 50% 수준이며, 현재 전국 46개 지정의료기관에서 제대혈 이식시술을 한다. 이렇게 질병치료 목적으로 관계 당국의 승인을 얻어 제대혈을 이식하는 건 문제가 없다. 비용도 상당 부분 국민건강보험이 지원한다.



    문제는 제대혈 안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성분, 즉 줄기세포를 사용할 목적으로 제대혈을 투여하는 행위다. 줄기세포는 널리 알려졌듯 체내에서 여러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세포다. 제대혈에는 줄기세포 역시 풍부하게 들어 있다. 이 때문에 과학계에서는 제대혈 내 줄기세포를 의료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신경계 손상, 심혈관계 질환 등 각종 난치병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부 학자는 면역력 향상이나 주름 개선, 피부 재생 등 항노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둘 다 기대와 주장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의료계에서는 이를 확인하려는 연구를 계속 진행 중이다. 현행 ‘제대혈 관리 및 연구에 관한 법률’(제대혈법) 등 관련 법령도 제대혈을 연구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하지만 인체 투여는 엄격히 제한한다. 첫째는 안전성과 유용성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검증되지 않은 용도로 쓰기에는 제대혈이 매우 귀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제대혈은 오로지 생명 탄생 과정에서만 만들어진다. 양도 한정돼 있다. 신생아 한 명에게서 채취할 수 있는 제대혈 1유닛(unit)은 25cc에 불과하다. 제대혈법 제2조에 따르면 이 피를 모으는 방법은 두 가지다. 산모가 분만 과정에서 발생한 제대혈을 ‘비혈연(非血緣) 간 질병치료 또는 의학적 연구 등을 위해 대가 없이 기증’하거나 ‘신생아 또는 혈연 간 질병치료를 위해 일정 기간 보관하도록 위탁’하는 것이다. 이때 전자는 기증제대혈은행, 후자는 가족제대혈은행에 보관되는데, 연구에 사용되는 건 주로 전자인 기증제대혈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제대혈 기증 절차는 간단치 않다. 산모는 질병 검사를 위해 추가로 혈액을 뽑아야 하고, 10여 장에 달하는 동의서에 서명도 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희생정신’(제대혈법 제3조)으로 이처럼 번거로운 절차를 감수하면서 ‘대가 없이’ 제대혈을 기증하는 산모가 없으면 관련 연구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윤종현 보건복지부 제대혈위원회 위원장(서울대 의대 검사의학교실 교수)이 “제대혈은 국가 전체가 소중히 관리해야 할 공공인프라”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정림 대구파티마병원 기증제대혈은행장(혈액종양내과 전문의)도 “어머니가 아기를 낳자마자 그 피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만큼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 또 있겠느냐”며 “그 귀중한 물질을 함부로 사용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최근 발생한 ‘차병원 사건’은 이러한 숭고한 뜻을 산산조각 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의사 출신인 차광렬 총괄회장과 아내, 아버지 등은 차병원 제대혈은행에 기증된 제대혈을 이용해 총 9차례에 걸쳐 불법시술을 받았다. 이 과정에 동원된 차병원 의료진은 관련 진료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의료법뿐 아니라 의료윤리까지 어긴 것이다. 김명희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사무총장(예방의학 전문의)은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제대혈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함부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을 할 수 없다”며 “그런데 의학적으로 효능이 검증되지도 않은 제대혈 시술을 ‘배운 사람’ ‘가진 자’가 중심이 돼 해왔다는 데 분노를 느낀다”고 밝혔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제대혈 불법사용은 그 전에도 빈번했다. 2014~2016년 제대혈 문제를 수사한 이용택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팀장은 일부 제대혈은행이 산모가 가족 질병의 치료를 위해 위탁해둔 제대혈까지 빼돌려 돈을 받고 팔았다고 밝혔다. 당시 경찰에 적발된 제대혈은행은 위탁받은 제대혈로 줄기세포를 만들어 유닛당 100만~200만 원씩 받고 유통업체 11곳에 넘겼다. 유통업자들은 여기에 300만~400만 원씩 웃돈을 얹어 다시 병·의원에 판매했고, 이를 사들인 의사들은 여러 병원에서 불법으로 줄기세포 이식시술을 하며 대가로 회당 2000만~3000만 원씩 받아 챙겼다. 한 80세 남성이 제대혈 27유닛을 시술받고 1억8000만 원을 지급했을 만큼 이 시술을 받은 ‘환자’들의 씀씀이는 컸다. 이용택 팀장은 “해당 주사를 맞은 사람 가운데 난치성 질환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상당수는 피부미용과 노화 방지를 원하는 건강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들은 ‘공공재’ 제대혈을 불법적으로 사용하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제대혈법에 주사 맞은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유통업자와 의사 등만 제대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제대혈 시술받아도 처벌 못 해

    차 총괄회장 일가 역시 현행법으로는 처벌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층의 일탈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서울 강남 등지의 일부 클리닉은 겉으로는 ‘탈모 치료’ ‘안티에이징’ 등을 걸어놓고 암암리에 줄기세포 시술을 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 제대혈은행 관계자는 “건강한 사람이 제대혈을 맞을 때 어떤 효능이 있는지 의학적으로 검증된 건 없다. 하지만 시술받은 사람이 ‘주사를 맞고 나니 골프가 잘 된다’ ‘회춘했다’고 입소문을 내니까 다른 사람들도 ‘나도 한 번 써볼까’ 하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한때 일부 산부인과병원은 산모 모르게 무단으로 제대혈을 채취해 관련 업체에 팔아넘기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왕절개를 위해 마취한 산모가 깨어나지 않은 틈을 타 신생아 탯줄에서 임의로 제대혈을 빼낸 것이다. 2011년 제정된 제대혈법 제8조에 ‘제대혈은 산모가 동의한 경우에 한하여 채취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간 것은 이러한 사건이 적잖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채취와 유통 관리가 제대로 됐는지 알 수 없는 제대혈을 시술하는 게 건강에 좋을지 의문을 표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제대혈 전문가는 “차 총괄회장이야 자기 병원에 있는 제대혈 중 좋은 걸 골라 자기가 고용한 의사에게 시술받았으니 아마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밖의 사람은 대체 뭘 믿고 제대혈을 맞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행 제대혈법에 따르면 가족제대혈은행에 보관하는 제대혈은 B형간염, C형간염, 거대세포바이러스,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인체T림프영양성바이러스, 매독 검사 등을 안 해도 된다. 이런 제대혈을 잘못 맞으면 에이즈나 간염, 유전적 질병 등에 걸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제대혈은 섭씨 영하 196도 이하에서 보관해야 변질되지 않는다. 불법업자들이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그렇게 철저하게 관리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기증제대혈은행을 살리자”

    문제는 비윤리적인 의사와 힘 있는 계층이 제대혈을 ‘쌈짓돈’처럼 빼 사용할 경우 정작 심각한 질병으로 제대혈 이식이 필요한 사람은 이용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윤종현 위원장은 “언젠가 획기적인 연구 성과가 나와 제대혈로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조혈모세포 이식을 제외하고는 관련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단계다. 제대혈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갖기보다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순간에 쓸 수 있도록 더 많은 제대혈을 보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전문가들은 기증제대혈은행 활성화를 제안한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15년 말 현재 우리나라에 보관된 제대혈은 총 59만6346유닛이다. 이 중 92%인 54만8889유닛이 가족제대혈이고, 기증제대혈은 4만7457유닛에 불과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가족제대혈 보관 열풍이 불면서 많은 산모가 자녀의 제대혈을 위탁보관하고 있는 덕분이다. 2015년 새로 모인 가족제대혈도 2만6780유닛으로, 기증제대혈(2687유닛)의 10배에 달한다. 그러나 이렇게 쌓여 있는 가족제대혈이 정작 필요한 순간 유용하게 쓰일지는 의문이다. 혈액종양내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혈액 관련 난치병으로 제대혈 이식을 받는 환자는 대부분 자신과 HLA(인간의 조직적합항원) 일치도가 높은 다른 사람의 제대혈을 사용한다. 이에 대해 한 제대혈 전문가는 “제대혈을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건 주로 소아 환자인데, 최근 전문의들은 어린 시절 난치병에 걸린 환자는 유전적으로 문제 소인을 갖고 있을 것으로 의심한다. 따라서 되도록 그런 소인이 없는 사람의 제대혈 중 거부반응이 덜 일어나는 것을 찾아 이식하려 노력한다”고 밝혔다. 이 전문가는 또 “제대혈 품질도 중요하다. 제대혈 이식 성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유핵세포 수인데, 이는 산모와 아기의 건강 상태 등에 따라 차이가 난다. 기증제대혈은행은 관련법에 따라 제대혈 보관 처리 전 상태에서 유핵세포 수가 8억 개 미만인 제대혈은 보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제대혈은행 중에는 3억 개 이상이면 보관해주는 업체도 있다. 이 경우 현재 의학기술 수준에서는 거의 사용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일부 가족제대혈은행의 관리 부실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때 제대혈을 9만 유닛 이상 보관했던 유명 제대혈은행을 보건복지부가 현장 실사할 때 참여했던 한 민간 전문가는 “제대혈 관리 장부를 잘 정리하지 않아 고객이 맡긴 제대혈이 제대로 보관되고 있는지 확인조차 어려웠다”고 밝혔다. “가족제대혈은행에 제대혈을 보관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만, 영리만 목적으로 하는 업체를 잘못 선택하면 자칫 돈만 내고 쓸 수 없게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게 이 전문가의 의견이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6년 7월까지 치료 목적으로 사용된 가족제대혈은 139유닛에 그친 반면, 기증제대혈은 371유닛으로 2.6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제대혈이 10배 이상 많이 보관된 상황에서 나타난 결과다. 신수 서울시 기증제대혈은행장(서울대 의대 검사의학교실 교수)은 “최근 발생한 제대혈 불법시술 사건 때문에 제대혈은행 전반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까 봐 걱정”이라며 “해당 병원을 제외한 국내 기증제대혈은행은 대부분 관련 법령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에 따라 제대혈을 관리하고 있다. 잘 관리된 기증제대혈이 많아질수록 필요한 제대혈을 사용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만큼 검증된 기증제대혈은행에 제대혈을 기증해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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