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9

2004.11.11

현실 고통 실종, 난치병 로맨스

  • 듀나/ 영화평론가 djuna01@hanmail.net

    입력2004-11-05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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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 고통 실종, 난치병 로맨스
    비극적인 로맨스는 난치병과 희귀병의 진열장 같다. ‘러브 스토리’와 ‘라스트 콘서트’, ‘가을동화’의 백혈병, ‘편지’의 뇌종양, ‘천국의 계단’의 안암, ‘…ing’의 홀트오람 신드롬, ‘우리들의 천국’의 재생불량성빈혈, ‘완전한 사랑’의 특발성 폐섬유화증…. 장르의 역사가 깊어지고, 이 장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지는 동안 작가들은 진부한 이야기를 커버할 새로운 병을 찾아나선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또는 이 영화의 원작인 TV 프로그램 ‘Pure Soul’)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이 장르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았던 병을 찾아냈다. 알츠하이머병. 보통 65살 이후에 생기는 노인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10% 정도는 그보다 젊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일본엔 29살에 발병한 환자도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관객들의 눈물을 쥐어짜기로 작정한 주인공은 27살의 여성이다. 보도자료의 정보가 맞다면 기네스 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별다른 학구적 관심이나 호기심도 드러내지 않지만.

    알츠하이머병을 끌어다놓고 안심했는지, 영화는 난치병 로맨스의 진부한 설정을 그대로 갖다 쓴다. 건축가를 꿈꾸는 공사장 일꾼과 건망증 심한 사장 딸이 연애하고 결혼한다. 한창 행복하게 살려는데… 그만 여자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둘은 남은 시간 동안 울고 애걸하고 달아나고 쫓는다.

    이 진부한 이야기를 차별화하는 것은 육체보다 정신을 먼저 갉아먹는 알츠하이머병의 성격이다. 영화는 이 병을 극도로 추상화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알츠하이머병은 그냥 기억이 사라지는 질환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 질병을 다음과 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만약 그 기억이 사라진다면 사랑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괜찮은 질문이지만 알츠하이머병은 필립 K. 딕식 기억 제거술이 아니고, 이 영화 역시 SF가 아니다. 주제가 추상화하고 영화가 전통적인 한국 멜로드라마의 공식과 이미지를 따르자 영화는 공허해진다. 영화 어디를 봐도 알츠하이머병 환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여자 주인공이 가끔 건망증에 시달리지만 그건 귀여운 애교 이상은 아니다. 증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뒤에도 우리의 여자 주인공은 여전히 예쁘고 공허한 공주표 외모를 유지하고, 남자 주인공은 그녀에게 변함없는 순정과 숭배를 바친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마치 연습장 표지와 같은 파스텔 톤의 예쁘고 정갈한 이미지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비극적인 로맨스는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일 때 성공적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그 운명의 무게는 마땅히 질병에 대한 현실적인 고통이었어야 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껍질만 있는 영화처럼 보이는 이유도 예쁜 로맨스의 외피를 위해 그 무게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현실 고통 실종, 난치병 로맨스
    Tips

    필립 K. 딕 1928~82년. 대표적인 SF 소설 작가로 ‘블레이드 러너’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까지 수많은 할리우드 공상과학 영화의 원작이 그의 작품이다. 미래사회에 대한 뛰어난 상상력과 통찰이 그의 소설의 특징이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감독 이재한은 뉴욕대학 영화과를 나와 ‘The Cut Runs Deep’(2000)을 연출했다. 이 영화로 스웨덴 예테보리 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받는 등 두각을 나타냈으며, 가수 ‘보아’ 등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소설가 김영하가 각색에 참여했으며, 주인공은 손예진과 정우성이 맡았다.



    영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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