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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이 된 ‘안티꼰대’

‘펭수’ ‘천리마마트’ ‘멜로가 체질’ ‘OK, boomer’를 관통하다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시대정신이 된 ‘안티꼰대’

펭수 [EBS ‘아이돌 육상대회’ 방송 캡처, ‘자이언트 펭TV’ 유튜브]

펭수 [EBS ‘아이돌 육상대회’ 방송 캡처, ‘자이언트 펭TV’ 유튜브]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말씀을 기적처럼 실현하고 있는 ‘펭수’. 선배 펭귄인 ‘뽀로로’가 한국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것을 보고 슈퍼스타의 꿈을 안은 채 남극에서 건너와 EBS 소품실에서 먹고 자며 연습생의 꿈을 키운 펭수는 7개월 만에 사실상 꿈을 이뤘다. 

펭수를 주인공으로 EBS에서 4월 2일부터 정규 편성한 ‘자이언트 펭TV’의 유튜브 구독자 수는 11월 21일 현재 81만 명을 넘어섰다. 100만 명 넘게 본 동영상도 9편이나 된다. 교육방송 캐릭터임에도 지상파 3사와 종합편성채널 예능프로그램까지 진출하고, 화보 촬영은 물론 카카오톡 이모티콘까지 출시돼 웬만한 아이돌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런 펭수의 인기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지구온난화가 낳은 이상 현상의 하나일까. 21세기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병맛’ 캐릭터의 진정한 완성일까. 어렸을 때 뽀로로를 보고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 대체재를 찾지 못하던 2030세대 ‘어른이(키덜트)’의 애정 결핍을 채워준 것일까. 한국에서도 아동용 캐릭터시장을 넘어 성인용 캐릭터시장의 판도라 상자가 열려서일까. 

어느 하나로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펭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음, 이건 설명할 수 없어요, 설명하려고 들지 마세요”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주대스타’라는 펭수의 인기 현상을 그 중심에 두고 유사한 현상들을 찾다 보면 이르게 되는 결론이 하나 있다. ‘안티꼰대’다.


‘라테는 말이야’

시대정신이 된 ‘안티꼰대’
국어사전에서 ‘꼰대’를 찾아보면 ‘늙은이’나 ‘선생님’을 비하하는 은어라고 명시돼 있다. 실생활에선 좀 더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 젊은 사람에게 어떤 생각이나 행동 방식 따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기성세대를 뜻한다. ‘나 때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다닌다고 해 이를 풍자한 ‘라테는 말이야’와 그에 대한 콩글리시 표현인 ‘Latte is horse’가 유행어가 될 정도로 청년세대의 반감을 사는 대상이다. 



꼰대의 어원에 대해선 일제강점기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 세력을 대변하는 ‘백작’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콩떼(comt′e)의 일본식 발음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부족해 정설로 채택되진 못하고 있다. 문헌상으로는 1960년대 소설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젊은이를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억압하는 초자아(슈퍼에고)로서 아버지 또는 교사에 대한 반발이 우회적으로 표출된 단어였다. 

그러다 현 2030세대의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1990년대 후반 이후 꼰대의 의미가 확대, 심화됐다. 아버지와 교사를 넘어 나이가 많거나 직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권위를 내세우고 훈육하려 드는 기성세대 전반으로 확대됐다. ‘꼰대질’로 규정되는 그 행태 또한 세분화됐다. 자신이 하는 말은 무조건 옳고 바르기에 따라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 지극히 출세 지향적인 삶을 살면서 아랫사람이라면 무조건 가르치려 드는 도덕주의적 자세,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극명한 이중성, 성과보다 서열 앞세우기,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 거기엔 역사상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세대임에도 취업난과 경제난에 허덕이는 청년세대의 눈에 비친 기성세대의 부끄러운 초상이 집약돼 있다.


“행복한데 뭐가 문제예요?”

펭수는 이런 출세 지향적이고 도덕주의적인 꼰대 문화를 향해 돌직구를 날리는 존재다. 직장상사 중 가장 높은 EBS 사장의 이름(김명중)을 거침없이 부른다. “사장님이 친구 같아야 회사도 잘 되는 겁니다.” 눈치가 부족해 마음고생이 심하다는 젊은이에게 “눈치 보지 말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라. 눈치 챙겨”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유행어가 된 ‘눈치 챙겨’는 ‘눈치 없이 왜 그러냐’와 더불어 ‘눈치 보지 말고 살라’는 이중의 뜻을 갖게 됐다. 

선배인 뽀로로를 은근슬쩍 험담한다고 해 소위 ‘펭성’(펭수의 펭귄성) 논란이 일자 “(우리) 화해했어요”라고 해놓고선 “그래도 보기 싫은 건 똑같습니다”라고 받아치는 솔직함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선배면 무조건 고개 숙이고 대접해야 한다는 연공서열 문화에 대한 반골기질을 드러낸 발언이다. 그렇다고 무례한 건 아니다. 차별이 없을 뿐이다. 수많은 세대를 아우르는 소통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한 펭수의 답을 들어보라. “나이가 많건 적건, 직급이 높건 낮건 나 자신에게 대하듯이 똑같이 남들을 대하면 됩니다.” 

압권은 ‘공부에 지쳐 힘들었는데 펭수를 보면서 행복해졌지만 공부가 소홀해져 걱정’이라는 고민 상담에 “이건 고민이 아닌데요. 행복해졌다면서요? 공부를 하는 것보다 행복해지는 게 중요한 겁니다”라는 답을 내놓은 것이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꼰대식 사고방식에 제대로 ‘똥침’을 놓은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멘토입네 하는 충고도 에둘러 비판할 줄 안다. “내가 힘든데 힘내라고 하면 힘이 납니까? 아니죠. 그쵸? 그러니까 힘내라는 말보다 저는 사랑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안 들어, 안 들어, 충고 안 들어”

tvN 드라마‘쌉니다 천리마마트’의 빠야족 부자(왼쪽)와 파격 경영을 선보이는 천리마마트 사장 정복동(김병철 분). [tvN]

tvN 드라마‘쌉니다 천리마마트’의 빠야족 부자(왼쪽)와 파격 경영을 선보이는 천리마마트 사장 정복동(김병철 분). [tvN]

이런 ‘안티꼰대’의 정신은 최근 젊은 세대의 주목을 받은 드라마에서도 확인된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tvN 드라마 ‘쌉니다 천리마마트’는 출세 지향적이고 도덕 지향적인 꼰대 문화에 대한 역설적 풍자가 가득하다. 

주인공인 정복동(김병철 분)은 잘나가는 대마그룹 임원으로 있다 상명하복 문화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그룹총수(이순재 분)에게 찍혀 지방 소도시 허름한 천리마마트 사장으로 발령받는다. 정복동은 이에 대한 복수로 마트는 물론 모기업에 손해가 발생할 짓만 골라 한다. 극 중 그의 라이벌이자 그룹 전무로 전형적 꼰대인 권영구(박호산 분)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다. 예를 들어 고객이 아니라 직원이 왕이라며 용무늬가 새겨진 곤룡포 유니폼을 입힌다든지, 고객에게 진솔한 마트가 되겠다며 ‘옆 마트가 더 쌉니다’ 같은 홍보전단을 돌리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선택이 모두 고객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번번이 대성공을 거둔다. 

정복동이 인건비 부담을 늘려 경영악화를 불러오고자 대거 고용한 ‘빠야족’은 부족 전체가 ‘안티꼰대’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다. 태평양 섬나라에서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건너와 마트에서 ‘인간 카트’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의 서툰 한국말은 전부 반말이다. 그 대신 나이나 재산,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한다. 

빠야족 언어로 사랑한다는 뜻의 ‘사뚜’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된 이유도 이런 ‘안티꼰대’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빠야족은 연공서열보다 성과, 성과보다 사람 중심으로 움직인다. 특히 노인과 어린이에게 따뜻하고 친절한데, “한국은 우리보다 훨씬 잘살고 돈도 많은데 왜 노인과 아이들을 방치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한국인 고용주와 동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남자주인공 손범수(안재홍 분)가 ‘꼰대 퇴치 신공’을 펼치는 장면. [JTBC]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남자주인공 손범수(안재홍 분)가 ‘꼰대 퇴치 신공’을 펼치는 장면. [JTBC]

9월 종영된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은 꼰대인 4050세대의 통념과 차별화된 2030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줘 호평받았다. 특히 나이, 권위, 편견을 앞세워 다른 누군가를 이용하고 짓밟는 것에 결코 주눅 들거나 꺾이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드라마 PD인 남자주인공 손범수(안재홍 분)가 방송국 꼰대 중 꼰대인 스타 작가(백지원 분)의 차기작 연출 제안을 거절하는 장면이다. 부아가 치솟은 스타 작가님께서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충고 하나 하겠다”며 일어나자 모질이처럼 양귀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아~ 안 들어, 안 들어, 충고 안 들어”를 외쳐 상대를 기함시킨다. 그 나름 노하우를 갖춘 ‘꼰대 퇴치 신공’을 펼쳐 보인 것이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 현상이 되다

뉴질랜드 의회에서 “됐네요, 부머(OK, boomer)” 발언을 한 클로에 스와브릭 의원. [CNN]

뉴질랜드 의회에서 “됐네요, 부머(OK, boomer)” 발언을 한 클로에 스와브릭 의원. [CNN]

‘안티꼰대’ 현상은 한국을 넘어 국제적 현상이 되고 있다. 11월 5일 뉴질랜드 의회에서 녹색당 클로에 스와브릭(25) 의원이 기후 변화를 외면해온 기성 정치인을 비판하는 연설 도중 나이 든 의원들이 야유를 보내자 “됐네요, 부머(OK, boomer)”라고 받아친 동영상 뉴스클립이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며 관련 뉴스가 외신에 쏟아졌다. 

‘OK, boomer’라는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1965년에 태어나 사회 주류를 형성한 베이비붐 세대가 뭐라고 얘기할 때마다 10, 20대 젊은이들이 말대꾸로 받아치는 표현이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해’라는 의미로 소셜미디어에 퍼져가던 유행어가 스와브릭 의원의 발언으로 정치무대에서 공식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미 부여가 이뤄진 것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을 두고 본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윗세대를 향한 Z세대(1995년 이후 출생한 세대)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보도했다. 그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른 대접을 해주던 것을 멈추겠다는 의미라는 해석이다. 올해 열여섯 살인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9월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지구 온난화를 방치해온 기성세대 정치인을 향해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는가”라며 맹공을 퍼부은 것 역시 이런 ‘안티꼰대’ 현상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툰베리는 세계 최고 권력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성난 눈초리로 째려보는 ‘레이저 눈빛’으로도 화제가 됐다. 


BBC에서 ‘오늘의 단어’로 소개된 ‘꼰대’. [BBC]

BBC에서 ‘오늘의 단어’로 소개된 ‘꼰대’. [BBC]

9월 25일 영국 공영방송 BBC가 ‘오늘의 단어’로 KKONDAE(꼰대)를 뽑은 점 역시 이런 세계적 조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BBC는 이 단어를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다른 사람은 늘 잘못됐다고 여김)’이라고 설명했다. 

‘조국 사태’와 함께 한국 사회의 주류로서 너무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비등한 것 역시 이런 시대적 사조와 맞물려 있다. ‘산업화의 막내이자 민주화의 선봉’을 자처하며 권위주의에 대한 투쟁을 훈장처럼 여기던 386세대가 ‘도덕군자인 양 위선을 떠는 출세지상주의자’로, ‘꼰대 중 꼰대’로 비난받게 됐다. 억울하다고 아무리 강변해봤자 소용없다.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나이 먹을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라’는 인생 선배의 조언을 이제라도 실천하는 것이 그나마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길 아닐까.






주간동아 2019.11.22 1215호 (p4~7)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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