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세, 198cm, 90kg, 3권의 소설.”
1972년 프랑스 라디오에서 소개한 파트리크 모디아노(사진)다. 겨우 3권의 소설, 소위 점령기 3부작이라 부르는 ‘에투알 광장’ ‘야간 순찰’ ‘순환도로’를 발표한 25세 청년을 45분간 단독 인터뷰한 라디오 자료는 2008년 ‘책과 오디오’라는 시리즈로 출간됐다. 지금은 전설이 된 특유의 눌변으로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와 미래 포부를 설명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세기가 바뀐 올해 10월 9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자신이 선정되자 69세가 된 이 작가의 일성이 “묘하다, 내가 왜 상을 받았는지 심사위원이 좀 설명해줬으면 좋겠다”였다.
세월이 지나도 그의 말투는 여전했다. 말투뿐 아니라 작품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는 평생 약간의 변주만 했을 뿐 한 권의 책만 썼다고 고백했다.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의 미묘한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했다’는 선정 이유가 정작 당사자에게 그다지 흡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바로 며칠 전인 10월 2일 발간한 그의 신작은 “가을의 파리를 관광하려면 바람이 불어 지도를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 모디아노의 신작 소설을 권한다. 지도보다 들고 다니기 편할 것”이라는 조롱에 가까운 평을 받았다.
“내가 왜 상 받았는지 설명해달라”
하지만 닷새 후 그의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또 다른 평론가는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은 문학성 자체보다 생태주의, 인권주의, 여성주의 등 문학 외적인 요소가 크게 고려됐다. 모디아노의 수상으로 이제 노벨문학상이 문학의 본령을 되찾았다”고 평했다. 어쨌거나 그는 표변하는 세평을 오랫동안 등지고 홀로 한 우물을 팠다. 그것은 심사위원이 적절히 요약한 ‘기억의 예술’이다.
그의 자서전 ‘혈통’(2005)은 “1945년 7월 30일, 나치 점령기에 만난 유대인 남자와 벨기에 여자 사이에서 나는 태어났다”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수상쩍은 범법자 세계에서 각종 사업에 분주했고 어머니는 연극과 영화에 온통 정신이 팔린 여배우였다. 유대인으로 몇 차례 체포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점령기에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암시장에서 목돈도 챙겼다. 아들에게는 점령기에 살아남은 아버지의 행적이 영원한 수수께끼가 됐고 그 미지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 결국 그의 강박관념이 됐다.
‘혈통’은 부모 무관심 속에서 기숙학교를 전전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을 남 이야기하듯 담담히 기록한 작품이다. 작가와 어머니를 가난 속에 버려두고 젊은 여자와 새 살림을 차린 아버지는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작가와 어머니는 극도의 가난에 빠져 소소한 것들을 훔쳐가며 연명했다. 모디아노에게 도서관 책이란 마음의 양식에 앞서 몰래 훔쳐내 빵과 바꿔야 하는 장물이던 시절이다. 약속된 양육비를 재촉하려고 간 아들을 무단주거침입으로 경찰에 신고한 아버지에 대한 일화는 자서전뿐 아니라 소설 ‘도라 브루더’에서도 반복될 정도로 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묘하게도 부모에 대한 실망과 반감은 그를 예술의 길로 안내한 표지판이 됐고 마침내 프랑스인이 가장 잊고 싶어 하는 어두운 역사를 집요하게 놓지 않는 소설가로 만들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를 문단으로 이끈 사람은 시인이자 작가 레몽 크노였다. 그러나 그는 크노보다 조르주 페렉의 작품에 더 공감했다. 독일 나치 치하에서 부모를 잃은 유대인 페렉 역시 어두운 시절에 대한 기억 혹은 망각의 문제에 깊이 사로잡힌 작가였기 때문이다.
1973년 페렉이 서명해 모디아노에게 선물한 ‘어두운 상점’은 모디아노가 1978년 공쿠르상을 받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모태가 됐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나치 점령기 평생 사회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연 양복점, 세탁소, 보석상, 모피점 등이 몰려 있는 골목 상권을 뜻하는 별칭이다. 그들은 가난과 박해에서 벗어나고자 어둠 속에 숨거나 신원을 위장하며 생명을 부지했다. 프랑스 부역자들은 그들을 사냥하고 색출해 재산을 착복한 후 죽음의 수용소로 내몰았다.
수첩·일기 등이 문학적 소품
모디아노는 여러 소설에서 그들을 무자비한 악마처럼 그렸지만, 루이 아라공의 단편 ‘부역자들’에서는 그들 역시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고 전쟁이 끝나자 감쪽같이 과거를 지우고 새사람으로 변신했다. 우리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가 한때는 600만 명을 학살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간도살자, 혹은 뭇사람을 죽도록 괴롭혔던 고문기술자였음을 모르고 살고 있다. 점령기 프랑스 파리경찰청에는 이웃을 유대인이라고 신고하는 익명의 투서가 물밀 듯 몰려들었다고 한다. 평소 웃는 낯으로 대하지만 앙심을 품었던 사람을 유대인으로 고발해 곤경에 빠뜨리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생한 민낯은 이렇듯 어두운 시절에 더욱 환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인간의 정체는 과거의 집적과 그 기억에 불과하다. 기억과 망각의 문제는 모디아노의 개인사와 집단의 역사가 맞물리면서 그의 문학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후기작으로 가면서 점차 특정 인간과 국가를 넘어선 보편적 문제인 인간의 정체성, 기억과 망각으로 관심이 확장됐고 그것이 바로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이 짧게 요약한 모디아노의 ‘기억의 예술’이다. 데카르트의 말을 조금 바꿔 “나는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모디아노의 생각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 행위는 물리적 철칙에 반한다. 시간의 불가역성에 맞서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양가적이다. 행복한 추억은 고단한 현재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지만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과거의 트라우마 탓에 우울, 심지어 광기에 빠지기도 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주인공은 남의 신분과 과거를 캐는 탐정이지만 정작 자신은 기억상실증 환자다. 자신의 과거, 그 기억을 되살리려고 뭇사람을 만나지만 그의 정체는 완강하게 어둠에 싸여 있다.
그래서 망각에 저항하는 수첩, 일기, 사진, 전화번호부 같은 물건은 모디아노가 즐겨 사용하는 문학적 소품이다. 비록 옛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과거의 장소, 실종된 인물로 인도하는 중요한 장치다. 그의 소설 제목만 보더라도 광장, 거리, 카페 같은 공간적 명사가 자주 나타나고, 형용사는 상실이나 망각과 연관된 것이 많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주로 파리 골목을 헤매며 과거를 추적한다. 시간여행이 공간 순례로 변한 그의 소설이 앞서 인용한 평론가의 지적처럼 관광지도로 읽힐 수 있는 소이가 바로 여기 있다. 공간에 대한 기억은 벽에 켜켜이 붙은 광고 포스터와 같아서 한쪽씩 떼어낼 때마다 조금씩 과거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 거리 이름, 어린 시절 드나들던 극장이 허물어진 자리에 들어선 카페, 널찍해진 골목 등 모디아노는 상세한 공간 묘사를 통해 독자를 과거로 인도한다.
그의 소설에서 공간 묘사, 특히 거리 명칭과 주소에 대한 설명이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불필요할 정도로 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시간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간적 보상, 혹은 기억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지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공간에 집착하는 등장인물 덕에 독자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서술의 시간 배경은 종종 착각해도 공간만은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현재와 과거 겹치고 부딪치고
최근작 ‘네가 동네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은 잃어버린 수첩을 주운 미지의 남자로부터 걸려온 전화벨 소리로 시작된다. 오후 한나절 선잠에 빠진 주인공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깬다. 낮과 저녁의 경계선, 꿈인지 생시인지 모호한 상태에서 맞이한 불청객은 그를 과거로 안내하지만 그는 문득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과거 복원이 아니라 기억상실은 아닐지 자문한다. 기억은 공간의 순례, 물증과 증인의 확인 같은 어려운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의외의 순간 아주 쉽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가볍게 코끝을 스치는 냄새, 바람 한 줄기, 눈부신 햇살을 통해 소설 주인공은 순식간에 과거로 이동한다. 특히 코야말로 사진과 글로 기록, 보존할 수 없는 향기, 순식간에 사라지는 덧없는 냄새를 포착하는 감각기관이다.
‘야간 사고’에서 주인공은 에테르를 예로 들어 후각과 기억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과거를 가장 잘 되살리는 것은 후각이라고 하는데 에테르의 냄새는 내게 항상 기묘한 효과를 일으킨다. 그것은 나의 유년기의 냄새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에테르는 잠과 연관되며 통증을 없애주기도 해서 그것이 드러냈던 이미지는 금세 희미해진다. 내가 유년기 추억이 그토록 흐릿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에테르는 기억과 망각을 동시에 유발한다.”
그의 소설이 아름다운 문체에도 뚜렷한 줄거리가 잡히지 않는 것은 현재와 과거가 수시로 겹치고, 그가 부딪치는 무수한 과거의 증인들도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덧없고 흔들리는 탓에 언필칭 선형적 서사구조를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기억의 복원, 혹은 자신의 글쓰기 작업을 꿈에 비유한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후 조각난 이미지를 꿰맞춰 일관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수첩에서 비롯된 과거 여행은 결국 어린 시절 겪었던 체험을 되살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작은 보석’의 화자처럼 ‘네가 동네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의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낯선 여자에게 맡겨진다. 그 여자가 모종의 범죄에 연루돼 피신하는 바람에 어린 주인공은 미지의 공간에 남겨진다. 여자는 동네에서 길을 잃지 말라며 그에게 임시 거처 주소가 적힌 작은 쪽지를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그 여자마저 주인공을 버려두고 홀연히 사라진다. 추적과 도피, 방황과 방기, 그리고 실종은 서사가 분열된 소설을 일종의 추리소설처럼 읽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창가에 서서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 중간쯤 열쇠를 잃어버린 트렁크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일기, 편지, 사진첩, 수첩 등 딱히 버리기가 망설여지는 물건을 트렁크에 넣어 벽장에 깊이 파묻어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열쇠마저 잃어버려 애물단지가 된 트렁크를 바라본다. 열쇠를 잃어버린 것은 ‘고의적 무의식’의 발로다. 형용모순(oxymoron), 이 단어가 바로 인간을 요약하는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다. 공간만 차지하는 그 애물단지를 조심스레 개봉한 후 진짜 기억을 차단하는 가짜 기억을 거둬내고 인간 본성을 직시하는 것이 작가의 힘, 혹은 글의 의무이기도 하다.
1972년 프랑스 라디오에서 소개한 파트리크 모디아노(사진)다. 겨우 3권의 소설, 소위 점령기 3부작이라 부르는 ‘에투알 광장’ ‘야간 순찰’ ‘순환도로’를 발표한 25세 청년을 45분간 단독 인터뷰한 라디오 자료는 2008년 ‘책과 오디오’라는 시리즈로 출간됐다. 지금은 전설이 된 특유의 눌변으로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와 미래 포부를 설명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세기가 바뀐 올해 10월 9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자신이 선정되자 69세가 된 이 작가의 일성이 “묘하다, 내가 왜 상을 받았는지 심사위원이 좀 설명해줬으면 좋겠다”였다.
세월이 지나도 그의 말투는 여전했다. 말투뿐 아니라 작품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는 평생 약간의 변주만 했을 뿐 한 권의 책만 썼다고 고백했다.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의 미묘한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했다’는 선정 이유가 정작 당사자에게 그다지 흡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바로 며칠 전인 10월 2일 발간한 그의 신작은 “가을의 파리를 관광하려면 바람이 불어 지도를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 모디아노의 신작 소설을 권한다. 지도보다 들고 다니기 편할 것”이라는 조롱에 가까운 평을 받았다.
“내가 왜 상 받았는지 설명해달라”
하지만 닷새 후 그의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또 다른 평론가는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은 문학성 자체보다 생태주의, 인권주의, 여성주의 등 문학 외적인 요소가 크게 고려됐다. 모디아노의 수상으로 이제 노벨문학상이 문학의 본령을 되찾았다”고 평했다. 어쨌거나 그는 표변하는 세평을 오랫동안 등지고 홀로 한 우물을 팠다. 그것은 심사위원이 적절히 요약한 ‘기억의 예술’이다.
그의 자서전 ‘혈통’(2005)은 “1945년 7월 30일, 나치 점령기에 만난 유대인 남자와 벨기에 여자 사이에서 나는 태어났다”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수상쩍은 범법자 세계에서 각종 사업에 분주했고 어머니는 연극과 영화에 온통 정신이 팔린 여배우였다. 유대인으로 몇 차례 체포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점령기에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암시장에서 목돈도 챙겼다. 아들에게는 점령기에 살아남은 아버지의 행적이 영원한 수수께끼가 됐고 그 미지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 결국 그의 강박관념이 됐다.
‘혈통’은 부모 무관심 속에서 기숙학교를 전전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을 남 이야기하듯 담담히 기록한 작품이다. 작가와 어머니를 가난 속에 버려두고 젊은 여자와 새 살림을 차린 아버지는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작가와 어머니는 극도의 가난에 빠져 소소한 것들을 훔쳐가며 연명했다. 모디아노에게 도서관 책이란 마음의 양식에 앞서 몰래 훔쳐내 빵과 바꿔야 하는 장물이던 시절이다. 약속된 양육비를 재촉하려고 간 아들을 무단주거침입으로 경찰에 신고한 아버지에 대한 일화는 자서전뿐 아니라 소설 ‘도라 브루더’에서도 반복될 정도로 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묘하게도 부모에 대한 실망과 반감은 그를 예술의 길로 안내한 표지판이 됐고 마침내 프랑스인이 가장 잊고 싶어 하는 어두운 역사를 집요하게 놓지 않는 소설가로 만들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를 문단으로 이끈 사람은 시인이자 작가 레몽 크노였다. 그러나 그는 크노보다 조르주 페렉의 작품에 더 공감했다. 독일 나치 치하에서 부모를 잃은 유대인 페렉 역시 어두운 시절에 대한 기억 혹은 망각의 문제에 깊이 사로잡힌 작가였기 때문이다.
1973년 페렉이 서명해 모디아노에게 선물한 ‘어두운 상점’은 모디아노가 1978년 공쿠르상을 받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모태가 됐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나치 점령기 평생 사회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연 양복점, 세탁소, 보석상, 모피점 등이 몰려 있는 골목 상권을 뜻하는 별칭이다. 그들은 가난과 박해에서 벗어나고자 어둠 속에 숨거나 신원을 위장하며 생명을 부지했다. 프랑스 부역자들은 그들을 사냥하고 색출해 재산을 착복한 후 죽음의 수용소로 내몰았다.
수첩·일기 등이 문학적 소품
모디아노는 여러 소설에서 그들을 무자비한 악마처럼 그렸지만, 루이 아라공의 단편 ‘부역자들’에서는 그들 역시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고 전쟁이 끝나자 감쪽같이 과거를 지우고 새사람으로 변신했다. 우리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가 한때는 600만 명을 학살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간도살자, 혹은 뭇사람을 죽도록 괴롭혔던 고문기술자였음을 모르고 살고 있다. 점령기 프랑스 파리경찰청에는 이웃을 유대인이라고 신고하는 익명의 투서가 물밀 듯 몰려들었다고 한다. 평소 웃는 낯으로 대하지만 앙심을 품었던 사람을 유대인으로 고발해 곤경에 빠뜨리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생한 민낯은 이렇듯 어두운 시절에 더욱 환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인간의 정체는 과거의 집적과 그 기억에 불과하다. 기억과 망각의 문제는 모디아노의 개인사와 집단의 역사가 맞물리면서 그의 문학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후기작으로 가면서 점차 특정 인간과 국가를 넘어선 보편적 문제인 인간의 정체성, 기억과 망각으로 관심이 확장됐고 그것이 바로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이 짧게 요약한 모디아노의 ‘기억의 예술’이다. 데카르트의 말을 조금 바꿔 “나는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모디아노의 생각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 행위는 물리적 철칙에 반한다. 시간의 불가역성에 맞서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양가적이다. 행복한 추억은 고단한 현재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지만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과거의 트라우마 탓에 우울, 심지어 광기에 빠지기도 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주인공은 남의 신분과 과거를 캐는 탐정이지만 정작 자신은 기억상실증 환자다. 자신의 과거, 그 기억을 되살리려고 뭇사람을 만나지만 그의 정체는 완강하게 어둠에 싸여 있다.
그래서 망각에 저항하는 수첩, 일기, 사진, 전화번호부 같은 물건은 모디아노가 즐겨 사용하는 문학적 소품이다. 비록 옛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과거의 장소, 실종된 인물로 인도하는 중요한 장치다. 그의 소설 제목만 보더라도 광장, 거리, 카페 같은 공간적 명사가 자주 나타나고, 형용사는 상실이나 망각과 연관된 것이 많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주로 파리 골목을 헤매며 과거를 추적한다. 시간여행이 공간 순례로 변한 그의 소설이 앞서 인용한 평론가의 지적처럼 관광지도로 읽힐 수 있는 소이가 바로 여기 있다. 공간에 대한 기억은 벽에 켜켜이 붙은 광고 포스터와 같아서 한쪽씩 떼어낼 때마다 조금씩 과거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 거리 이름, 어린 시절 드나들던 극장이 허물어진 자리에 들어선 카페, 널찍해진 골목 등 모디아노는 상세한 공간 묘사를 통해 독자를 과거로 인도한다.
그의 소설에서 공간 묘사, 특히 거리 명칭과 주소에 대한 설명이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불필요할 정도로 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시간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간적 보상, 혹은 기억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지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공간에 집착하는 등장인물 덕에 독자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서술의 시간 배경은 종종 착각해도 공간만은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현재와 과거 겹치고 부딪치고
최근작 ‘네가 동네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은 잃어버린 수첩을 주운 미지의 남자로부터 걸려온 전화벨 소리로 시작된다. 오후 한나절 선잠에 빠진 주인공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깬다. 낮과 저녁의 경계선, 꿈인지 생시인지 모호한 상태에서 맞이한 불청객은 그를 과거로 안내하지만 그는 문득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과거 복원이 아니라 기억상실은 아닐지 자문한다. 기억은 공간의 순례, 물증과 증인의 확인 같은 어려운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의외의 순간 아주 쉽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가볍게 코끝을 스치는 냄새, 바람 한 줄기, 눈부신 햇살을 통해 소설 주인공은 순식간에 과거로 이동한다. 특히 코야말로 사진과 글로 기록, 보존할 수 없는 향기, 순식간에 사라지는 덧없는 냄새를 포착하는 감각기관이다.
‘야간 사고’에서 주인공은 에테르를 예로 들어 후각과 기억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과거를 가장 잘 되살리는 것은 후각이라고 하는데 에테르의 냄새는 내게 항상 기묘한 효과를 일으킨다. 그것은 나의 유년기의 냄새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에테르는 잠과 연관되며 통증을 없애주기도 해서 그것이 드러냈던 이미지는 금세 희미해진다. 내가 유년기 추억이 그토록 흐릿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에테르는 기억과 망각을 동시에 유발한다.”
그의 소설이 아름다운 문체에도 뚜렷한 줄거리가 잡히지 않는 것은 현재와 과거가 수시로 겹치고, 그가 부딪치는 무수한 과거의 증인들도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덧없고 흔들리는 탓에 언필칭 선형적 서사구조를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기억의 복원, 혹은 자신의 글쓰기 작업을 꿈에 비유한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후 조각난 이미지를 꿰맞춰 일관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수첩에서 비롯된 과거 여행은 결국 어린 시절 겪었던 체험을 되살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작은 보석’의 화자처럼 ‘네가 동네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의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낯선 여자에게 맡겨진다. 그 여자가 모종의 범죄에 연루돼 피신하는 바람에 어린 주인공은 미지의 공간에 남겨진다. 여자는 동네에서 길을 잃지 말라며 그에게 임시 거처 주소가 적힌 작은 쪽지를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그 여자마저 주인공을 버려두고 홀연히 사라진다. 추적과 도피, 방황과 방기, 그리고 실종은 서사가 분열된 소설을 일종의 추리소설처럼 읽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창가에 서서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 중간쯤 열쇠를 잃어버린 트렁크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일기, 편지, 사진첩, 수첩 등 딱히 버리기가 망설여지는 물건을 트렁크에 넣어 벽장에 깊이 파묻어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열쇠마저 잃어버려 애물단지가 된 트렁크를 바라본다. 열쇠를 잃어버린 것은 ‘고의적 무의식’의 발로다. 형용모순(oxymoron), 이 단어가 바로 인간을 요약하는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다. 공간만 차지하는 그 애물단지를 조심스레 개봉한 후 진짜 기억을 차단하는 가짜 기억을 거둬내고 인간 본성을 직시하는 것이 작가의 힘, 혹은 글의 의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