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9

2001.01.25

“대학생 선생님한테 뭘 배우나요?”

보습학원들 인건비 절감 위해 무자격 아르바이트생 채용… 전문성 부족으로 수강생만 피해

  • 입력2005-03-11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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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 선생님한테 뭘 배우나요?”
    2000년 12월 어느 날 저녁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한 보습학원. 대학생 고모씨(23·여)는 학원 강의를 시작했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막을 길이 없다. 제출해야 할 보고서와 기말시험이 겹쳐 전날 밤을 꼬박 새웠기 때문.

    전공이 이과계열인 고씨는 이 학원에서 과학과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영어나 국어강사가 펑크를 내는 경우 종종 대신 강의하기도 하는데 이 날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고씨의 말이다.

    “학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학교 일이 많아서 피곤할 때는 농담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도 해요. 교재연구도 제대로 못하고…. 하지만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의 경우 교재연구 없이도 가르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학생들이 개인지도가 아닌 입시학원을 선택하는 이유는 전문강사로부터 전문적인 강의를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요즘 학원가에는 고씨처럼 전문성이 검증되지 않은 무자격 대학생 학원강사가 판치고 있다. 경영난에 허덕이는 보습학원과 아르바이트를 원하는 대학생의 수가 급증하면서 학원의 대학생 강사 채용이 늘고 있기 때문. 학원은 매달 50만원 안팎의 박봉으로도 강사를 쓸 수 있고 채용된 대학생은 월 30만원 선인 과외비보다 다소 비싼 보수를 받을 수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라는 것.

    “대학생 선생님한테 뭘 배우나요?”
    이런 현상은 최근 경제상황이 나빠지면서 더욱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영등포구에 위치한 S보습학원의 경우 전체 7명의 강사 중 2명이 대학생이었다. 다른 보습학원들의 대학생 강사 비율도 이와 비슷한 실정. 실제로 생활 정보지에 강사 채용광고를 낸 대다수 학원들은 대학생인지 여부에 상관없이 일단 학원에 나와보라고 한다. 대학생은 학원에 가면 대체로 별다른 검증 절차 없이 강사로 채용된다.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한 보습학원에 문의차 찾아갔던 대학생 이모씨(24)는 주먹구구식의 강사 채용에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선 시간에 맞춰 강의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대학 재학생이어도 상관없다고 했어요. 어느 학교에서 무슨 과목을 전공하는지와 어떤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느냐고 묻더니 당장 내일부터 나와서 강의하라고 하더군요.”

    4개월 간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한 보습학원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생 김모씨(23·여)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김씨의 경우 일곱 곳의 보습학원에 문의해 보았는데 그중 여섯 군데에 채용됐다고 한다. 그래서 보수도 좋고 집에서 가까운, 조건 좋은 학원을 선택하는 여유마저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학원 강사 채용에는 아무런 기준이 없는 것일까. 99년 5월에 개정된 ‘학원의 설립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2조에 따르면 학원강사의 기준은 ‘초-중등교육법 제21조의 규정에 의한 교원의 자격을 소지한 자’와 ‘대학졸업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 규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학원강사 채용은 명백한 불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단속은 거의 없다.

    교육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학원 수는 6만2000여개다. 그러나 학원의 지도-감독을 맡고 있는 공무원은 400여명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학생 강사 채용 여부까지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

    이처럼 무용지물과 다름없는 법적 규제와 교육부의 허술한 관리 탓에 무자격 대학생 학원강사들은 자신들의 강의가 불법인 줄도 모른 채 일선학원에서 버젓이 강의하고 있다. 앞서의 서대문구 보습학원 대학생 강사 김모씨의 말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대학생 학원강사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단지 원장이 아이들이 무시할지도 모르니까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숨기라고 했죠. 그때는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했어요.”

    그렇다면 불법적인 대학생 학원강사 채용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우선 전문성 부족을 들 수 있다. 과학과목 강사를 구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의 한 보습학원에서는 이과계열 학생이면 경력 여부와 상관없이 과학 강의를 맡길 수 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교습경험이 있으면 인문계열 학생이라도 과학강사가 될 수 있다고 버젓이 말하는 실정이다.

    대학생 박모씨(23·여)도 신문방송학과 재학생이지만 학원에서 중학교 과학과 고등학교 공통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박씨는 “3년 여 간 과학 과외를 해왔기 때문에 가르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어요. 솔직히 학원측에서도 전공보다는 좋은 대학 나왔는지를 더 따져요”라며 호기롭게 말했다.

    인천에서 보습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42·여)도 “솔직히 그저그런 대학에서 담당과목을 전공한 사람보다는 전공이 다르다 해도 명문대 재학생을 더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죠. 명문대 재학생은 과외 경험도 많아 가르치는 실력이 오히려 한 수 위라고 생각해요”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대학생 학원강사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학업과 강의를 병행하다보니 교재연구 및 강의 준비에 소홀하기 쉽다는 점.

    1년여 동안 국어를 가르쳐온 대학생 우모씨(24)는 “한번도 예습하고 강의해본 적이 없어요. 열심히 준비하고 가르친다기보다 그때그때 시간 때우기식인 경우가 많아요. 과외보다 책임감도 덜 느끼지요”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보습학원 원장들이 잘 알고 있다.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한 보습학원 원장도 “대학생 강사들은 도무지 강의준비를 하지 않아요. 학원강사의 실력이 학교 교사보다 더 나아야 학생들이 학원을 찾는데 교사들보다도 교재연구를 하지 않으니 걱정이 되죠. 그렇다고 전문강사를 영입하자니 돈이 부족하고 대학생 강사를 쓰자니 제대로 강의준비를 하지 않고, 딜레마입니다”라며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처럼 무자격 대학생 학원강사가 늘어감에 따른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학원 학생들이다.

    대학생 학원강사에게 수업을 받고 있는 김모양(17·고2)은 대학생이 학원강사를 하는 것이 불법인지 몰랐다며 “처음에는 선생님이 젊어서 좋았어요. 종종 수업시간에 농담도 하고 간식을 사주기도 하며 대학생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수강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재미는 있었지만 수업이 끝나면 왠지 허무했거든요. 놀려고 학원에 온 것은 아닌데 말이죠”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딸을 둔 이모씨(49·여·교사)는 학원에 대학생 강사가 많아진다는 사실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인 교습과는 달리 여러 명의 학생들을 한꺼번에 가르치는 것은 오랜 훈련기간이 필요한데 일반 대학생들이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딸아이의 의견만 듣고 학원을 선택했었는데 이제는 직접 학원강사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네요.”

    사정이 이런데도 이에 대한 교육부의 대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교육부 평생학습정책과 학원업무담당 이인식 사무관(47)은 “현실적으로 정기적인 학원의 지도-감독만으로 불법적인 대학생 학원강사 채용을 규제하기는 힘들다”며 “각 교육청에 상설돼 있는 ‘학원 불법운영 고발센터’에 불법행위가 신고되면 우선적으로 처리할 수 있으므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감시를 부탁한다”고 말할 뿐이다.

    대학생의 과외교습은 가능하지만 학원 강사 채용이 불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학원 강사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이기 때문이다. 단지 일류대에 다닌다, 보수가 적게 든다는 이유 등으로 대학생을 학원 강사로 채용하는 것은 학원 스스로 프로의 전문성을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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