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1

2018.06.06

국제

아시아 균형점 역할 해온 중립지대

북·미 정상회담 장소가 싱가포르인 이유

  • 입력2018-06-05 13: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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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가 깜짝 놀란 반전(反轉)에 반전이었다. 역사적 ‘싱가포르 회담’을 앞둔 치열한 외교전은 가히 전례가 없는 파격의 연속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케 했다. 이 가운데 빼놓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비록 취소와 연기 가능성까지 피어올랐던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지만 그 장소가 싱가포르인 것만은 변함없다는 점이다. 왜 하필이면 한국에서 비행기로 5시간 걸리는 싱가포르일까. 지정학적 배경에 깔린 함의는 없는 것일까. <편집자 주>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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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로 ‘싱가포르 회담’을 공개 천명하기 일주일 전부터 싱가포르 한인사회는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챘다. 국제도시의 중심가에서 무장경찰을 만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무렵 변두리 지하철역까지 무장경찰이 등장해 삼삼오오 경계를 서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레 “이러다 진짜 싱가포르 회담이 되는 거 아냐”라는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진짜 현실이 됐다. 

    싱가포르는 한국인 시각에서 보면 굉장히 독특한 나라다. 국가주의와 자본주의가 좁은 도시국가 안에 꽉 들어찼기 때문이다. 어떤 동양학자의 표현대로 “한비자의 법가(法家)주의 현실 버전”이란 설명이 딱 들어맞는다. ‘태형(笞刑)’으로 널리 알려진 강력한 공공사회규범 외에도 담배 1갑에 1만 원, 맥주 1병에 7000원이 넘을 정도로 사회적 방종에 대한 통제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물론 싱가포르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현지인은 담배꽁초를 대충 처리하기도 한다).

    석유자본 위에 떠 있는 섬

    자연스레 국민의 반발이 뒤따를 법도 하지만 그럴 기미도 없다. 독립 이후 인민행동당(PAP)이 59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똑똑한 정부’를 잘 따르기만 해도 모두 행복해지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공감대 덕분. 외국인 빼고 실제 인구는 570만 명으로, 부산 면적에 불과한 소국(小國)이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5만 달러 이상인 ‘탈아시아급’ 사회다. 

    이 같은 높은 소득의 원천은 바로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 즉 입지에 있다는 점은 상식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싱가포르의 성공을 단순히 화물선이 정박하고 물류를 중개하는 항구에서 찾는 것도 상식의 한계다. 냉정히 따져보면 인접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싱가포르를 대체할 만한 장소는 그야말로 지천에 널려 있다. 



    싱가포르의 무서운 점이라면 지독할 정도로 ‘항구 경쟁력’ 높이기에 몰입해왔다는 것이다. 제1, 2차 세계대전 이전 국제항의 특징은 제국 위세에 기댄 퇴폐와 향락, 그리고 밀수와 노예무역의 본거지라는 점이었다. 싱가포르 국부(國父)인 리콴유(李光耀)는 ‘유교적인 선생님’의 관점에서 이 같은 식민지적 관행과 전쟁을 벌였다.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논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840년 벌어진 아편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에 대한 복수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고, 실제 담배와 술에 높은 세금을 매긴 것도 그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깨어 있고(sober) 근면한(diligent) 시민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자원도, 영토도, 인구도 부족한 소국이 사는 길은 오로지 항구 경쟁력 하나였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싱가포르 경쟁력을 ‘화물’ 관점에서 보기 쉽다. 그것보다는 ‘상품자본’으로 규정하는 게 정확하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의 에너지 기반인 석유와 가스가 그 중심이다. 중동에서 나는 석유의 최대 소비처는 한중일 3국과 미국 등 북태평양 일대 국가다. 이 자원은 대부분 싱가포르에서 먼저 저장, 가공돼 선물·현물시장에서 자본화되고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한마디로 싱가포르를 ‘석유자본 위에 떠 있는 섬’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싱가포르가 북핵에 민감한 이유

    2017년 11월 14일 필리핀 마닐라 필리핀국제컨벤션센터(PICC)에서 만난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앞줄 왼쪽)와 문재인 대통령. [동아DB]

    2017년 11월 14일 필리핀 마닐라 필리핀국제컨벤션센터(PICC)에서 만난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앞줄 왼쪽)와 문재인 대통령. [동아DB]

    지난해 여름 북핵으로 촉발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과 연말 ‘핵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위기를 가장 호들갑스럽게 보도한 국가 중에서도 싱가포르는 단연 으뜸이었다. 싱가포르의 대표 언론매체로 방송은 ‘채널뉴스아시아’, 신문은 ‘스트레이츠타임스’가 있다. 이 두 매체는 거의 매일 북핵 위기 상황을 일본 언론매체 이상으로 실시간 중계했다. 한국인에 대한 인사도 “북핵은 안녕하시냐”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일본 언론매체의 남다른 호들갑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런데 싱가포르와 한반도의 거리는 4600km가 넘는다.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발생해도 싱가포르에는 큰 위기가 없다는 게 지리적 상식이다. 당시 한국 교민은 급락한 원화 가치에 당황했는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이 뉴스 중심에 서는 날이면 평소 싱가포르달러당 810원 하던 원화가 심할 때는 850원까지 폭락하곤 했다. 김정은의 튀는 행동이 교민에게 그야말로 ‘밉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싱가포르의 이 같은 예민함은 ‘상품자본의 중심’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마땅하다. 싱가포르는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처럼 전자화된 화폐자본의 본산이 아니라 실제 거대 화물선이 상품을 실어 나르는 물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각종 상품의 최대 생산지이자 소비처인 아시아·태평양(아태)지역의 전쟁 위기는 자연스레 싱가포르의 어두운 미래와 직결된다는 얘기다. 항만 인프라가 전부인 소국 처지에서 전쟁은 기회가 아니라 파멸을 뜻한다.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를 지낸 이선진 서강대 교수는 “싱가포르는 전통적으로 한반도를 국제 정세의 바로미터로 본다”고 해석한다. 한마디로 ‘날씨예보’와 같다는 얘기다. 한국에 천둥이 치면 싱가포르에 곧 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한반도에서 중국과 미국이 대결하면 이는 곧 남중국해에서도 조만간 미·중이 물리적 충돌을 빚을 수 있다는 신호다. 북핵 위기에 대한 싱가포르의 호들갑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동남아시아와 한반도 역시 긴밀한 지정학적 운명의 끈으로 연결돼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중립국 선포만 안 한 진짜 중립지대”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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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회원국 간에는 절대적 제1원칙이 있다. 내정 간섭 불가다. 동남아시아는 과거 제국주의의 최대 피해자로 정치체제가 심하게 왜곡되고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경우 400년에 가까운 식민지배를 거쳤고, 태국은 독립을 지켜냈지만 견고한 왕정-군부 복합체제를 잉태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정치체제에 대한 이해력과 포용력은 동남아지역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 

    싱가포르가 선진국 사이에서 각광받는 이유는 특유의 낮은 법인세와 소득세도 한몫한다. 세계 1위 뉴욕과 견줄 만큼 고물가를 자랑하지만 의외로 기업활동을 하기에 최적인 곳이라 아태지역 거의 모든 기업의 본부가 싱가포르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그야말로 친자본주의적이며 권위주의체제에도 큰 부담이 없는 독특한 중립지대다. 

    한국인이 싱가포르에 대해 갖는 가장 큰 오해는 인구의 75%가 화교 출신이고 중국어가 가능하니 ‘친중(親中)국가’일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이다. 근래 중국계 자본이 급증한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싱가포르는 맹목적인 ‘친중’이 근본적으로 어려운 나라다. 아니, 의식적으로 그 점을 가장 경계한 나라이기도 하다. 

    싱가포르는 19세기 대영제국의 아시아 전략 중심축으로 말레이시아 끝자락에 개척된 도시다. 제도적, 문화적으로 서구 편향일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로는 미국의 해양전략을 충실히 따라왔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베이징어를 쓰지만 민난어, 광둥어, 하카어도 사용하는, 상인 기질이 충만한 남방계 화교가 많아 태생부터 ‘정치’보다 ‘실리’에 밝다. 션호 난양공대(NTU) 국제문제연구소(RSIS) 연구원은 “국제정치에서 중립이 갖는 의미의 모호함을 고려할 때 싱가포르가 중립국인지는 논란이 있다”며 “하지만 중립지대를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남중국해에서 급증하는 중국의 영향력이 싱가포르에게는 최대 외교적 난제다. 싱가포르는 2015년 샹그릴라 회담을 통해 중국과 대만을 한 테이블에 앉히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과 너무 근접해 위기를 겪은 홍콩과 대만의 사례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지난해 싱가포르 정부는 학자로 포장해 고위 관리로 잠입한 중국 스파이를 발견, 축출하는 등 관료사회의 ‘친중국화’에 경고음을 보내기도 했다. 또 공식 룰은 아니지만 싱가포르는 국가 전략상 특정 국가에 대한 무역 의존율이 20%를 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싱가포르는 필연적으로 중립지대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시각도 있다. 싱가포르인들은 흔히 “우리 주위에는 10강(强)이 있다”고 말한다. 전통 강호인 영국과 미국, 중국이 버티고 있고 당장 영토를 잠식해도 거리낄 것이 없는 원래 땅주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비동맹 세력의 정점인 인도와 남태평양 최강자 호주가 있다. 인근 베트남에 거점을 둔 러시아와 과거 지배권을 배경 삼은 일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강자. 여기에 석유 공급처인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넣으면 주변 10강이 완성된다. 그야말로 세계 정세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왜 스위스나 몽골이 아닌 싱가포르였을까

    [사진 제공·외교통상부]

    [사진 제공·외교통상부]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어째서 싱가포르가 북·미 정상회담의 최적 입지인지를 설명하는 근거도 된다. 세계적 이벤트의 가장 큰 고민은 인지도에 편승한 모험주의자의 도발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갈지자 외교 행보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이란-북한’이 체스판의 말처럼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북한과 성공적 협상을 고깝게 보는 세력이 없다고 장담하기 쉽지 않다. 

    좁은 싱가포르는 감시와 통제가 쉽다는 것이 최대 강점이다. 유무선통신은 물론, 인터넷 패킷 하나까지 테러와 관련됐다면 곧장 걸러낼 수 있을 정도고, 도심에 깔린 고화질 폐쇄회로(CC)TV의 경쟁력도 뛰어나다. 유능한 싱가포르 정부 역시 테러 발생 여부가 국가 미래와 직결된다는 점을 잘 알기에 테러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협상지 선정이 단순히 안전 때문이라는 해석은 너무 편협하다. 역사적 회담의 성사 배경에는 그 역사적 근거가 부지불식간에 지리적 장소에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싱가포르가 한반도 전쟁이 촉발한 전 세계의 냉전을 끝맺음할 상징적 장소가 되기에 마땅한 일종의 ‘아시아 균형점’으로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 지리적 문제의 본질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당초 이번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 후보지로 꼽힌 곳은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첫째, 동북아시아로 몽골 울란바토르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판문점과 송도가 있다. 둘째, 유럽으로 스위스와 스웨덴이 대표적이다. 셋째, 동남아시아로 태국 방콕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그리고 싱가포르가 꼽혔다. 

    동북아지역은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에만 치우쳐 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특히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지역에서 불만을 가진다. 유럽에서 회담은 냉전체제의 최대 피해자가 아시아라는 점에서 사건의 본질과 동떨어진다. 동남아시아는 최적의 중립지대지만 방콕은 자유세계(1세계)에 너무 가깝고 자카르타는 비동맹 세력(3세계)에 속한다. 한반도 전쟁과 아시아 냉전체제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분명 아시아지역에서 1세계와 2세계, 그리고 3세계와 모두 연결된 장소를 택해야 했다. 그래서 싱가포르가 최종 선택된 게 아닐까. 

    협상의 성패는 아직 미지수지만, 싱가포르가 어째서 6·25 종전협상 장소 제공지가 됐는지는 회담 이후에도 오랫동안 곱씹어볼 주제다. 

    한국인이 가진 편견 가운데 하나가 6·25전쟁이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아 치른 ‘내전(內戰)’이라는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나 박명림 연세대 교수 등 전후 세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 ‘내전화한 국제전’이라는 데까지는 의미가 확장됐다. 하지만 6·25전쟁이 미국이 주인공이자 소련이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냉전(冷戰)체제’의 사실상 시발점이 됐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최근 아시아 학계에서 나오는 논의들은 오히려 더 진보적으로 확장돼 이른바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사실상 아시아 전역이 지역적, 이념적으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는 해석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1940년대 아시아·태평양전쟁, 1950년대 한반도 전쟁, 1960년대 인도차이나전쟁, 그리고 1970년대 필리핀, 캄보디아 내전이 사실상 ‘냉전’이라는 차가운 수식어 속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연결됐다는 얘기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선 4강의 합의 외에도 피해자 아시아의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역적 균형점에서 찾는 탈냉전의 희망

    따지고 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한반도 독립을 결정지은 사건은 일본이 미얀마 전선에서 벌인 ‘임팔작전’이었다. 당시 동남아에서 무적의 일본군을 무찌른 1등 공신은 인도, 미얀마의 평범한 농민군과 냉혹한 동남아의 정글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시 대동아공영의 2등 시민 자격으로 수많은 조선 젊은이가 제국군 소속으로 참전했다는 점이다. 또 수많은 조선인 위안부가 끌려간 장소는 필리핀, 싱가포르의 차이나타운과 사이판 제도, 멀리 미얀마 정글이었다. 동시에 1940년 중국 충칭으로 밀려난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결성해 1944년 참전한 첫 전쟁이 버마전선이었다. 

    과연 한국은 6·25전쟁의 피해자이기만 하고, 아시아의 비극에 책임이 없다고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일까. 그리고 이 같은 모순적 상황은 1970년대 베트남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은 20세기 전쟁의 가장 큰 피해 지역인 아시아에서 열린다. 그 남쪽 중심지가 바로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6·25전쟁으로 촉발한 아시아 냉전체제 자체이자 극복의 상징인 셈이다. 한반도 분단의 타협 장소가 싱가포르라는 얘기는 탈냉전을 향한 새로운 에너지를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 퍼뜨릴 가능성이 크다는 긍정적 신호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20세기 제국주의와 냉전체제의 극복’이 싱가포르 회담의 지리적 함의인 셈이다.

    역사적 회담 장소 어디가 될까
    전문가들 “샹그릴라 혹은 이스타나궁 될 것” 전망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 [동아DB]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 [동아DB]

    북·미 정상회담은 ‘아시아 냉전체제 종식’이란 거대한 이슈를 담은 회담인 만큼 구체적 장소 또한 주요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회담의 성공적 개최가 절실한 싱가포르 처지에서는 원활한 행사 진행이라는 실무적 입장과 역사적 회담에 걸맞은 상징적 장소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뒤따른다. 

    당초 유력한 행사 장소로 주목을 끈 곳은 ‘샹그릴라 호텔’과 싱가포르 남쪽 인공섬 ‘센토사 리조트’였다.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샹그릴라 호텔은 전통적으로 주요 국제행사가 열리는 장소다. 2002년부터 아시아 최대 규모 연례 안보회의인 일명 ‘샹그릴라 대화’를 개최해왔고, 2015년 중국과 대만 지도자의 66년 만에 첫 정상회담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검증된 장소라는 얘기. 센토사는 보안과 안전 면에서는 최적의 장소다. 섬 입구를 통제하는 순간 거의 완벽한 ‘섬 속의 섬’이 돼버린다. 

    싱가포르 현지 전문가들은 샹그릴라 호텔에 안정감과 무게감을 두고 있다. 반면 한국 관계자들은 내심 대통령궁인 이스타나(ISTANA)궁을 바라는 눈치다. 서구식 리조트에 가까운 센토사나 이미 잦은 국제행사로 이미지 소모가 심한 샹그릴라 호텔 모두 최적의 장소가 되기에는 미흡하다는 게 중론. 그래서 주목받는 장소가 바로 1869년 영국 총독의 관저로 만들어진 이스타나궁이다. 아시아의 식민지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좋은 장소로 이스타나궁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싱가포르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이스타나궁은 도시국가임을 고려할 때 공간이 꽤 넓다는 장점이 있다. 영국 건축이지만 그리스, 이탈리아 양식을 모방했고 18세기 인도 식민지풍을 가미한 신팔라디오 건축양식인 점이 독특하다. 지금은 싱가포르 최고책임자의 상징적 장소로 쓰이고 있다. 대통령이 기거하지는 않고, 최고 국빈 방문 시 의전용이자 국민 통합장소로 활용하는 식이다.

    싱가포르 이스타나궁(왼쪽)과 센토사 섬. [사진 제공·싱가포르 정부, 동아DB]

    싱가포르 이스타나궁(왼쪽)과 센토사 섬. [사진 제공·싱가포르 정부, 동아DB]

    북·미 정상회담이 단 하루만 열린다는 점에서 이스타나궁은 상징성과 보안성을 갖춘 최적의 장소라는 의견이 많다. 다만 싱가포르 정부가 이번 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 샹그릴라 호텔과 이스타나궁 가운데 한 곳으로 결정되리란 전망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 이외에도 TV를 통해 지켜볼 수많은 세계인은 회담 장소의 배경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추측할 것이다. 지난 200년간 아시아는 식민지배와 전쟁, 냉전을 거친 장소이고, ‘북한의 정상화’가 아시아 냉전체제 해체의 서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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