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이 독자에게 감흥을 주려면 5시간이 필요하지만 연극이나 영화는 2시간이면 족해. 반면 노래는 단 3분이면 충분하잖아. 그래서 노래가 위대한 거야.”
1980~90년대 대학가 운동권에서 프로파간다를 책임진 노래패는 자신들의 장점을 ‘3분이론’으로 설명했다. 한 노래패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노래가 빠진 대중 집회가 어디 있으랴. 종교단체도 성가대 화음으로 조직력을 평가하지 않더냐.”
노래, 특히 대중가요는 3~4분 분량의 구성에 감정의 기승전결과 완벽한 서사구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청중의 마음을 빠르고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트렌드를 반영한 노랫말에 악기와 혈기왕성한 젊음을 결합하면 1960년대 세계를 발칵 뒤집은 ‘로큰롤 혁명’이나 ‘비틀스 마니아’ 같은 신드롬이 일어난다.
21세기는 대중문화를 전 지구적으로 사고파는 시대다. 한국은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소비국에서 생산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 소속 가수의 프랑스 파리 공연 성공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류의 시발인 드라마와 달리 케이팝(K-pop·한국 대중가요) 인기는 우리를 기쁘면서도 당혹스럽게 한다.
서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력적 콘텐츠
케이팝은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파괴했다. 무대 주인공은 백인(白人)이고, 객석 관중은 황인(黃人)이라는 고정관념 말이다. 마이클 잭슨, 비욘세, 에미넘은 한국 스타가 감히 넘보기 어려운 성역 아니었던가.
한국에서 조련한 가수가 아시아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사실은 놀라울 게 없는 익숙한 현실이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아시아 우등생인 일본에 케이팝 열풍이 부는 것 또한 ‘욘사마(배용준) 쇼크’를 지켜본 터라 놀랍지 않다. 그럼에도 서구 젊은이가 케이팝에 관심을 보이는 현상은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뿐인가. 인터넷에서는 케이팝 가수의 춤과 노래를 따라 한 수만 건의 UCC 동영상이 확산 중이다. 영어권은 물론, 프랑스어권과 독일어권에서도 한국 가수를 대상으로 한 팬 사이트가 즐비하다. 한국어 연예뉴스를 번역해 자국에 소개하는 사이트도 각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류 사이트 중 가장 오래된(11년) 숨피닷컴(wwww.soompi.com)을 운영했던 재미교포 조이스 킴(34)의 얘기를 들어보자.
“미국, 캐나다에서도 케이팝과 한류는 여성과 10대를 중심으로 매력적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 완벽한 외모와 절도 있는 퍼포먼스는 서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다.”
세계 음악시장이 어떤 곳인가. 팝스타는 영미권 문화에서 성장해 거대 미디어 자본의 후원을 받으며 세계를 호령했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이웃집에서 성장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 아티스트가 단박에 글로벌 스타로 떠오른 것을 목격했다. 케이팝의 대표주자인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이상 SM) ‘빅뱅’ ‘2NE1’(이상 YG엔터테인먼트) ‘2PM’ ‘2AM’(이상 JYP엔터테인먼트)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1~2년 전만 하더라도 ‘4초 가수’ ‘춤추는 기계’라고 조롱받았다. ‘노예계약’의 피해자라는 안타까운 시선도 쏟아졌다. 특히 미성년 멤버의 옷차림, 춤사위는 감시와 규제 대상으로 여겨졌다.
6월 중순 파리 제니스홀에서 열린 SM 파리 공연은 한국 대중문화 역사의 분수령이 될 만하다. 물론 SM의 탁월한 홍보 전략에 일부 언론이 흥분한 측면도 적지 않다. 그러나 파리 공연은 수익성이나 완성도와 무관하게 케이팝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줬다. ‘변방’의 한국 음악이 ‘만방’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제니스홀은 좌석이 7000여 석에 불과한 파리의 낡은 공연장이다. SM 이수만 대표는 파리 공연의 상징성을 알았다. 그는 여세를 몰아 SM의 차세대 대표주자 샤이니를 비틀스의 탄생지이자 대중음악의 성지인 영국 런던 애비로드로 데려갔다. 영국 10대 소녀들이 샤이니의 방문에 흥분하는 모습은 1964년 미국을 첫 방문한 비틀스의 모습이 떠오를 만큼 환상적이었다.
한국 언론만 호들갑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일본,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미디어가 케이팝에 열광하는 유럽 10대 청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다.
이런 ‘문화 역전’은 세계화 세례를 받고 자란 20~30대에게도 신선한 일이었다. 기성 세대는 올림픽 금메달 못지않은 낭보로 느꼈다.
케이팝이 세계가 반할 만한 문화상품으로 등극할 가능성을 엿보이자 관계자들의 행보와 호흡도 빨라졌다.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해 문화콘텐츠 단체는 케이팝 지원책을, 증권업계는 엔터테인먼트 주식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내놓느라 바쁘다. 각종 미디어는 케이팝의 성공 요인을 분석하고 이익이 얼마나 될지 셈하느라 분주하다.
노랑머리의 코쟁이 젊은이가 한국 가수에 열광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도 모르게 한국 문화의 위상이 높아진 걸까. 도대체 ‘케이팝’ ‘신한류’ ‘초(超)한류’ ‘한류2.0’이라는 낱말은 실체가 있는 걸까. 2011년 여름, 우리 관심은 케이팝이라는 신기한 문화 조류로 향한다.
댄스팝 재해석에 귀여운 음악 가미
“케이팝이란 현재 가장 빠르게 성장해 전 세계 대중문화계에 영향을 끼치는 국제적 문화 현상 중 하나입니다(K-pop is currently one of the fastest growing global phenomena to hit the pop culture scene).”
케이팝 뉴스사이트 올케이팝닷컴 운영자 조니는 이렇게 말한다. 케이팝이란 낱말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이 명명한 것이다. 케이팝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음악장르 가운데 하나다. 전 세계적인 미디어 유튜브(www.youtube.com)는 이 같은 사실을 숫자로 확인해준다.
YG엔터테인먼트(이하 YG)의 유튜브 채널은 지난 1년간 4억8112만 건의 클릭 수를 기록했다. SM은 4억6516만 건, JYP엔터테인먼트(이하 JYP)는 2억3000만 건이다. YG가 기록한 클릭 수는 단일 회사 채널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구글 왕국’에서 변방에 불과하던 구글코리아를 단박에 세계를 매혹하는 콘텐츠 생산지로 부각했다.
인구 5000만 명의 작은 국가가 전 세계적으로 ‘뜨는 곳(Hot Place)’이 됐다는 사실은 한국인에게 낯설다. 케이팝의 도약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문화 현상이다.
서강대 신윤환 교수는 “한류는 세계 학계에서도 경이적인 눈초리로 바라보는 문화 현상”이라면서 “지금껏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것도 폭력적 과정을 거쳐 흘렀는데 한류는 이런 과정 없이 세계시장으로 퍼져나갔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고 말한다.
케이팝의 매력은 미국식 팝음악을 듣기 쉬운 댄스 팝으로 재해석하고 아시아적 특징인 발랄함과 귀여움을 가미했다는 데 있다. 케이팝은 태생부터 글로벌한 세계 문화라는 얘기다.
케이팝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은 것은 최근 일이다. 소녀시대 멤버들의 당당하면서도 낭만적인 워킹, 포미닛 현아의 도발적인 섹시 코드, 카라의 천진난만함, 2NE1의 폭발적 무대 매너. 서구의 그 어떤 대중음악도 품지 못한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백미를 케이팝에 담았다. 일본 케이팝 전문가 후루야 마사유키는 케이팝을 이렇게 분석한다.
“케이팝의 장점은 완벽한 외모다. 패션, 화장, 헤어스타일 같은 것도 외모에 포함한다. 게다가 군무(群舞)가 완벽하고 치열하다. 귀에 착 감기는 후크송의 매력도 대단하다.”
결국 케이팝의 매력은 △듣기 쉬운 댄스 팝 △반복되는 후크송 △절도 있는 군무 △화려한 뮤직비디오로 정리된다.
케이팝은 시기적으로도 절묘한 때 세상에 나왔다. 세계 음반시장을 양분해온 미국과 유럽은 경기침체가 지속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활력이 사라져 더는 매력적인 10대 팝스타가 태어나지 못한다. 한동안 유럽을 강타한, 걸그룹 원조 격인 ‘스파이스 걸스’는 어느덧 흘러간 물로 전락했다. 미국은 ‘조나스 브라더스’ ‘저스틴 비버’ 같은 10대 아이돌을 보유했지만 아시아시장은 ‘뉴 키즈 온 더 블록’에 열광하던 1980년대처럼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케이팝은 확실히 전 세계적으로 ‘뜨는’ 콘텐츠다. 영국의 축구평론가 존 듀어든은 이렇게 촌평한다.
“케이팝이 외국인 멤버를 영입해 해외시장에 매진하는 모습은 영국 프리미어리그가 성공 가도를 달릴 때처럼 스케일이 크고 자신감에 넘친다.”
SM 이수만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동양 출신 스타가 전 세계의 별이 될 날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메이드인(Made In)이 아니라 메이드바이(Made By)가 중요한 시대가 온다”고 역설하곤 했다.
케이팝이 외국인 멤버를 발 빠르게 영입해 국제화를 지향한 것은 일본 제이팝(J-pop)과 대비된다. 일본은 내수시장에 만족한 탓에 1990년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제이팝 붐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거인 틈에서 간신히 명함 내민 정도”
그러나 케이팝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또한 적지 않다. 전 세계 대중문화산업을 비교연구해온 연예산업연구소 장규수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구조적으로 보면 한류의 등장은 아시아 국가의 정치·경제·문화 환경이 변하면서 생겨난 순환적 기회를 잘 활용한 덕분이다. 대중문화 개방 정도에 따라 홍콩과 일본의 시대가 저물고 한국에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케이팝은 아시아 시장에서 중국·홍콩·일본 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소비된다고 표현하는 게 적확하다. 서구에서는 미국(할리우드)과 인도(볼리우드), 일본(J-pop)이라는 거인 틈에 끼어 간신히 명함을 내민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전문가의 견해를 종합하면 유럽을 몸 달게 한 소녀시대, 그러니까 케이팝이 ‘서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현실① : 케이팝은 아시아에서도 일본, 중화(中華)권 대중문화와 경합을 시작했을 뿐이다.
△현실② : 서유럽에서 케이팝은 대세가 아니다.일부 10대가 즐기는 하위문화로서 인기를 끄는 것일 뿐이다.
△현실③ : 현재로서 케이팝은 한때 부흥했다 쇠퇴의 길을 걸은 제이팝의 전철을 밟을 공산이 크다.
△현실④ : 중화권 대중문화가 그랬듯 케이팝도 국가 규제가 많은 데다 글로벌 전략이 빈약해 한때의 흐름으로 그칠 소지가 많다.
△현실⑤ : 아직은 잘 팔리는 가전제품을 만드는 수준에 불과하다.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애플 같은 메이저 지위에 오를 수준이 아니다.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 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일본과 중국의 콘텐츠 시장은 한국의 10여 배에 이를 만큼 크다. 게다가 케이팝은 미국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지 못한다. 10대에게 어필하는 댄스 팝에 비주얼 요소를 가미해 1차적 성공을 거뒀을 뿐이다.”
아시아 인구는 40억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70%다. 그러나 아시아는 영어권이나 스페인어권처럼 단일언어 시장이 아니다. 민족과 종교, 지역에 따라 복잡다단하게 나뉜다. 게다가 저작권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나라가 많아 수익성도 낮다.
또한 케이팝이 아시아를 정복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케이팝 팬은 도쿄, 오사카, 타이페이, 홍콩 같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10대에 한정한 것이 현실이다. 다른 세대와 지역에서는 자국 콘텐츠와 중국어 및 일본어 콘텐츠가 압도적이다. 거대시장 중국만 해도 대부분의 음악 판매대에서 홍콩, 일본 음반이 케이팝 음반보다 잘 팔린다. 소녀시대가 일본에서 20만 장의 앨범을 파는 동안 경쟁 아이돌인 AKB48은 120만 장을 파는 게 현실이다.
또 케이팝이 10대에 특화한 하위문화라는 약점을 지닌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케이팝 가수는 대부분 가창력으로 승부하기보다 10대 감수성에 호소하는 아이돌 걸·보이 그룹이라는 점도 한계다. 세계 팝시장은 영어권 음악이 주류이며 케이팝은 영어권 팝의 지류이자 신생 콘텐츠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대기업 지사장으로 일하는 K씨는 현지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서유럽의 일부 마니아에게 케이팝이 인기를 끄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사회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케이팝에 관심을 가진 수십만 명 가운데 수천 명이 파리에 모였다고 보는 게 적확하다. 인도, 중국, 일본의 유명 가수가 와도 비슷한 규모의 팬이 모인다.”
국수주의와 정복주의적 태도 경계
소녀시대는 케이팝의 특장과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7년에 달하는 스파르타식 훈련, 영어·일본어·중국어 등 3개 국어 구사 능력, 지역별 맞춤 튜닝이 소녀시대의 장점이다. 노래는 스웨덴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고수에게서 공수해온다. 이 같은 장점이 역으로 소녀시대의 한계다.
소녀시대의 음악, 그러니까 케이팝은 조립품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듣는다. 한국 제조업은 조립에 능하지만 창의성이 떨어진다. 엔터테인먼트 산업도 제조업의 그것을 닮았다.
“케이팝은 제조업에 빗대면 갤럭시S를 만들어내는 수준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애플의 아이폰처럼 진화할지는 미지수다.”(음악평론가 강헌)
운동권 출신으로 대기업에서 일하는 김태돈(42) 씨가 걸 그룹을 바라보는 심정은 최근 2년 사이 180도 바뀌었다.
“일본 사람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니 소녀시대가 애국자 같은 느낌이 든다. 케이팝 스타의 데뷔 초기에는 상큼한 조카 또래 아이들의 ‘청춘예찬’이 보기 좋았는데, 지금은 해외 대도시 콘서트에서 이들에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한다. 도쿄, 타이페이, 싱가포르, 로스앤젤레스(LA)에서 팬이 환호성 지르는 모습을 유튜브를 통해 지켜보면 한국이 세계의 주류가 된 것 같아 행복하다.”
한류를 사랑하는 음악인들이 경계하는 것은 케이팝을 바라보는 ‘국수주의’ ‘정복주의’적 태도다. 케이팝이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성장한 만큼 ‘탈지역주의’를 지향해야 하는데 오히려 민족주의 관점에서 활용해 한때 스쳐가는 바람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DR뮤직 윤등룡 대표는 이렇게 조언한다.
“케이팝은 더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세계인이 즐기는 보편 문화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출신 스타가 케이팝 시스템을 디딤돌 삼아 세계적 스타로 성장하게끔 도와야 한다. 그것이 케이팝을 더욱 빛나게 하는 길이다.”
1980~90년대 대학가 운동권에서 프로파간다를 책임진 노래패는 자신들의 장점을 ‘3분이론’으로 설명했다. 한 노래패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노래가 빠진 대중 집회가 어디 있으랴. 종교단체도 성가대 화음으로 조직력을 평가하지 않더냐.”
노래, 특히 대중가요는 3~4분 분량의 구성에 감정의 기승전결과 완벽한 서사구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청중의 마음을 빠르고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트렌드를 반영한 노랫말에 악기와 혈기왕성한 젊음을 결합하면 1960년대 세계를 발칵 뒤집은 ‘로큰롤 혁명’이나 ‘비틀스 마니아’ 같은 신드롬이 일어난다.
21세기는 대중문화를 전 지구적으로 사고파는 시대다. 한국은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소비국에서 생산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 소속 가수의 프랑스 파리 공연 성공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류의 시발인 드라마와 달리 케이팝(K-pop·한국 대중가요) 인기는 우리를 기쁘면서도 당혹스럽게 한다.
서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력적 콘텐츠
케이팝은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파괴했다. 무대 주인공은 백인(白人)이고, 객석 관중은 황인(黃人)이라는 고정관념 말이다. 마이클 잭슨, 비욘세, 에미넘은 한국 스타가 감히 넘보기 어려운 성역 아니었던가.
한국에서 조련한 가수가 아시아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사실은 놀라울 게 없는 익숙한 현실이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아시아 우등생인 일본에 케이팝 열풍이 부는 것 또한 ‘욘사마(배용준) 쇼크’를 지켜본 터라 놀랍지 않다. 그럼에도 서구 젊은이가 케이팝에 관심을 보이는 현상은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뿐인가. 인터넷에서는 케이팝 가수의 춤과 노래를 따라 한 수만 건의 UCC 동영상이 확산 중이다. 영어권은 물론, 프랑스어권과 독일어권에서도 한국 가수를 대상으로 한 팬 사이트가 즐비하다. 한국어 연예뉴스를 번역해 자국에 소개하는 사이트도 각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류 사이트 중 가장 오래된(11년) 숨피닷컴(wwww.soompi.com)을 운영했던 재미교포 조이스 킴(34)의 얘기를 들어보자.
“미국, 캐나다에서도 케이팝과 한류는 여성과 10대를 중심으로 매력적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 완벽한 외모와 절도 있는 퍼포먼스는 서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다.”
세계 음악시장이 어떤 곳인가. 팝스타는 영미권 문화에서 성장해 거대 미디어 자본의 후원을 받으며 세계를 호령했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이웃집에서 성장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 아티스트가 단박에 글로벌 스타로 떠오른 것을 목격했다. 케이팝의 대표주자인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이상 SM) ‘빅뱅’ ‘2NE1’(이상 YG엔터테인먼트) ‘2PM’ ‘2AM’(이상 JYP엔터테인먼트)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1~2년 전만 하더라도 ‘4초 가수’ ‘춤추는 기계’라고 조롱받았다. ‘노예계약’의 피해자라는 안타까운 시선도 쏟아졌다. 특히 미성년 멤버의 옷차림, 춤사위는 감시와 규제 대상으로 여겨졌다.
6월 중순 파리 제니스홀에서 열린 SM 파리 공연은 한국 대중문화 역사의 분수령이 될 만하다. 물론 SM의 탁월한 홍보 전략에 일부 언론이 흥분한 측면도 적지 않다. 그러나 파리 공연은 수익성이나 완성도와 무관하게 케이팝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줬다. ‘변방’의 한국 음악이 ‘만방’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제니스홀은 좌석이 7000여 석에 불과한 파리의 낡은 공연장이다. SM 이수만 대표는 파리 공연의 상징성을 알았다. 그는 여세를 몰아 SM의 차세대 대표주자 샤이니를 비틀스의 탄생지이자 대중음악의 성지인 영국 런던 애비로드로 데려갔다. 영국 10대 소녀들이 샤이니의 방문에 흥분하는 모습은 1964년 미국을 첫 방문한 비틀스의 모습이 떠오를 만큼 환상적이었다.
한국 언론만 호들갑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일본,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미디어가 케이팝에 열광하는 유럽 10대 청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다.
이런 ‘문화 역전’은 세계화 세례를 받고 자란 20~30대에게도 신선한 일이었다. 기성 세대는 올림픽 금메달 못지않은 낭보로 느꼈다.
케이팝이 세계가 반할 만한 문화상품으로 등극할 가능성을 엿보이자 관계자들의 행보와 호흡도 빨라졌다.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해 문화콘텐츠 단체는 케이팝 지원책을, 증권업계는 엔터테인먼트 주식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내놓느라 바쁘다. 각종 미디어는 케이팝의 성공 요인을 분석하고 이익이 얼마나 될지 셈하느라 분주하다.
노랑머리의 코쟁이 젊은이가 한국 가수에 열광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도 모르게 한국 문화의 위상이 높아진 걸까. 도대체 ‘케이팝’ ‘신한류’ ‘초(超)한류’ ‘한류2.0’이라는 낱말은 실체가 있는 걸까. 2011년 여름, 우리 관심은 케이팝이라는 신기한 문화 조류로 향한다.
소녀시대.
“케이팝이란 현재 가장 빠르게 성장해 전 세계 대중문화계에 영향을 끼치는 국제적 문화 현상 중 하나입니다(K-pop is currently one of the fastest growing global phenomena to hit the pop culture scene).”
케이팝 뉴스사이트 올케이팝닷컴 운영자 조니는 이렇게 말한다. 케이팝이란 낱말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이 명명한 것이다. 케이팝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음악장르 가운데 하나다. 전 세계적인 미디어 유튜브(www.youtube.com)는 이 같은 사실을 숫자로 확인해준다.
YG엔터테인먼트(이하 YG)의 유튜브 채널은 지난 1년간 4억8112만 건의 클릭 수를 기록했다. SM은 4억6516만 건, JYP엔터테인먼트(이하 JYP)는 2억3000만 건이다. YG가 기록한 클릭 수는 단일 회사 채널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구글 왕국’에서 변방에 불과하던 구글코리아를 단박에 세계를 매혹하는 콘텐츠 생산지로 부각했다.
인구 5000만 명의 작은 국가가 전 세계적으로 ‘뜨는 곳(Hot Place)’이 됐다는 사실은 한국인에게 낯설다. 케이팝의 도약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문화 현상이다.
서강대 신윤환 교수는 “한류는 세계 학계에서도 경이적인 눈초리로 바라보는 문화 현상”이라면서 “지금껏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것도 폭력적 과정을 거쳐 흘렀는데 한류는 이런 과정 없이 세계시장으로 퍼져나갔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고 말한다.
케이팝의 매력은 미국식 팝음악을 듣기 쉬운 댄스 팝으로 재해석하고 아시아적 특징인 발랄함과 귀여움을 가미했다는 데 있다. 케이팝은 태생부터 글로벌한 세계 문화라는 얘기다.
케이팝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은 것은 최근 일이다. 소녀시대 멤버들의 당당하면서도 낭만적인 워킹, 포미닛 현아의 도발적인 섹시 코드, 카라의 천진난만함, 2NE1의 폭발적 무대 매너. 서구의 그 어떤 대중음악도 품지 못한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백미를 케이팝에 담았다. 일본 케이팝 전문가 후루야 마사유키는 케이팝을 이렇게 분석한다.
“케이팝의 장점은 완벽한 외모다. 패션, 화장, 헤어스타일 같은 것도 외모에 포함한다. 게다가 군무(群舞)가 완벽하고 치열하다. 귀에 착 감기는 후크송의 매력도 대단하다.”
결국 케이팝의 매력은 △듣기 쉬운 댄스 팝 △반복되는 후크송 △절도 있는 군무 △화려한 뮤직비디오로 정리된다.
케이팝은 시기적으로도 절묘한 때 세상에 나왔다. 세계 음반시장을 양분해온 미국과 유럽은 경기침체가 지속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활력이 사라져 더는 매력적인 10대 팝스타가 태어나지 못한다. 한동안 유럽을 강타한, 걸그룹 원조 격인 ‘스파이스 걸스’는 어느덧 흘러간 물로 전락했다. 미국은 ‘조나스 브라더스’ ‘저스틴 비버’ 같은 10대 아이돌을 보유했지만 아시아시장은 ‘뉴 키즈 온 더 블록’에 열광하던 1980년대처럼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케이팝은 확실히 전 세계적으로 ‘뜨는’ 콘텐츠다. 영국의 축구평론가 존 듀어든은 이렇게 촌평한다.
“케이팝이 외국인 멤버를 영입해 해외시장에 매진하는 모습은 영국 프리미어리그가 성공 가도를 달릴 때처럼 스케일이 크고 자신감에 넘친다.”
SM 이수만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동양 출신 스타가 전 세계의 별이 될 날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메이드인(Made In)이 아니라 메이드바이(Made By)가 중요한 시대가 온다”고 역설하곤 했다.
케이팝이 외국인 멤버를 발 빠르게 영입해 국제화를 지향한 것은 일본 제이팝(J-pop)과 대비된다. 일본은 내수시장에 만족한 탓에 1990년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제이팝 붐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거인 틈에서 간신히 명함 내민 정도”
케이팝을 통해 한국은 문화 컨텐츠 생산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보면 한류의 등장은 아시아 국가의 정치·경제·문화 환경이 변하면서 생겨난 순환적 기회를 잘 활용한 덕분이다. 대중문화 개방 정도에 따라 홍콩과 일본의 시대가 저물고 한국에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케이팝은 아시아 시장에서 중국·홍콩·일본 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소비된다고 표현하는 게 적확하다. 서구에서는 미국(할리우드)과 인도(볼리우드), 일본(J-pop)이라는 거인 틈에 끼어 간신히 명함을 내민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전문가의 견해를 종합하면 유럽을 몸 달게 한 소녀시대, 그러니까 케이팝이 ‘서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현실① : 케이팝은 아시아에서도 일본, 중화(中華)권 대중문화와 경합을 시작했을 뿐이다.
△현실② : 서유럽에서 케이팝은 대세가 아니다.일부 10대가 즐기는 하위문화로서 인기를 끄는 것일 뿐이다.
△현실③ : 현재로서 케이팝은 한때 부흥했다 쇠퇴의 길을 걸은 제이팝의 전철을 밟을 공산이 크다.
△현실④ : 중화권 대중문화가 그랬듯 케이팝도 국가 규제가 많은 데다 글로벌 전략이 빈약해 한때의 흐름으로 그칠 소지가 많다.
△현실⑤ : 아직은 잘 팔리는 가전제품을 만드는 수준에 불과하다.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애플 같은 메이저 지위에 오를 수준이 아니다.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 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일본과 중국의 콘텐츠 시장은 한국의 10여 배에 이를 만큼 크다. 게다가 케이팝은 미국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지 못한다. 10대에게 어필하는 댄스 팝에 비주얼 요소를 가미해 1차적 성공을 거뒀을 뿐이다.”
아시아 인구는 40억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70%다. 그러나 아시아는 영어권이나 스페인어권처럼 단일언어 시장이 아니다. 민족과 종교, 지역에 따라 복잡다단하게 나뉜다. 게다가 저작권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나라가 많아 수익성도 낮다.
또한 케이팝이 아시아를 정복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케이팝 팬은 도쿄, 오사카, 타이페이, 홍콩 같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10대에 한정한 것이 현실이다. 다른 세대와 지역에서는 자국 콘텐츠와 중국어 및 일본어 콘텐츠가 압도적이다. 거대시장 중국만 해도 대부분의 음악 판매대에서 홍콩, 일본 음반이 케이팝 음반보다 잘 팔린다. 소녀시대가 일본에서 20만 장의 앨범을 파는 동안 경쟁 아이돌인 AKB48은 120만 장을 파는 게 현실이다.
또 케이팝이 10대에 특화한 하위문화라는 약점을 지닌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케이팝 가수는 대부분 가창력으로 승부하기보다 10대 감수성에 호소하는 아이돌 걸·보이 그룹이라는 점도 한계다. 세계 팝시장은 영어권 음악이 주류이며 케이팝은 영어권 팝의 지류이자 신생 콘텐츠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대기업 지사장으로 일하는 K씨는 현지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서유럽의 일부 마니아에게 케이팝이 인기를 끄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사회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케이팝에 관심을 가진 수십만 명 가운데 수천 명이 파리에 모였다고 보는 게 적확하다. 인도, 중국, 일본의 유명 가수가 와도 비슷한 규모의 팬이 모인다.”
국수주의와 정복주의적 태도 경계
일본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시사 주간지 ‘아에라’ 6월 20일자 표지에 한국 아이돌 그룹 2PM이 실렸다.
소녀시대의 음악, 그러니까 케이팝은 조립품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듣는다. 한국 제조업은 조립에 능하지만 창의성이 떨어진다. 엔터테인먼트 산업도 제조업의 그것을 닮았다.
“케이팝은 제조업에 빗대면 갤럭시S를 만들어내는 수준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애플의 아이폰처럼 진화할지는 미지수다.”(음악평론가 강헌)
운동권 출신으로 대기업에서 일하는 김태돈(42) 씨가 걸 그룹을 바라보는 심정은 최근 2년 사이 180도 바뀌었다.
“일본 사람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니 소녀시대가 애국자 같은 느낌이 든다. 케이팝 스타의 데뷔 초기에는 상큼한 조카 또래 아이들의 ‘청춘예찬’이 보기 좋았는데, 지금은 해외 대도시 콘서트에서 이들에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한다. 도쿄, 타이페이, 싱가포르, 로스앤젤레스(LA)에서 팬이 환호성 지르는 모습을 유튜브를 통해 지켜보면 한국이 세계의 주류가 된 것 같아 행복하다.”
한류를 사랑하는 음악인들이 경계하는 것은 케이팝을 바라보는 ‘국수주의’ ‘정복주의’적 태도다. 케이팝이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성장한 만큼 ‘탈지역주의’를 지향해야 하는데 오히려 민족주의 관점에서 활용해 한때 스쳐가는 바람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DR뮤직 윤등룡 대표는 이렇게 조언한다.
“케이팝은 더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세계인이 즐기는 보편 문화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출신 스타가 케이팝 시스템을 디딤돌 삼아 세계적 스타로 성장하게끔 도와야 한다. 그것이 케이팝을 더욱 빛나게 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