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1991년생인 트리포노프는 현재 국제무대에서 가장 각광받는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명. 2010년 쇼팽 콩쿠르 3위에 이어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하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최고 음반사인 도이체 그라모폰(DG)과 전속계약을 맺는 한편, 전 세계 유수 무대를 누비며 화제와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젊은 거장이다.
국내 무대를 찾은 건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두 차례 리사이틀을 가졌던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당시 트리포노프와의 첫 만남은 거의 우주적 충격이었다. 그의 연주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빼어나다’ ‘해석이 훌륭하다’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이미 초월한 차원에서 펼쳐지는 연주였다. 비록 연륜이 부족해 얼마간 미숙함은 엿보일지언정 마치 호로비츠, 길렐스와 같은 전설적인 러시아 거장들의 예술성을 선취하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면모는 이번 공연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기대를 모았던 프로그램은 2부에 배치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피아노의 신’이 남긴 가장 까다로운 작품으로, 그 기술적 난도와 음악적 중압감은 연주자는 물론이고 감상자마저 힘들고 지치게 하기로 악명 높다. 그러나 트리포노프의 연주에서는 그런 고난이나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기술적 처리는 매우 능란하고 유연해 그 난도를 인지조차 하기 어려웠고, 그 대신 험난한 외형에 가려져 있던 풍부한 상상력과 감미로운 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마 그날 필자를 비롯한 많은 청중이 이 ‘괴물 같은’ 난곡이 실은 얼마나 아취 깊은 예술품이었는지 새삼 깨달았으리라.
트리포노프의 비범함은 1부에서도 빛을 발했다. 사실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제32번 c단조)가 프로그램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직 20대 초반인 그에게 너무 버거운 도전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1악장에서 지나치게 서두르는 듯한 모습에 ‘역시 아직은 어리구나’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연주가 1악장 말미를 거쳐 2악장으로 넘어가자 이내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언제 서둘렀느냐는 듯 차분한 자세로 그 난해하고 심오한 음률을 지극히 조화롭게 다듬어냈으며, 상당히 설득력 있고 수려한 정화의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어쩌면 베토벤 1악장에서 나타났던 조급함은 한시라도 빨리 (피아니스트에게 궁극의 경지 중 하나인) 2악장에 도달하고 싶다는 가히 청년다운 욕구와 열정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그것은 앞서 연주했던 첫 곡 바흐의 ‘환상곡과 푸가 g단조’에서 풍부하고 다채로운 오르간 음향과 정밀하고도 감각적인 대위법 처리를 통해, 그 기저에서 꿈틀거리던 단호한 패기와 격앙된 열기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앙코르로 연주한 쇼팽의 전주곡 두 곡과 바흐의 파르티타(라흐마니노프 편곡)도 본 프로그램 못지않은 매력과 감흥을 안겨줬다. 아울러 여느 러시아 연주자답지 않게 겸손히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 또 후면과 측면의 합창석까지 골고루 돌아가며 청중에게 예의를 표하는 인간미야말로 이 아름다운 청년에게 경이의 시선과 애정의 미소를 동시에 보내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