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9

2016.05.25

와인 for you

시라즈 와인 세계 알린 천재 와인메이커

호주 와인의 아버지 맥스 슈버트

  •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 sangmi1013@gmail.com

    입력2016-05-23 11:5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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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산 시라즈(Shiraz)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레드 와인 중 하나다. 시라즈는 원래 프랑스 남부 론(Rhone) 지방에서 시라(Syrah)라고 부르는 품종인데, 호주에서는 시라즈라고 한다. 시라즈가 호주에 전해진 것은 1831년이지만, 호주산 시라즈 와인이 세계무대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140년이 지난 1970년대부터다. 그리고 이 같은 성공은 펜폴즈(Penfolds) 와이너리의 천재 와인메이커 맥스 슈버트(Max Schubert·1915~94)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호주는 맑고 따뜻한 날이 많아 포도 재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과거 호주에서는 주로 강화 와인을 생산했다. 강화 와인은 와인에 증류주를 부어 알코올 도수를 20도 정도로 끌어올린 술이다. 땅은 넓지만 와인을 소비할 인구가 적다 보니 장기 보관이 용이한 강화 와인을 주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슈버트가 일하던 펜폴즈도 강화 와인을 만들던 곳이다. 1949년 슈버트는 세계적인 강화 와인 셰리(Sherry)의 제조법을 배우고자 스페인으로 출장을 갔다. 하지만 그의 코를 사로잡은 것은 셰리의 향기보다 셰리를 담고 있는 오크통의 매콤달콤한 향이었다. 스페인에 이어 방문한 프랑스 보르도에서도 오크통 와인의 향기에 빠져들었다. 와인이 오크통 안에서 긴 시간 숙성되며 만들어내는 감미로운 향에 매혹된 것이다.

    슈버트는 호주도 보르도처럼 세계적인 레드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보르도가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나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메를로(Merlot)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었듯, 호주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시라즈로 와인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렵게 구한 오크통 5개에 1951년 수확한 시라즈를 담아 오크통 숙성 레드 와인을 만들었다. 그는 이 첫 작품에 펜폴즈 창립자가 살던 집 이름을 따 그레인지(Grange)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그레인지가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펜폴즈 이사회가 시음한 결과, 숙성이 덜 된 그레인지는 타닌이 너무 강해 상품으로 내놓을 수 없는 수준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결국 1957년 이사회는 그레인지 생산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슈버트는 와인 저장고 한쪽 구석에서 몰래 그레인지를 만들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분명 보르도 와인처럼 맛있어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60년 슈버트는 이사회에 9년 숙성된 1951년산 그레인지를 다시 내놓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레인지는 세계적인 와인 잡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가 선정한 20세기 12대 와인 중 하나다. 유럽 럭셔리 매거진 ‘파인(Fine)’과 와인 전문 웹사이트 ‘tastingbook.com’이 뽑은 1970년대 40대 와인 부문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레인지의 성공이 진정으로 시사하는 바는 이 와인이 호주산 시라즈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이제 펜폴즈는 그레인지 외에도 맛있는 시라즈 와인을 다양한 가격대에 내놓고 있다. 그뿐 아니라 호주의 많은 와이너리가 시라즈 와인으로 세계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슈버트와 그레인지가 없었다면 호주산 시라즈가 지금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그레인지는 한 사람의 신념과 의지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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