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역사 혹은 전설의 흔적이 담겨있는 그릇이다. 특히 서양문화권 언어의 경우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뿌리가 흔히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맞닿곤 한다. ‘신화속으로 떠나는 언어여행’은 이렇듯 서양의 현대언어 속에 남아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커다란 족적’을 더듬으며 신화시대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나간 책이다.
이 책은 카오스(혼돈) 시대로부터 트로이 전쟁 이야기까지가 연대기 순으로 짜여 있다는 점에서는 통상적 신화기와 같다. 그러나 얼기설기 거미줄처럼 짜인 신화의 원형 중에서 잔가지는 과감히 쳐버리고, 대신 주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이들이 현대 언어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에 관심을 집중한 것이 특징이다. 관심의 구심점이 확실하고 진행이 스피디하다보니 일반 신화서와 다른 읽는 맛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신화 속…’에 실린 파생어의 예를 잠시 살펴보자. 즐거움의 여신 ‘뮤즈’(Muse)로부터 생성된 ‘뮤직’(Music)과 ‘뮤지엄’(Museum), 물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한 나르시소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나르시시즘(Narcissism),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공을 유혹한 요정의 이름 ‘사이렌’(siren), 치명적인 약점을 가리키는 아킬레스건 등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예다.
신화의 흔적은 특히 과학 분야에 많이 남아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원소나 행성을 발견했을 때 신들의 이름을 즐겨 붙였던 것. 아름다운 황색별 금성에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이름이, 호전적인 느낌의 붉은 별 화성에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이, 가장 빛나는 행성 목성에는 신들의 왕 제우스(영어로는 Neptune)가 붙여졌다. 재미있는 것은 각 행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에는 그들의 애인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점. 갈릴레오가 발견한 목성의 위성들에는 제우스의 연인이었던 이오, 에우로파, 가니메데(가니메데는 여성이 아니라 미청년이었다. 제우스에게는 동성애 경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칼리스토의 이름이 차례로 붙었다. 우라늄, 헬륨, 셀레늄 등 원소명도 하늘의 신 우라노스, 태양의 신 헬리오스, 달의 여신 셀레네로부터 따온 이름이다.
신화의 자취는 단어뿐 아니라 영어의 관용어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쾌락 대신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는 뜻의 ‘the choice of Heracles’라는 영어표현은 헤라클레스가 불멸의 삶을 얻기 위해 일부러 모험을 떠난다는 전설의 내용에서 비롯된 것. ‘a shirts of Nessus’는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한 네소스가 복수를 위해 헤라클레스의 아내에게 독이 묻은 셔츠를 선물했다는 일화에서 따온 말로 ‘치명적인 선물’을 뜻한다. ‘apple of discord’(불화의 사과)라는 표현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바쳐진 사과’를 둘러싸고 아프로디테와 헤라, 아테나간에 벌어진 싸움에서 파생된 것. 결국 이들간의 싸움이 트로이의 전쟁을 발발시킨다.
고대 신화라는 광맥에서 언어라는 보물을 캐내는 작업을 하기에, 아이작 아시모프는 참으로 적절한 필자가 아닐 수 없다. 그의 해박한 과학적 지식과 ‘쉬운 글쓰기’ 덕에 이 책은 폭넓은 독자층에게 지식과 재미를 동시에 선사하는 양서로서 사랑받을 듯싶다. 베테랑 역자의 번역도 대체로 무난한 편이다. 국내 번역출간 과정에서 원본에 없었던 도판과 사진을 대량 수록하고,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파생어를 도표로 정리해 실음으로써 독자들에게 서비스를 베푼 것도 돋보이는 점. 하지만 전체 책 분량의 20%를 차지할 정도(원본은 아마 번역출간본에 비해 훨씬 작은 부피였을 것이다)로 많은 도판과 사진을 실을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대웅 옮김/ 웅진출판 펴냄/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