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이 아니다.” 8월 진행된 국가정보원 간부급 인사에 대해 이병기 국정원장이 사석에서 남겼다는 말이다. 이 원장 부임 후 첫 인사였던 본부 실국장과 시도 지부장 등 1급 간부진 교체는 이후 청와대가 특정 인물을 ‘찍어’ 교체하라고 지시했다는 소식이 외부에 전해지면서 관심이 폭증한 바 있다. 국정원의 정치 중립이 절대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청와대의 이러한 행보는 무수한 뒷말을 낳기도 했다.
문제는 한 달여가 지난 지금 상황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복기해보면 심각성이 한층 더하다는 것. 핵심은 8월 인사파동 와중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국내 정보를 담당하는 간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안보부처라는 국정원 고유 기능과 관련한 업무 능력이나 개인 신상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정보 수집, 보고’라는 고질적인 약한 고리가 정보조직 전체를 뒤흔드는 사안으로 비화했다는 뜻이다.
“K국장 정윤회 씨 비판 보고서 작성”
K국장. 청와대가 교체를 요구했다는 당사자다. 총무국장이라는 자리는 인사실무 등 국정원 살림을 맡는 직위지만, K국장은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 아니라 국내 파트 정보 분석의 베테랑이라는 게 국회 정보위원회 등 정통한 인사들의 설명이다. 안팎의 평판은 상당히 긍정적인 편. 한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보고서를 탁월하게 쓰는 직원이었다. 사안을 종합적으로 보는 눈이 날카롭고 두뇌 회전이 빨랐다”고 촌평했다.
국내 정보의 종합분석 책임자로 유력시되던 K국장이 갑작스레 총무국장으로 발령받은 것 역시 청와대 측 주문 때문이었다고 소식통들은 전한다. 7월 이병기 원장 공식 취임 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간부급 인사 논의에서 “K를 국내 정보 업무에서 배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 국정원은 이를 반영해 정보 현장 업무와 관련 없는 총무국장으로 임명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공식 발령 수일 뒤 청와대는 K국장을 아예 퇴직시키라는 추가 주문을 내놓기에 이른다. 사전 논의를 통해 ‘청와대 의중’을 반영해 처리한 인사를 며칠 만에 번복하라는 요구였던 셈. 당혹한 국정원 수뇌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어렵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청와대의 뜻은 완강했고, 결국 K국장은 부서를 옮긴 지 일주일 만에 보직에서 물러나 대기 중이다. 아직은 직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상 퇴직을 앞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이렇듯 집요하게 특정인의 퇴직을 요구한 이유에 대해 안보당국 주변의 주된 시각은 “K국장이 박지만 EG 회장과 가까웠고, 정윤회 씨의 행보를 비판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밉보인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무렵 박 회장 측이 정보당국 관계자들과 접촉하는 등 부적절한 움직임을 보인 것이 사실이라는 게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의 말.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K국장이 정윤회와 관련해 이른바 ‘비선(秘線) 보고’를 했다는 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당시 K국장 직위나 권력 핵심 주변의 역학관계를 두루 살펴봐도 그림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K국장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관계자 대부분이 ‘무색무취’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국내 파트의 정보보고서는 특성상 늘 민감한 내용을 담기 마련이고 관련 직원들 역시 ‘권력 줄서기’ 유혹에 노출되기 십상이지만, K국장의 경우 이러한 뒷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 “정권교체가 반복되는 와중에도 큰 기복 없이 경력을 유지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이 대목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인물이 이번 인사에서 1급으로 승진한 C국장이다. 역시 국내 파트에서 오랜 기간 일했으며, 특히 국회 등 정치 현장을 출입한 경력이 길어 전문성을 갖췄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 정치권 인사들과 두터운 교분이 있음은 불문가지다. 쉽게 말해 이번 인사 즈음해 K국장과는 국내 정보 총괄업무를 두고 경쟁자로 꼽힐 만한 인물이었다.
C국장의 이름은 지난해 5월 논란이 됐던 이른바 ‘국정원 정치개입 문건’과 관련해 입질에 오른 바 있다.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공세 차단’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2011년 6월 무렵 야권을 중심으로 제기되던 반값등록금 운동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처 방안을 담고 있다. 문제는 이 문서의 보고라인에 청와대에서 파견근무 중이던 C국장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 당시 국정원 측은 “해당 문서는 국정원 공식문서가 아니다”라며 부인했지만, C국장은 사태 여파로 청와대를 떠나 국정원 본부로 복귀했다.
흥미롭게도 C국장은 2012년 대통령선거 이후 구성된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도 파견돼 근무했다. 엘리트 중 엘리트만 선택된다는 인수위 근무가 관가에서 ‘승진 엘리베이터’로 통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임 정부 청와대에서 행정관으로 일했던 인물이 새 정부 인수위에 파견된다는 것 역시 흔한 사례가 아니기는 마찬가지. 그리고 이번 인사에서 결국 국정원이 수집한 국내 정보를 총괄, 종합하는 국장 직위로 승진하게 된 셈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C국장의 승진과 해당 직위 임명 역시 청와대 주문에 따른 것이라는 안보당국 안팎의 설명이다. K국장 교체와 함께 청와대가 내려보낸 인사 관련 지시에 승진 대상자 두 사람의 이름이 있었고, 그중 한 명이 C국장이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C국장을 국내 정보 총괄 담당으로 밀기 위한 권력 주변 인사들의 움직임이 경쟁관계였던 K국장에 대한 비토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 ‘K는 박지만 라인’이라는 설(說)을 활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은 10월 초 단행된 국군기무사령관 교체와 맞물려 한층 복잡한 상황을 맞았다. 전임 이재수 사령관 역시 박지만 회장과 가까운 사이였던 까닭에 청와대가 ‘박지만 라인’ 정리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던 것.
이와 관련해 정부 고위 관계자는 “박 회장과 정윤회 씨의 권력투쟁 틈바구니에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는, 주요 사정기관 내부에서 ‘박지만 라인’에 관한 소문이 끊임없이 유포되는 것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과 그 가족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데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고, 사전에 위험 가능성을 제거하는 취지에서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거꾸로 누군가가 청와대 핵심의 이러한 기류를 ‘특정인 제거와 특정인 밀어주기’에 활용했을 개연성도 배제하기 어려워 보인다.
최대 피해자는 이병기 원장
국정원과 기무사는 모두 안보부처 소관이지만, 공교롭게도 이번에 논란이 있었던 자리는 모두 국내 문제, 특히 사정당국 업무에 속하는 범주다. 안보부처 고유의 논리보다 외부 정치와의 연관선상에서 파열음이 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현재 상황에서 8월 국정원 인사파동과 청와대 개입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은 바로 이병기 원장 자신이라는 게 안팎의 대체적인 시선이다.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그간의 이미지에 상처를 입는 결과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 전직 안보당국 관계자의 말이다.
“취임 이후 이 원장은 대북전략국 신설과 함께 남북관계 개선 업무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북측은 언제나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길 원한다. 이 원장의 위상이 흐릿해지면 국정원의 대북 비공개채널 임무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뜻이다. 청와대 내부 논리가 안보당국 고유의 업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8월 인사파동이 안타까운 가장 큰 이유다.”
문제는 한 달여가 지난 지금 상황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복기해보면 심각성이 한층 더하다는 것. 핵심은 8월 인사파동 와중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국내 정보를 담당하는 간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안보부처라는 국정원 고유 기능과 관련한 업무 능력이나 개인 신상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정보 수집, 보고’라는 고질적인 약한 고리가 정보조직 전체를 뒤흔드는 사안으로 비화했다는 뜻이다.
“K국장 정윤회 씨 비판 보고서 작성”
K국장. 청와대가 교체를 요구했다는 당사자다. 총무국장이라는 자리는 인사실무 등 국정원 살림을 맡는 직위지만, K국장은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 아니라 국내 파트 정보 분석의 베테랑이라는 게 국회 정보위원회 등 정통한 인사들의 설명이다. 안팎의 평판은 상당히 긍정적인 편. 한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보고서를 탁월하게 쓰는 직원이었다. 사안을 종합적으로 보는 눈이 날카롭고 두뇌 회전이 빨랐다”고 촌평했다.
국내 정보의 종합분석 책임자로 유력시되던 K국장이 갑작스레 총무국장으로 발령받은 것 역시 청와대 측 주문 때문이었다고 소식통들은 전한다. 7월 이병기 원장 공식 취임 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간부급 인사 논의에서 “K를 국내 정보 업무에서 배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 국정원은 이를 반영해 정보 현장 업무와 관련 없는 총무국장으로 임명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공식 발령 수일 뒤 청와대는 K국장을 아예 퇴직시키라는 추가 주문을 내놓기에 이른다. 사전 논의를 통해 ‘청와대 의중’을 반영해 처리한 인사를 며칠 만에 번복하라는 요구였던 셈. 당혹한 국정원 수뇌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어렵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청와대의 뜻은 완강했고, 결국 K국장은 부서를 옮긴 지 일주일 만에 보직에서 물러나 대기 중이다. 아직은 직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상 퇴직을 앞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이렇듯 집요하게 특정인의 퇴직을 요구한 이유에 대해 안보당국 주변의 주된 시각은 “K국장이 박지만 EG 회장과 가까웠고, 정윤회 씨의 행보를 비판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밉보인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무렵 박 회장 측이 정보당국 관계자들과 접촉하는 등 부적절한 움직임을 보인 것이 사실이라는 게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의 말.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K국장이 정윤회와 관련해 이른바 ‘비선(秘線) 보고’를 했다는 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당시 K국장 직위나 권력 핵심 주변의 역학관계를 두루 살펴봐도 그림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K국장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관계자 대부분이 ‘무색무취’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국내 파트의 정보보고서는 특성상 늘 민감한 내용을 담기 마련이고 관련 직원들 역시 ‘권력 줄서기’ 유혹에 노출되기 십상이지만, K국장의 경우 이러한 뒷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 “정권교체가 반복되는 와중에도 큰 기복 없이 경력을 유지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이 대목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인물이 이번 인사에서 1급으로 승진한 C국장이다. 역시 국내 파트에서 오랜 기간 일했으며, 특히 국회 등 정치 현장을 출입한 경력이 길어 전문성을 갖췄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 정치권 인사들과 두터운 교분이 있음은 불문가지다. 쉽게 말해 이번 인사 즈음해 K국장과는 국내 정보 총괄업무를 두고 경쟁자로 꼽힐 만한 인물이었다.
C국장의 이름은 지난해 5월 논란이 됐던 이른바 ‘국정원 정치개입 문건’과 관련해 입질에 오른 바 있다.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공세 차단’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2011년 6월 무렵 야권을 중심으로 제기되던 반값등록금 운동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처 방안을 담고 있다. 문제는 이 문서의 보고라인에 청와대에서 파견근무 중이던 C국장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 당시 국정원 측은 “해당 문서는 국정원 공식문서가 아니다”라며 부인했지만, C국장은 사태 여파로 청와대를 떠나 국정원 본부로 복귀했다.
흥미롭게도 C국장은 2012년 대통령선거 이후 구성된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도 파견돼 근무했다. 엘리트 중 엘리트만 선택된다는 인수위 근무가 관가에서 ‘승진 엘리베이터’로 통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임 정부 청와대에서 행정관으로 일했던 인물이 새 정부 인수위에 파견된다는 것 역시 흔한 사례가 아니기는 마찬가지. 그리고 이번 인사에서 결국 국정원이 수집한 국내 정보를 총괄, 종합하는 국장 직위로 승진하게 된 셈이다.
7월 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이병기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이러한 흐름은 10월 초 단행된 국군기무사령관 교체와 맞물려 한층 복잡한 상황을 맞았다. 전임 이재수 사령관 역시 박지만 회장과 가까운 사이였던 까닭에 청와대가 ‘박지만 라인’ 정리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던 것.
이와 관련해 정부 고위 관계자는 “박 회장과 정윤회 씨의 권력투쟁 틈바구니에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는, 주요 사정기관 내부에서 ‘박지만 라인’에 관한 소문이 끊임없이 유포되는 것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과 그 가족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데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고, 사전에 위험 가능성을 제거하는 취지에서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거꾸로 누군가가 청와대 핵심의 이러한 기류를 ‘특정인 제거와 특정인 밀어주기’에 활용했을 개연성도 배제하기 어려워 보인다.
최대 피해자는 이병기 원장
국정원과 기무사는 모두 안보부처 소관이지만, 공교롭게도 이번에 논란이 있었던 자리는 모두 국내 문제, 특히 사정당국 업무에 속하는 범주다. 안보부처 고유의 논리보다 외부 정치와의 연관선상에서 파열음이 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현재 상황에서 8월 국정원 인사파동과 청와대 개입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은 바로 이병기 원장 자신이라는 게 안팎의 대체적인 시선이다.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그간의 이미지에 상처를 입는 결과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 전직 안보당국 관계자의 말이다.
“취임 이후 이 원장은 대북전략국 신설과 함께 남북관계 개선 업무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북측은 언제나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길 원한다. 이 원장의 위상이 흐릿해지면 국정원의 대북 비공개채널 임무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뜻이다. 청와대 내부 논리가 안보당국 고유의 업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8월 인사파동이 안타까운 가장 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