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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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性의 역사도 억압과 굴종”

눈물·감정 억제하고 씩씩함 강요… 영원한 남성성은 존재하지 않는 시대적 ‘산물’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5-02-04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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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男性의 역사도 억압과 굴종”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 논쟁을 일으킨 이경자씨의 소설 ‘절반의 실패’. 이경자씨는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차별 받아야 하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권력구조를 치열하게 천착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분명 ‘절반의 실패’는 남성의 권위에 상처를 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남녀관계를 대립구도로 놓고 증오를 거침없이 드러낸 독선주의”(소설가 유순하)라는 비판도 면치 못했다. 말 그대로 ‘절반의 실패’라면 또 다른 반쪽 남성들은 승리의 영광을 누리는 걸까. 불행하게도 ‘절반의 실패’는 곧 전체의 실패였다.

    19세기 초반 병역 의무 거센 반발

    토마스 퀴네 등 10명의 독일학자가 쓴 ‘남성의 역사’(솔 펴냄)는 남성이라고 해서 모두 가부장제도의 집단적 수혜자가 아님을 강조한다. 남성의 역사도 승자의 역사가 아닌, 피해자의 역사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책은 비록 19~20세기에 걸쳐 독일이라는 제한된 무대를 배경으로 썼지만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피지배계급을 지배계급의 남성적 헤게모니에 종속케 하는 은밀한 문화적 코드”(임지현, 한양대 교수·사학과)로 남성의 역사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갖는다. 임교수는 ‘남성의 발명’이란 글에서 “눈물을 감추고 진솔한 감정을 억제하도록 길들여진 ‘씩씩한’ 남성에게서 전 인격적인 자아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며, 눈물을 강요 받고 이성을 감추도록 길들여진 ‘순종적’ 여성들에게서도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임교수는 순수하고 본질적이며 영원한 남성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시대적 ‘발명’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19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가정의 중심에 자리하며, 아이들과 정서적 교감을 나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엄격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권위적 존재로서 아버지의 상이 완성된다. 그것은 19세기 후반부터 ‘직업과 가정 간의 까다로운 균형’이 깨지면서 남성들이 점차 직업상의 의무에 정력을 소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남성들은 경쟁과 성취의 압박을 받는다. 일을 삶의 목표로 삼지 않으면 도태하는 위기의식 속에 남편은 일과 가정 중 선택을 강요 받았다. 물론 모든 변화가 19세기 후반 한꺼번에 찾아온 것은 아니다. 1813~15년 프랑스에 저항하는 독일해방전쟁 동안 국가는 ‘애국적인 남성성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강화해 나갔다. 당대 역사가이자 신문기자이던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는 ‘남성은 누구인가’라는 시를 쓰고 그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했다.

    그는 자유와 의무와 정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남자라네/ 그 경건한 용기 앞에서는 모두 훌륭하게 생각되고, 그의 형편은 결코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네/ 그는 신과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남자라네/ 그는 무덤에 이를 때까지 몸과 마음을 바쳐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네. 남성성에 경의를 표하는 이런 투의 글들로 매스컴이 도배되었고, 애국심과 전투력은 곧 남성성과 밀접한 상호 연관성을 갖는다.

    전쟁 내내 남성은 ‘호전적이고 활동적인’ 덕목만 강조되었고, 사람들은 ‘전쟁영웅’이 곧 남성성의 입증이라 생각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남성들에게조차 무기를 든 호전적인 남성상은 낯선 이미지였다는 점이다. 오히려 많은 시민은 병역의 의무(국민개병주의)를 이해하지 못했고, 거세게 반발했다. 병역의 의무 대신 국가가 남성에게 제공한 선물은 ‘선거권’이었다. “의무(병역)가 있는 자만이 권리 또한 가질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선거권은 남성들의 당연한 권리였고 여성은 정치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이로써 ‘남성에게는 국가가, 여성에게는 가정이’라는 19세기 시민사회의 구호가 완성되었다.

    “男性의 역사도 억압과 굴종”
    군대와 함께 남성성을 길러준 것은 스포츠다. 특히 19세기 초 시작된 독일 체조운동(성인남성과 학생·소년들이 각종 동호회를 만들어 체력단련을 했다)은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남성성의 핵심인 강한 육체와 대담함 그리고 용기를 길러주었다. 남성성은 체조장에서 훈련되고, 전쟁터에서 증명되었다. 남성들만의 문화는 대학서클에서 꽃피운다. 여기서 만들어진 남성동맹은 결코 패배할 수 없는 남성성에 대한 신비로운 생각들로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특히 19세기 대학서클은 남성의 상징인 결투와 음주문화의 중심지였다. 남성들은 결투의식을 통해 고통과 피에 직면해서도 굳건함을 잃지 않는 영웅적 가치를 연출했고, 실제로 육체에 각인하기 위해 기꺼이 칼자국을 내기도 했다. 또 당시 대학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맥주 마시기다. 당시 엘리트 남성들 사이에 알코올 소비는 곧 육체적 힘으로 받아들여져 과시적이고 지나친 음주가 유행했다.

    군대와 교육기관을 거치면서 강화된 ‘남성동맹의식’의 핵심은 친구냐 적이냐의 이분법이다. 즉 남성들은 모든 대상을 합치할 수 없는 두 영역으로 이분화시킴으로써 질서를 만들어 냈다. 이들은 지도자 추종이라는 원칙과 성년식(동맹 가입), 협동, 명령과 복종, 엘리트주의로서 남성동맹신드롬을 완성시켰다. 반면 당시 민주주의, 선거, 평등원칙과 의사소통, 개인적 자유에 대한 인정 등은 매우 여성적인 가치로 인식되어 남성동맹과 대립적 구도에 놓였다.

    19세기 초 독일의 국민개병제 도입으로 시작한 남성의 군사화 경향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정점에 달한다. 전쟁 기간 남성들은 새로운 공동체, 즉 ‘전우애’로 묶인 남성공동체를 경험했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람이 바로 히틀러다. 히틀러는 전우라는 남성동맹에 토대를 둔 민족공동체 건설을 꿈꿨다. 그리고 전우애를 가지고 유사 전우조직(유겐트, 노동전우들의 직장공동체, 여성전우들로서의 가족)을 만들도록 독려했다.

    히틀러가 정의한 20세기 새로운 인간(남성)은 가족이나 여성이 아니라 민족과 조국에 감정적인 유대관계를 갖고 이를 위해 늘 몸바칠 준비를 갖춰야 했다. “충성스럽게 살고, 죽음을 거부하며 싸우고, 웃으면서 죽는다”(히틀러 유겐트의 모토)라는 생각이 이 시대 독일 남성을 지배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과 함께 들어온 미국 문화, 즉 엘비스의 멋진 머리와 구레나룻은 히틀러 유겐트 출신들의 각진 스포츠 머리와 비교되었다. 비로소 사람들은 “남성답다는 것이 무엇인가” 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독일 청소년들은 군인 같은 남성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강인함, 날카로움, 공격적 능력의 과시와 한없이 오만한 처신 등으로 대표되는 독일 남성성은 점차 희미해진다. 반면 1950년대 중반 이후 여성들은 남성이 독점해 온 문화적 자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성질서를 변화시켰다. 그들은 학교와 사무실, 공개석상에서 바지를 입고 오토바이를 탔다.

    남성은 문화적 산물이다. 남성은 단지 여성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이는 남성성의 창조에 여성들이 여러 방식으로 관계하고 있음을 뜻한다. 임지현 교수가 이 책의 해설에서 “페미니즘은 여성만의 화두가 아니라 억압에서의 해방을 지행하는 모든 남성의 화두”라 말한 것도 이런 뜻이다. 왜 남성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질문을 해보지 않은 것일까.

    “왜 남성은 불평해서는 안 되고, 군인은 울어서는 안 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남성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그것은 남성답지 못한가”(스트린드베리의 ‘아버지’에서,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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