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9

2001.01.25

잘 키운 문제아 열 모범생 안 부럽다

공부 못한다고,예스맨 아니라고 모두 '삐딱이'인가‥ 사회 발전엔 창조적 문제아가 더 필요

  • 입력2005-03-11 13: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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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키운 문제아 열 모범생 안 부럽다
    30여년 전 진주, 양지 바른 마루에 삼남매가 올망졸망 걸터 앉아 사진을 찍었다. 눈매가 날카로운 형이 동생에게 말한다. “준혁아, 내는 공부 많이 해서 크면 디게 훌륭한 사람이 될끼다.” 옆에 뚱하게 앉아 있던 동생도 한마디. “형아야, 내는 공부가 와이래 하기 싫노?”

    세월이 흘러 마흔 줄에 접어든 동생 이준혁씨(39·삼성에버랜드 유통사업부 신공항운영팀 팀장)가 책을 썼다. 87년 하얏트호텔 웨이터 보조로 시작해 대기업에서 잘나가는 호텔맨으로 인정받기까지의 이력을 담은 ‘공부 못 한다고 속상해 하지 마라’를 펴낸 것. 대학 교수가 된 형 재혁씨(부산외국어대 러시아어과)가 쓴 추천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창의성 뒷전 … 닮은꼴 학생 만드는 획일적 교육

    “동생은 그저 욕 잘 하고,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집과 동네와 학교에서 반항적이고 말썽만 피우던 말하자면 ‘착실하지 않은 아이’였다… 내가 동생 책의 서문까지 쓰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사실 진득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있기보다 거리에서 ‘정의의 주먹’을 휘두르는 시간이 많았던 준혁씨가 대학엘 가고 손꼽는 대기업에 취직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가 재수 끝에 동아대 관광경영학과에 입학했을 때 가족들은 기적이라며 고시에 붙은 것보다 더 기뻐했다.



    우리 사회에서 문제아가 되는 길은 간단하다. 우선 공부를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 싸움질로 파출소 경찰서 등을 몇 차례 드나들고 나면 그대로 ‘불량 청소년’이 된다. ‘창작과비평’사의 제3회 ‘좋은 어린이 책 공모전’에 뽑힌 박기범씨의 ‘문제아’는 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평범한 아이가 얼떨결에 불량소년으로 낙인찍히는 과정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해 격찬받았다. 특히 문제아라는 딱지가 붙은 뒤 ‘나’의 독백이 절절하다.

    “나는 문제아다. 선생님이 문제아라니까 나는 문제아다. 처음에는 그 말이 듣기 싫어서 눈에 불이 났다. 지금은 상관없다. 어떤 때는 그 말을 들으니까 더 편하다. 문제아라고 아예 봐주는 것도 많다. 웬만한 일로는 혼나지도 않는다. 그냥 포기한 셈치니까. 애들도 내 앞에서는 슬슬 기기만 한다는 걸 안다. 그러니까 내가 점점 더 문제아가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한번 문제아면 영원히 문제아. 그러나 우리가 문제아라고 하는 아이들이 정말 문제아일까. 한국청소년상담원의 박경애 박사는 “학교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안 하면 너무 쉽게 문제아로 낙인찍는 교육 풍토가 오히려 문제아를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문제아 예방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명지초등학교 이귀윤 교장은 우리 교육이 일탈을 막는 데 주력하다 보니 창의성을 말살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우리 교육은 일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을 너무 싫어한다. 교육부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교육청, 교육청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학교,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선생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학생, 모두가 하나같이 닮은꼴만 길러내서 어떻게 이 경쟁사회에 대처해나갈 수 있겠는가. 입만 열면 ‘창의력을 기르는 교육을 하라’고 하는데 창의력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단 말인가. 창의력의 시작은 자유에서 온다.” 결국 이런 교육은 ‘한국적 민주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앞선 민주주의 제도’라고 믿는 ‘비상식적’ 학생들을 양산한다.

    잘 키운 문제아 열 모범생 안 부럽다
    교육심리학자 토랜스는 창의성이란 “곤란한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며, 그 결과를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면서 “더 깊게 파고, 두 번 보고, 실수를 감수하고, 고양이에게 말을 걸어 보고, 깊은 물 속에 들어가고, 잠긴 문 밖으로 나오고, 태양에 플러그를 꽂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대부분 이것을 일탈이라 규정하고 금기시한다. 성인으로 자라면서 삶이 피곤하지 않으려면 ‘예스맨’이 되는 게 낫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다. 이런 눈치가 없으면 ‘문제아’로 찍힌다. 한 공립고등학교 교사는 교장의 일장 훈시와 그에 대한 침묵이 일상화돼 있는 교직원회의에서 3일 연속 건의를 한다고 일어섰다가 ‘벌떡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도 때도 없이 ‘벌떡벌떡’ 일어나 만장일치 분위기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눈총을 받은 것이다.

    최창호 박사(심리학)는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심취하고 열중하며 △외부에서 오는 억압이나 구속을 배척하고 △행동이나 태도가 비관습적이라는 점을 꼽았다. 즉 창의적인 사람들은 사회적 요구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목표만 바라보기 때문에 자칫 ‘미친놈’으로 인식되기 쉽다는 것이다.

    신생 벤처기업인 오토큐브의 박해동 과장(34). 그는 현대자동차에 다니던 5년 동안 워낙 갖가지 일을 벌여 “살면서 너 같은 놈은 처음 봤다”는 말을 자주 들어야 했다. 한국외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할 때만 해도 ‘경제의 기본원칙은 세일즈, 자본주의의 기본을 배우겠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직된 기업문화가 당장 그의 숨통을 죄어오자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아침 8시까지 출근이었는데 신입사원들은 7시, 심지어 6시부터 나와 대기하는 거예요. 저녁 6시가 넘었는데 퇴근할 생각도 안하고 눈치만 보고. 저는 일부러 아침 7시59분에 출근하고 일 없으면 6시에 땡 하고 나갔어요. 나라도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박씨는 나머지 시간을 평소 하고 싶었던 독립영화제작에 바쳤고 그 덕분에 그는 대리 진급에서 누락됐다. 나중에 새로 조직된 스포츠마케팅팀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그는 통제 불가능한 ‘튀는 놈’ 수준에서 직장 생활을 끝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다르게 행동하는 ‘미친놈들’의 역량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다. 이면우 교수(서울대 산업공학)는 “믿음직한 미친놈을 찾아, 미친놈이 하는 짓을 내버려두자, 미친놈이 하는 짓이 좋아 보이면 즉시 동참하자”는 ‘미친놈 예찬론’을 펼쳤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조직은 금기를 깨뜨리는 사람을 ‘미친놈’으로 보고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문학계를 뜨겁게 달궜던 평론가 이명원씨의 사건은 ‘다르게 생각하고’ ‘금기를 깨뜨린’ 대가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사건은, 서울대 김윤식 교수의 표절 문제를 제기한 이씨의 석사학위 논문이 99년 2월 발간된 한 논문집에 실린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학문적인 논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교수가 제자 눈치를 봐야 하느냐” “복종하지 않는 제자는 원치 않는다” 등 개인적인 도덕성에 시비를 거는 쪽으로 변질됐다. 이씨는 “억압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자유의 고난을 택하겠다”며 박사과정(서울시립대 국문과) 자퇴서를 제출했다. 실제 표절 여부를 떠나 안 그래도 ‘학문적 근친상간’이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학사회에서 ‘다름’의 결과가 무엇인지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잘 키운 문제아 열 모범생 안 부럽다
    학력보다 끼와 아이디어를 중시한다고 알려진 벤처기업도 어느 정도 조직이 안정되면 어느새 ‘인화’와 ‘단결’을 강조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드러낸다. IT분야 전문의 한 헤드헌터는 “요즘은 사람을 뽑을 때 실력만 보지 않는다. 회사는 그 사람이 전 직장에서 어떤 평을 들었는지에 더 신경을 쓴다.”면서 “혹시라도 전직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중뿔나게 굴지 않는 편이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최창호 박사는 “다른 사람들끼리의 갈등과 마찰을 두려워하지 말고 전뇌적(좌뇌형과 우뇌형)팀을 만들어야 창의적 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좌뇌형과 우뇌형은 서로 강약, 장단이 있으므로 상보적인 관계에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대개의 조직은 경영자의 기호나 기업문화라는 이름으로 ‘좌뇌형’이나 ‘우뇌형’ 어느 한쪽 방향으로 굳어지기 쉽다.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박힌 ‘다름’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저자인 김용석씨(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철학 교수)는 ‘미운 오리 새끼’우화를 통해 ‘왕따’ 공포를 설명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우리라는 이름의 ‘닫힌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농가로 숨어든 아기 백조가 ‘우리’로 인정받으려면 닭처럼 알을 낳거나 고양이처럼 애교를 떨어야 한다. 그 외의 말이나 행동은 ‘쓸데 없는 짓’이거나 ‘미친 짓’이라고 비난받는다. 심지어 아기 백조가 성숙한 백조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을 때에도 그를 받아준 곳은 사실 백조라는 ‘닫힌 사회’일 뿐이다. 백조는 ‘닫힌 사회’에서 태어나 ‘닫힌 사회’로 돌아간 것이다.”

    이처럼 ‘다름’이 ‘문제’가 되는 ‘닫힌 사회’에서는 창조적인 문제아들이 발붙일 여지가 없다. 최근 민주당 의원들의 자민련 이적에 반대하다 결국 출당 조처를 당한 강창희 의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장의 잘잘못을 떠나 강의원은 소신에 따라 교섭단체 날인을 거부했다. 그러나 자민련은 ‘해당행위’라는 꼬리표를 달아 그를 내쫓았다. 집단 이기 앞에서 개인의 소신과 명분이 결코 용납되기 어려운 것은 결코 정치권의 분위기만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다. 만약 강의원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오지 않았다면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절망의 정도는 더 심해졌을 것이다.

    ‘닫힌 사회’의 대표적인 징표는 획일이다. ‘글씨와 그림이 있는 종이’ 대표 백종열씨는 몇 년 전 디자인실 신입사원을 공채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1명을 뽑는데 130여명의 명문대 졸업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제출한 포트폴리오의 내용이 한결같다는 데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심지어 포트폴리오를 만든 순서까지도 같았다. “10여년씩 공부한 결과가 바로 이런 건가 하는 생각에 너무 허탈하고 우스꽝스러웠다”고.

    반면 스스로 문제아가 되기를 원했던 백씨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습관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근육 속까지 배어 있는” 창조적 직업인이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 “연락 한 번 해”라고 하는 것이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언제가 정말 언제인지 알아야 하고, 한 번인지 두 번인지 정확히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백씨의 존재가 이상하다 못해 불편하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우등생은 10%에 불과해요. 나머지 90%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죠. 마케팅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등생이 아닌 사람들이 훨씬 많잖아요. 매번 10등 안에 들어간 사람이 어떻게 40등 50등 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겠어요.”

    이준혁 과장도 자신이 한때 열등생, 문제아였던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은 스타의식이 있어서 지나치게 경쟁에 예민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에서 학습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심성이에요. 일에 대한 자부심, 남을 배려하는 마음, 정직 같은 것이죠.”

    우리 사회가 ‘문제아’라고 손가락질하던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은 아닐까. 윈스턴 처칠이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문제아가 아니었다면 총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일본작가 나카타니 아키히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문제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문제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장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문제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문제아’의 개념이 달라져야 하며 그들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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