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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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시대’ 물 건너가나

  • < 이종수 / 연세대 교수·행정학 >

    입력2004-12-20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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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시대’ 물 건너가나
    또다시 여름방학에 속았다. 여름방학이 시작할 무렵마다 알찬 연구와 휴식을 계획하지만, 개학 때가 되면 아쉬움만 남는다. 하기야 초등학교 시절부터 속아온 것임에라.

    올 여름방학에는 그래도 큰일이 있었다.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하는 동안 이루지 못한 유럽여행을 하였다. 학위를 하는 동안에는 시간과 비용이 아까워 여행할 엄두도 못 냈다. 귀국한 지 8년 만에 드디어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영국 등을 둘러보았다.

    필자가 영국에서 유학을 하긴 하였지만, 사실 영국과 유럽 대륙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정치·문화·경제적 이해 면에서 영국은 유럽이면서 동시에 유럽이 아니다. 정서적으로도 영국은 유럽 대륙과 일정한 거리와 경쟁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번은 도버해협에 안개가 짙게 낀 적이 있었다. 영국의 한 신문은 이날 날씨를 전하면서 ‘Continent Isolated’(대륙, 고립되다)로 제목을 뽑았다. 작은 섬나라인 영국이 고립되면 되었지, ‘대륙 고립되다’라니! 영국과 유럽간 자국중심적 사고와 경쟁의식, 차이를 엿보게 하는 예다.

    여행일정에서 나를 가장 압도한 것은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이었다. 이 지구상의 어떤 왕궁이나 건축물이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있을까? 베드로가 순교한 그 자리, 자기가 섬기는 예수님과 동일한 모습으로 죽을 수는 없다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자리에 세운 성당이다. 베드로 성당은 유럽문명 전체가 어느 정도 기독교에 바탕을 두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한 인간의 신앙과 희생이 열매 맺을 수 있는 엄숙한 역사의 규모 앞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스와 로마는 역시 세계 문명사의 초기 중심축을 이룬 곳이었다. 초기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에게해에서 로마가 군림한 지중해로, 다시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대서양으로 세계의 중심축은 이동해 갔다. 그러나 유럽이 세계 문명의 중심축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위스의 그림과 같은 마을은 인간의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영위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는 인류의 바람직한 공동체 구성양식을 앞장서 고민하고 있다. EU(유럽연합)의 15개 회원국 중 13개국이 2002년 2월부터 자국화폐 대신 유로머니를 단일통화로 사용하며 경제적·정치적 통합 노력을 함께 경주한다.

    20세기 말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급속한 발전세를 보이자, 21세기는 태평양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등장했다. 그러나 온다는 태평양 시대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성장세가 둔화했음은 물론, 이 지역 국가들의 평화적 공존과 협력체계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일본의 역사왜곡 파동으로 갈등과 긴장의 파고를 경험하였다.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저발전 상태를 보이는 것은 아시아의 비극이라 할 만한 문제다. 아시아 지역이 태평양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과 함께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유럽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내리는 날 우리 신문들은 모두 ‘만경대 정신’을 둘러싼 소요와 갈등을 보도하였다. 259만 명을 희생시킨 비극적 한국전쟁이 불과 48년 전의 일이었음을 실감나게 하는 순간이었다.

    집권세력이나 정치가들이 떠벌리는 것처럼, 태평양 시대는 쉽사리 올 것 같지 않다. 태평양 시대를 맞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분단과 균열 그리고 자해적인 무한경쟁을 극복해야 하는 고달픈 작업이 선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 역시 이 시대의 주연배우들에게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민초들의 자각과 노력이 여기서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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