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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門不出’ 두문동 72賢을 찾아서④|신창 맹씨의 맹유와 맹희도

고려 향한 父子의 충절

두문동 은거하다 맹유는 순절 … 맹희도는 한산·온양에 은거하며 태조 부름도 사양

고려 향한 父子의 충절

고려 향한 父子의 충절

충남 아산시 배방면 맹씨행단 마을에 있는 맹희도의정려문과 효자리 비석.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합동 제사가 최초로 치러진 것은 1751년(영조 27) 10월21일이다. 영조의 명에 의해 개성유수 서종급(徐宗伋)이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 읽은 제문에는 “여기 고려의 백성 중에 72인이 있어 조선의 신하도 하인도 아니 되고 그 뜻을 스스로 지켰네. …오직 조씨, 임씨 그리고 맹씨 성을 가진 이, 전하는 사람은 이 셋뿐이고 나머지는 찾아볼 기록이 없네”라고 했다.

조씨는 조의생(曹義生)이고 임씨는 임선미(林先味)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맹씨 성을 가진 이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기록은 그냥 맹성인(孟姓人·맹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적고 있는데,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맹호성(孟好誠)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맹씨의 가장 큰집이라 할 수 있는 신창(新昌) 맹씨 족보에는 맹호성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맹씨 문중에서는 맹호성이 혹시 맹유(孟裕)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다.

맹씨 집안에서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인물로 맹유와 맹희도(孟希道) 부자가 있다. 청백리 맹사성(孟思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다. 맹희도가 머물렀던 집은 두문동 72현이 머물렀던 공간 중에서 유일하게 현존한다. 그곳이 바로 온양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亶)이다. 맹씨행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건물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고려식 건축물인 좌우 대칭형의 工 자형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27.5평 크기다. 1482년(성종 13)에 수리했고 그 뒤로도 세 차례에 걸쳐 고친 기록이 있다.

청백리 맹사성의 조부와 부친

고려 향한 父子의 충절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에 있는 맹희도의 효자리 비석과 맹사성의 효자리 비석.

맹씨행단에는 맹희도가 살았을 무렵부터 심어져 있던 것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처럼, 이 행단에서도 맹희도가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맹씨 문중에서는 맹유는 서두문동으로 들어갔고, 맹희도는 동두문동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전한다. 그러다가 맹유는 조선 개국 세력이 두문동을 불지를 때에 순절(殉節)하고, 맹희도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에 은거하게 됐다고 한다.

어찌하여 맹희도는 한산까지 내려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한산은 목은 이색의 고향인데, 혹시 그와 인연이 있어서 그런가 싶지만 딱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목은 이색은 맹사성이 문과 초시와 복시에 장원급제할 때 심사관이었다. 그 당시에는 과거 심사관과 합격자 사이는 사제의 인연이 맺어졌기에 둘 사이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고려 향한 父子의 충절

최영 장군이 살았고, 맹희도가 살았던 맹씨 고택.

한산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2km쯤 가면 축동저수지가 있는 축동리가 나온다. 축동리 한복판이 맹골이다. 맹씨들이 살았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현재는 주민 27가구 중에서 맹씨는 한 가구도 살지 않지만, 맹골 언덕 위에 돌기둥처럼 생긴 오래된 비석이 있다. 1392년 초에 고을 관리와 마을 호장(戶長)이 함께 세운 맹희도의 효자리(孝子里) 비가 있고, 그 옆에는 1399년에 세워진 맹사성의 효자리 비가 있다.

효자리 비가 그곳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맹희도가 그 동네에 한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맹사성이 1391년과 1408년에 한주(韓州·지금의 한산)로 유배된 것도, 아버지가 살던 동네 한산과 인연이 있어서 취해진 조처로 보인다.

한산 축동리에 살던 맹희도는 온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여기에는 최영 장군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였다. 맹사성의 부인은 최영 장군의 손녀였다.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와 최영 장군은 한 살 터울로 개성에서부터 교류하던 사이였다. 두 집안은 서로 이웃해 살았는데, 맹사성이 최영 장군 집의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먹으려다 혼이 난 게 인연이 돼 사돈지간이 되었다.

온양의 맹씨행단은 본래 최영 장군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지은 집이다. 물론 최영 장군도 살았는데, 1388년 최영 장군이 처형된 뒤로 그의 자식들도 화를 입어 온양 집이 황폐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이 집을 개수해 들어오면서 맹희도는 “비록 빈한한 국면이나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리라. 또한 정밀하게 역학을 연구하여 후생을 교육한다면 금학(今學)이 스스로 깃들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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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 맹씨행단 마을에 있는 맹씨 정려각과 맹사성의 시조비.

맹유의 위패 개성 두문동 서원서 모셔와

맹희도는 온양에 머물면서 태조가 온양에 행차하여 불러도 몸이 아프다며 나아가지 않았다. 맹사성의 스승인 권근(權近)이 “사군자(士君子)는 나와서 정사를 돌보아야 할 때입니다. 선생은 유독 끝까지 숨어 있을 것입니까? …나는 장차 선생과 같이 은둔한 선비들이 나와서 문화(文華)를 진작하고 태평세월을 빛나게 하여 훌륭하게 정사를 도모하기 바라니 선생께서는 마땅히 힘써야 할 것입니다”고 간곡히 청을 하기도 했지만 응하지 않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 맹사성이 조선에 충성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맹씨행단에는 맹유와 맹희도와 맹사성 3대를 함께 모신 사당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매년 음력 10월10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2004년부터는 양력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세덕사에 모셔진 맹유의 위패는 개성 두문동 서원에서 모셔온 것이다. 일제시대에 두문동 서원이 폐쇄될 때, 위패를 모셔가라는 연락이 와서 문중에서 세 분(맹호성, 맹유, 맹희도)의 위패를 모셔왔다. 그중에서 맹호성은 조상임을 확인할 수 없고, 맹희도의 위패는 이미 있어서 두 위패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금 세덕사에 모셔진 세 위패는 각기 다른 사당에서 모셨던 것인지라 생김새가 다르다.

맹유의 묘는 실전(失傳)되고, 맹희도의 묘는 아산시 법곡동에 있다. 영조는 1750년 9월에 온양으로 온행(溫行·온양 행궁 행차)을 왔다가 맹희도의 묘가 부근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손수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충효를 대대로 힘써왔으며, 청렴과 결백은 가문의 명예니라”라고 쓴 어필(御筆) 현판을 내렸다.

아버지 대에서는 충효를 지켜 명분을 세우고, 아들 대에서는 청렴한 관리가 되어 이름을 높였으니, 두 왕조 사이에서 명분과 실리를 다 차지한 집안으로 맹씨 집안만한 데도 없다.





주간동아 2005.11.08 509호 (p88~89)

  • 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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