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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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가벼움의 시대

  • 입력2005-11-01 13: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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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얄팍한 가벼움의 시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가벼움이 출렁이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군화발과 최루탄, 화염병이 난무하던 무거움의 시대, 피와 눈물과 열정과 고함, 죽음, 그리고 그 뒤의 환희. 우리 시대를 지배하던 억압과 희망의 대결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보 지식 벤처 사이버 세계화가 차지하였다.

    이른바 “밀레니엄”의 그 떠들썩한 헛소동은 비단 우리만의 일은 아니었지만, 대통령부터 시청의 청소부까지 온통 혼이 빠져버린 듯한 ‘글로벌’의 한바탕 소극이었다. 정치의 민주화는 아직도 멀었건만 먼저 없어진 것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이상이요, 노숙자들은 아직도 서울역 지하도를 헤매건만 태어나지도 못한 평등과 복지의 이념은 강제 유산되고 말았다.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의 결합’을 내세웠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뒷받침할 아무런 이론도 사상도 철학도 제시하지 못했다. 더구나 여기서 강조된 것은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였지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그저 시장경제를 튼튼히 할 ‘상부 구조’ 정도로 여겨졌다.

    그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돈이 최고다!”이다. 물론 아무도 이 말을 내놓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전지구 시대’에 ‘세계 기준’에 맞춰 ‘국가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그것은 바로 세계 경제의 최강자가 제시한 기준과 규범에 맞춰 어떡하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성’이다. 효율성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인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인가, 문화 발전을 위한 것인가, 환경 보호를 위한 것인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인가, 복지와 평등을 위한 것인가. 아니다. 돈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생기는 권력을 위한 것이다. 돈이 많아지고 권력이 커지면 위의 가치들을 실현할 기회가 커진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돈과 권력은 이런 가치들을 훼손하고 왜곡한다.



    효율 지상주의를 뒷받침하는 구호가 ‘세계화’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이념이 신자유주의다. 세계화 구호는 우리 사회-경제 구조와 가치 규범을 ‘세계에 통용되게’ 바꾸어 최대한의 물질적 이익을 보자는 구호다. 신자유주의는 한 마디로 돈과 상품이 국경을 넘어 마음대로 넘나들게 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경제가 살고, 우리나라의 경쟁력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럴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그 동안 너무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런 논리를 무분별하게 따라야만 할 것인가. 학교에서는 학생(수요자)들이 원하는 대로 가르쳐야 하니, 앞으로 컴퓨터 게임과 영어 채팅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을 조용히 성찰하고 사회의 원리를 캐는 공부는 어디로 갔는가. 나무 밑에 누워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관찰할 여유를 누가 가질 수 있는가.

    수십 년 지켜온 개발 제한 정책은 현 정부 들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고, 영어를 쓰면 돈을 잘 번다는 검증되지 않은 논리가 횡행하여 정부 관청에서부터 영어가 판을 치고 있다. 문화의 정체성을 들먹이면 시대에 뒤떨어진 무지렁이다. 문학은 감각의 희롱이 지배하고, 만화와 영화와 전자오락이 문화의 윗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지식인이란 사람들은 남의 나라 말로 지식 자랑과 말장난하기에 여념이 없다. 현대판 민족 개조론을 내세우는 보수 언론은 국수주의와 사대주의를 묘하게 섞어 얄팍한 여론몰이에 나선다.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바에 대하여 진정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드물다. 모두 얄팍한 세류에 휩쓸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좇기에 여념이 없다.

    이 모두 총체적인 가벼움의 표상이다. 시대의 흐름인가? 그런가 보다. 80년대의 암울하고 무거웠던 시절이 너무 억울했던가 보다. 10대 청소년에서 보수 언론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에서 주식으로 돈 잃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돈의 논리와 효율성의 신앙과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무턱대고 강물에 뛰어드는 누어 떼처럼 달리고 있다. 누구 이 뜀박질을 막을 사람이 없는가. 그리고 이렇게 말할 사람이 없는가. “이 길이 정말 그 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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