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대통령은 재벌을 개혁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남고 싶어한다. 그리고 재벌은 개혁되고 있다. 그러나 재벌 체제로 상징되는 한국 경제의 환부는 치유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또다른 상처를 남겨놓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신 관치 논쟁이다. 이는 ‘DJ 노믹스’의 뇌관과도 연결되는 문제다. 얼마 전 IMF 관리체제 2년 동안의 개혁을 결산하는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온 노동계 인사는 토론 중간에 빅딜 과정에서 정부 개입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자 아예 “그 문제는 여기서 따질 것이 아니라 (정권교체 후) 청문회에서 논의할 문제다”며 논란을 중단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논란의 핵심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무리하게 개입해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재벌개혁 2년을 맞는 세기말 한국의 화두는 온통 ‘시장’이다. IMF 사태의 주범으로 몰려 법정에까지 섰던 김인호전경제수석이 최근 펴낸 책 역시 ‘시장으로의 귀환’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시장 회귀를 주장하는 학자나 이론가들에 의해 밀리고 있다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부 역시 시장경제를 내세우고 있고 재벌개혁의 과정에서 법과 제도를 존중해 왔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이런 자신감의 핵심에는 바로 대한민국 헌법이 있다. 국가의 질서와 틀을 규정하는 헌법에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 조항이 명문화돼 있다는 것이다. 바로 헌법 119조 2항.
헌법 119조 1항은 분명히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2항은 조금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2항의 전문은 이렇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85년 헌법개정특위서 추가
누가 보아도 정부의 시장 개입을 ‘헌법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조항이다. ‘규제와 조정’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지만 적어도 김대중식 재벌개혁이 분명히 법치주의에 근거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문이다. 그러나 재계 일부에서는 ‘경제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이 조항의 개폐를 요구하고 있다.
헌법 119조 2항은 1985년 헌법개정 특별위원회에서 논의돼 추가된 조항이다. 당시 개헌특위의 3개 분과위원회 중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은 김종인전경제수석이다. 김전 수석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재정학 전공의 교수출신 정치인이다. 그만큼 그의 경제적 성향은 학계는 물론 정치권과 기업에도 충분히 알려질 만큼 알려진 상태였다.
이와 관련해 김전수석은 “내가 개헌특위의 경제분과 위원장을 맡으니까 전경련을 비롯한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당시 전경련은 실제로 헌법의 경제 조항과 관련해 ‘홍보대책 특별위원회’를 만드는 등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15년이 흐른 지금도 이 조항에 대한 논란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다. 김대중식 재벌개혁을 놓고 국가와 시장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임광규변호사는 헌법이라는 관점에서 김대중식 재벌개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대중식 재벌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헌법정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지나친 평등주의 논리는 서민 대중에게는 환영받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에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현재 금융권 구조조정을 위해 투신, 보증보험 등에 쏟아붓는 공적 자금 역시 결국 지금의 386세대들이 50, 60대가 돼서 갚아야 할 돈이라는 지적도 곁들였다.
그러나 이 조항을 삽입한 당사자인 김종인전경제수석은 “적어도 이 조항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IMF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위헌 논란이 제기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론을 펴는 경제학자들을 향해서도 “무조건 정부가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면 실업문제나 빈곤층문제 등도 정부개입 없이 그들이 해결해 놓겠다는 말인가”고 되묻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DJ노믹스를 설계한 핵심 경제학자 중 한명으로 현재 한국개발연구원장인 이진순씨 역시 헌법 119조2항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사람 중 한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적 논란을 벗어나더라도 분명히 시장 경제를 내세우는 김대중정부의 재벌개혁에 대한 우려의 시선은 남아 있다. 이른바 신 관치 논쟁이다. 재벌들간의 사업 맞교환, 즉 빅딜을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사재출연을 요구하는 등 정부가 고유한 역할을 벗어나 시장에 무리하게 개입했다는 것이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최근 일부 재벌 총수에 대한 사법처리 움직임을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정부와 재벌이 힘의 우위를 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해온 70년대 이후 경제정책사에서, 90년대 후반 다시 정부가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자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유승민박사는 “정부는 금융권에 대해 건전성 감독만을 하고 나머지는 정해진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면서 은행들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핵심적 분야에서는 법이 뒤로 밀리고 정부가 주도한 ‘약속’이나 ‘강박’ 등의 방식이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
물론 어디까지가 시장 자율이고 어디까지가 정부 개입인지를 정확하게 재단하기는 어렵다. 또 경제원론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 역시 구체적인 정책 결정 과정으로 들어가면 여러 장벽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서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물건만 가져다주면 앵무새도 훌륭한 경제학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농담까지 나왔다. 이는 ‘시장 만능’을 외치는 경제학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책 수단을 동원해 재벌개혁과 같은 과제를 수행해 나가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누가 정책의 주도권을 쥐는지에 따라 개혁의 결과는 판이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편으로는(one hand) 경기부양의 효과가 있지만, 반면(on the other hand) 물가상승의 우려도 있다’는 식의 교과서적인 답변만을 들고 오는 경제학자들을 향해 “제발 내게 ‘손이 하나만 있는’(one hand) 경제학자들을 데려다 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했을까.
그래서 상반되는 정책수단을 놓고 가장 적합한 방법을 골라낼 수 있는 정치지도자를 뽑는 일이 경제개혁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경희대 김동엽교수(경제학)는 “경제개혁의 이니셔티브를 쥐는 것은 여론조사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과는 관계가 없으며 정치적 위험에 개의치 않고 개혁에 대한 장기적 안목을 갖고 있는 지도자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재벌들이 시장 앞에 무릎꿇도록 하라”
그렇다면 김대중정부는 시장경제의 틀 안에서 재벌을 개혁하는 데 얼마만큼의 성과를 낸 것일까. 홍익대 김종석교수(경제학)는 “재벌개혁 과정에서 정부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만 결국은 시장기능 앞에 무너져가는 재벌체제의 주변에서 쓰레기를 줍고 설거지한 것에 불과하다”고 정부의 역할을 폄하했다. 물론 정부로서는 그렇다면 시장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누구냐고 항변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재벌을 제압했다는 오만함을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더욱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IMF 사태라는 위기 상황에 동원되었던 사재출연, 빅딜, 국유화된 은행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 약정 등 ‘과도기적’ 수단들이 또 하나의 영구법칙으로 굳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해진 셈이다. 이 과제는 정부에건 재벌에건 똑같은 무게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바로 ‘재벌들이 시장 앞에 무릎꿇도록 하라’는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무리하게 개입해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재벌개혁 2년을 맞는 세기말 한국의 화두는 온통 ‘시장’이다. IMF 사태의 주범으로 몰려 법정에까지 섰던 김인호전경제수석이 최근 펴낸 책 역시 ‘시장으로의 귀환’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시장 회귀를 주장하는 학자나 이론가들에 의해 밀리고 있다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부 역시 시장경제를 내세우고 있고 재벌개혁의 과정에서 법과 제도를 존중해 왔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이런 자신감의 핵심에는 바로 대한민국 헌법이 있다. 국가의 질서와 틀을 규정하는 헌법에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 조항이 명문화돼 있다는 것이다. 바로 헌법 119조 2항.
헌법 119조 1항은 분명히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2항은 조금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2항의 전문은 이렇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85년 헌법개정특위서 추가
누가 보아도 정부의 시장 개입을 ‘헌법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조항이다. ‘규제와 조정’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지만 적어도 김대중식 재벌개혁이 분명히 법치주의에 근거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문이다. 그러나 재계 일부에서는 ‘경제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이 조항의 개폐를 요구하고 있다.
헌법 119조 2항은 1985년 헌법개정 특별위원회에서 논의돼 추가된 조항이다. 당시 개헌특위의 3개 분과위원회 중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은 김종인전경제수석이다. 김전 수석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재정학 전공의 교수출신 정치인이다. 그만큼 그의 경제적 성향은 학계는 물론 정치권과 기업에도 충분히 알려질 만큼 알려진 상태였다.
이와 관련해 김전수석은 “내가 개헌특위의 경제분과 위원장을 맡으니까 전경련을 비롯한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당시 전경련은 실제로 헌법의 경제 조항과 관련해 ‘홍보대책 특별위원회’를 만드는 등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15년이 흐른 지금도 이 조항에 대한 논란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다. 김대중식 재벌개혁을 놓고 국가와 시장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임광규변호사는 헌법이라는 관점에서 김대중식 재벌개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대중식 재벌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헌법정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지나친 평등주의 논리는 서민 대중에게는 환영받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에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현재 금융권 구조조정을 위해 투신, 보증보험 등에 쏟아붓는 공적 자금 역시 결국 지금의 386세대들이 50, 60대가 돼서 갚아야 할 돈이라는 지적도 곁들였다.
그러나 이 조항을 삽입한 당사자인 김종인전경제수석은 “적어도 이 조항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IMF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위헌 논란이 제기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론을 펴는 경제학자들을 향해서도 “무조건 정부가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면 실업문제나 빈곤층문제 등도 정부개입 없이 그들이 해결해 놓겠다는 말인가”고 되묻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DJ노믹스를 설계한 핵심 경제학자 중 한명으로 현재 한국개발연구원장인 이진순씨 역시 헌법 119조2항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사람 중 한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적 논란을 벗어나더라도 분명히 시장 경제를 내세우는 김대중정부의 재벌개혁에 대한 우려의 시선은 남아 있다. 이른바 신 관치 논쟁이다. 재벌들간의 사업 맞교환, 즉 빅딜을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사재출연을 요구하는 등 정부가 고유한 역할을 벗어나 시장에 무리하게 개입했다는 것이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최근 일부 재벌 총수에 대한 사법처리 움직임을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정부와 재벌이 힘의 우위를 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해온 70년대 이후 경제정책사에서, 90년대 후반 다시 정부가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자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유승민박사는 “정부는 금융권에 대해 건전성 감독만을 하고 나머지는 정해진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면서 은행들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핵심적 분야에서는 법이 뒤로 밀리고 정부가 주도한 ‘약속’이나 ‘강박’ 등의 방식이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
물론 어디까지가 시장 자율이고 어디까지가 정부 개입인지를 정확하게 재단하기는 어렵다. 또 경제원론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 역시 구체적인 정책 결정 과정으로 들어가면 여러 장벽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서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물건만 가져다주면 앵무새도 훌륭한 경제학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농담까지 나왔다. 이는 ‘시장 만능’을 외치는 경제학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책 수단을 동원해 재벌개혁과 같은 과제를 수행해 나가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누가 정책의 주도권을 쥐는지에 따라 개혁의 결과는 판이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편으로는(one hand) 경기부양의 효과가 있지만, 반면(on the other hand) 물가상승의 우려도 있다’는 식의 교과서적인 답변만을 들고 오는 경제학자들을 향해 “제발 내게 ‘손이 하나만 있는’(one hand) 경제학자들을 데려다 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했을까.
그래서 상반되는 정책수단을 놓고 가장 적합한 방법을 골라낼 수 있는 정치지도자를 뽑는 일이 경제개혁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경희대 김동엽교수(경제학)는 “경제개혁의 이니셔티브를 쥐는 것은 여론조사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과는 관계가 없으며 정치적 위험에 개의치 않고 개혁에 대한 장기적 안목을 갖고 있는 지도자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재벌들이 시장 앞에 무릎꿇도록 하라”
그렇다면 김대중정부는 시장경제의 틀 안에서 재벌을 개혁하는 데 얼마만큼의 성과를 낸 것일까. 홍익대 김종석교수(경제학)는 “재벌개혁 과정에서 정부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만 결국은 시장기능 앞에 무너져가는 재벌체제의 주변에서 쓰레기를 줍고 설거지한 것에 불과하다”고 정부의 역할을 폄하했다. 물론 정부로서는 그렇다면 시장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누구냐고 항변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재벌을 제압했다는 오만함을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더욱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IMF 사태라는 위기 상황에 동원되었던 사재출연, 빅딜, 국유화된 은행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 약정 등 ‘과도기적’ 수단들이 또 하나의 영구법칙으로 굳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해진 셈이다. 이 과제는 정부에건 재벌에건 똑같은 무게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바로 ‘재벌들이 시장 앞에 무릎꿇도록 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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