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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경영’이 벤처 몰락 불렀다

경험 많은 벤처캐피털리스트·기관투자가 부재… 자금·경영 조언 갈증 ‘예정된 악순환’

‘나 홀로 경영’이 벤처 몰락 불렀다

‘나 홀로 경영’이 벤처 몰락 불렀다
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일차적 과제는 경제 구조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 한 가지 방법이 몇몇 재벌에 의존해온 경제 구조를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 위주 구조로 바꾸는 것이었다. 벤처 육성 정책도 그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벤처란 무엇인가. 새로운 아이디어 및 기술, 그리고 자본이 결합해 경제적으로 크게 기여할 만한 기업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마침 인터넷 시대가 개막한 데다 정부의 적극적인 육성 정책이 맞물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벤처 전성시대를 맞이한다. 신규 창업한 회사 숫자가 1998년 한해 2900여 개에서 2000년에는 10월까지 약 9000여 개로 늘어났고 많은 우수 인력이 대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이동했다.

주식시장 조금만 흔들려도 투자심리 급랭

‘나 홀로 경영’이 벤처 몰락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코스닥 주가는 작년 초 대비 4분의 1로 떨어졌고 지난해 말 터진 정현준 진승현 스캔들은 벤처기업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창업에 대한 의욕은 찾아보기 어렵고 성장 가능성이 풍부한 벤처기업마저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창업투자회사 등 벤처캐피털도 지난해 3·4분기 이후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미국을 보자. 미국의 나스닥도 주가가 최고치에 비해 반 토막이 난 상태다. 지난해 3월 이래 인터넷 회사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바뀌면서 인터넷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첨단 기술주들이 약세를 면치 못하고 신규로 나스닥에 주식을 등록하는 것마저 어렵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처캐피털은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줄이지 않고 있다. 1999년 한해 동안 총 투자액이 약 600억달러인데 반해 지난해의 경우 3·4분기까지만 해도 무려 800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 나스닥이 극심한 침체를 보였던 지난해 3·4분기만 하더라도 투자액이 270억달러를 넘고 있다. 이는 같은 해 2·4분기에 비해 근소하게 감소됐을 뿐 전년 동기에 비해 크게 늘어난 금액이다.

벤처캐피털은 기업이 주식시장에 등록되기 전, 즉 비공개 기업에 투자한다. 따라서 공개된 기업이 그 가치를 평가받는 주식시장과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물론 벤처캐피털의 궁극적 목적은 투자기업이 주식시장에 공개되거나 다른 기업에 팔려서 이익을 얻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적시장인 주식시장이 좋지 않으면 사적시장인 벤처캐피털 시장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주식시장이 나빠지는 시기와 벤처캐피털이 투자자로부터 투자받기 어려워지는 시기의 차이가 2년 정도다. 따라서 2년 사이에 주식시장이 회복되면 벤처캐피털은 투자에 대한 회수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반면 우리의 경우 주식시장이 붕괴되면 그 즉시 창업투자회사나 신기술금융사 등이 투자자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정작 벤처기업이 돈을 필요로 할 때 투자해줄 기관이 없어 우량 벤처기업마저 헐값에 팔리거나 도산할 위험에 처한다. 왜 이런 악순환 구조가 형성됐는가. 미국과 한국의 벤처기업 육성 제도상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 벤처 투자 과정은 먼저 벤처캐피털이 투자 재원을 확보해 투자조합(venture fund)을 결성하고 그 투자조합이 벤처기업에 투자해 성장시킨 뒤 주식시장에 등록(IPO) 하거나 매각(M&A)해 수익을 창출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한국과 미국은 이런 과정 전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먼저 투자 재원을 확보하는 과정을 보자. 미국에서 현대적인 형태의 벤처캐피털이 등장한 것은 1960년대다. 그 이후 소수의 부자들이나 금융기관들이 주로 벤처펀드에 투자자로 참여했다. 1978년 통계를 보면 개인이 32%, 외국인이 18%, 보험회사가 16%, 연금펀드가 15%, 일반회사가 10%, 기금이 9%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벤처제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80년 이후다. 이는 79, 80년 두 해에 걸쳐 관련 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때 근로자퇴직금보호법(ERISA)을 개정하고 재해석해서 근로자들의 연금을 관리하는 펀드도 투자 위험이 높은 벤처펀드에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벤처펀드를 운용하는 벤처캐피털리스트들에게도 비교적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권한을 허용해 주었다.

‘나 홀로 경영’이 벤처 몰락 불렀다
이후 연금펀드가 주요 투자자로 참여하면서 벤처펀드의 규모가 양적으로 크게 팽창했다. 벤처캐피털 회사가 투자할 수 있는 금액도 현저히 증가했다. 91~95년에 벤처펀드에 참여한 투자자들의 구성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연금펀드가 46%, 기금이 19%, 보험회사가 12%, 개인이 12%, 외국인이 6%, 일반회사가 5%를 차지하고 있어 연금펀드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이런 흐름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견 가장 보수적으로 운용돼야 할 연금펀드나 기금이 높은 위험을 수반하는 벤처펀드의 주요 투자자들이라는 게 의아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연금펀드나 기금은 전체 운용자산의 극히 일부, 즉 많아야 6%, 보통 3% 정도를 벤처펀드에 투자한다. 물론 전혀 투자를 하지 않는 펀드도 있다. 벤처펀드에 배분하는 비율이 적어도 전체 연-기금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절대 액수가 크고 벤처펀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이다.

미국의 벤처캐피털은 작년에도 3·4분기까지 무려 700억달러를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전반적으로 벤처 투자에 대한 소극적 분위기가 지배한 작년 3·4분기에도 약 280억달러의 투자 재원을 확보했다. 이 가운데는 10억달러가 넘는 초대형 펀드도 8개나 되고, 평균적인 펀드 규모는 약 2억6000만달러에 이른다. 반면 같은 시기 우리 나라의 창업투자회사들은 몇십억원짜리 펀드를 결성하는 데도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작년 11월에는 4개 투자조합이 약 265억원을 조성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나라 창업투자회사들이 만드는 투자조합의 주요 투자자는 일반 회사와 개인들이다. 작년 5월 현재 개인이 약 30%, 일반 법인과 금융기관이 약 50%를 점유하고 있다. 요즘같이 경제사정이 어려울 때 일반 회사들이 감히 투자조합 출자를 생각할 수나 있겠는가. 또 개인들은 심리적으로 쉽게 위축되기 때문에 고위험 펀드에 투자하기를 꺼린다.

요컨대 미국은 전문가들이 운용하는 연-기금펀드가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벤처펀드에 투자 재원을 공급하고 있으나 한국은 비전문가인 회사나 개인들이 단기적이고 불연속적으로 재원을 공급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식 신경제의 ‘엔진’이 벤처기업이라면 미국은 이 엔진에 공급하는 연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엔진도 부실할 뿐더러 충분한 연료를 확보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니 게임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닌가.

미국과 한국의 또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는 벤처펀드를 운용하는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의 수준과 역할이다.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연-기금 펀드가 벤처펀드에 일부라도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펀드를 운용하는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우수하고 신뢰할 만한 실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아노 펜지어스,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 사장이었던 레이먼드 레인, 익사이트앳홈의 전 CEO였던 탐 저멀럭. 이들의 현재 직업은 바로 벤처캐피털리스트다. 이들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들, 대형 투자은행에서 근무하던 사람들도 벤처캐피털 회사에 합류했다.

미국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벤처기업의 감독이자 ‘벤처 드라마’의 연출자다. 개개 벤처기업의 CEO나 핵심 간부들은 선수이고 배우들인 셈이다.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투자 의사를 결정할 때 무엇보다 벤처기업 경영진의 능력을 살피는데, 투자가 이루어진 뒤 예상과 달리 주요 경영진의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기업의 발전 상태에 비쳐 적합하지 않을 때는 그 간부를 해임하고 외부에서 새로운 사람을 고용한다. 나아가 그들은 투자한 벤처기업의 경영상황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 기꺼이 돕는다. 그들은 투자기업의 자본조달뿐 아니라 유능한 근로자를 고용하는 것도 도와준다.

이는 미국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오랫동안 특정 분야에 종사하면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많은 경험과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미국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단순히 돈을 투자해 놓고 기업의 가치가 오르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한국식 ‘머니 게임’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치를 더해 ‘기업을 만드는 사람’이고 ‘비즈니스를 만드는 사람’이다. 미국의 대표적 벤처캐피털리스트 존 도어는 ‘새로운 산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까지 불린다.

당연히 미국에서는 벤처 창업자들이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받을 때 자금뿐만 아니라 여러 가치를 더해줄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있는 회사를 찾는다. 능력 있는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관여한 기업일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의 창업투자회사나 신기술금융사 등 벤처 투자 기관들의 실태는 어떤가. 우선 소수의 기업에 집중 투자하는 미국과 달리 소액을 수많은 회사에 분산 투자하므로 특정 회사의 경영에 참여할 만큼의 지분을 확보하지 못한다. 또 다수의 벤처기업 경영자들은 투자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이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신뢰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투자 실무자들은 미국의 벤처캐피털리스트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도 최근 창업투자회사 등 투자 기관이 급증했지만 90% 이상의 투자 실무자들이 금융 업무와 관련된 제한된 경험이 있을 뿐이다. 정보통신 분야 등 벤처 창업이 많이 이뤄지는 산업에 종사한 경험이 없고 일반적인 경영 경험이 없어 실제 기업 운영에 도움을 주기 어려운 실정이다. 미국의 경우 다수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공학을 전공하거나 첨단산업 분야에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의 벤처 기업인들 역시 문제가 전혀 없는 게 아니다. 이들은 외부의 경영 관여를 극도로 싫어한다. 외부 투자자들의 조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벤처기업을 창업하는 경영진, 특히 젊은 창업자들이 기업 경영과 관련한 여러 도움을 줄 만한 외부 조력자가 없는 상황에서, 또 경영이 잘 되는지 여부를 감시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경영을 잘해나갈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미국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과 같은 전문가를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창업투자회사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현재처럼 창업투자회사를 설립할 때 많은 자본금을 요구하는 제도로는 능력있는 개인이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나서기 힘들다. 미국처럼 능력 있는 개인들이 손쉽게 투자조합을 결성해 벤처기업에 투자하도록 하고, 그 결과를 시장에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문화, 각 분야 전문 인력의 효과적인 분업, 이익을 공유하려는 자세 등 미국 벤처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많다. 하지만 벤처기업을 실제로 도와서 키워나갈 능력을 가진 우수한 벤처캐피털리스트들, 그들을 믿고 많은 자금을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공급하는 기관투자가의 존재야말로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의 불행이다.

김동기/ 재미 변호사





주간동아 2001.01.25 269호 (p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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